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교단주는 몸을 바닥에 더욱 납작하게 붙였다.
성체가 되면 바로 저렇게 될 것을 염려해 새끼 때부터 길을 들여 놓으려고 했건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였고, 그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 됐다.
‘빌어먹을, 힐라이야시여,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종을 보우하소서.’
그리고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눈앞의 잔혹한 신수가 차분히 입을 연 것이다.
“교단을 지키는 게 이곳에 몸담은 자들의 사명이랬지. 태어난 이유, 살아가는 목적, 죽음의 의미.”
“그, 그렇……”
“이제 너도 그 사명이란 걸 이행할 때야.”
“……!”
사명을 이행하라는 건 일단 목숨은 붙여 놓겠단 소리가 아닌가?
교단주의 낯에 화색이 돌았으나, 그 역시 찰나였다.
“앞으로 백의 교단은 아스트로카 제국의 정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될 거다.”
뭐라?
정수리로 뚝 떨어진 명령에 교단주가 경악했다.
“하, 하지만……! 교, 교단은 철저한 중립의 원칙을……”
“내가 중립이 아닌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신수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리 여섯 개 달린 벌레를 보는 눈도 저것보다는 온정 있으리라.
아이칼이 쯧 혀를 차곤 무심히 중얼거렸다.
“하기 싫으면 말든가. 아직 남은 인간은 많으니.”
“제가……!”
희게 질린 교단주가 바닥에 이마를 찧을 기세로 절박하게 외쳤다.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아스트로카에 힐라이야의 가호를…….”
“아스트로카가 아니라 블라스코.”
“예! 블라스, 코옥……!”
교단주가 이제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블라스코라면 마귀를 비호하는 거긴데? 대대로 백의 교단과는 대척점에 있는 가문인데……?
“싫어?”
“아, 아닙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은푸른색 안광 앞에서 교단주의 경악은 무척이나 하잘것없어졌다.
지켜보던 이스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 죽이고 살려 두게? 다 살려도 저 늙은이만은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일전에 거래한 게 있어서.”
“거래? 무슨 거래? ……아, 루테와?”
아이칼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곧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템을 떠나던 새벽, 아이칼이 공작의 서재 창문으로 익숙하게 들어가는 걸 봤다.
‘그때 모종의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지?’
이스마의 짐작대로다. 그날 밤 서재에서는 아이칼과 루테 블라스코 간의 협약이 맺어졌다.
“성체화가 끝나면 교단부터 장악해라. 단, 교단을 와해하지는 말고. 네 수중에 둬.”
“왜?”
“백의 교단은 여신의 대리자지. 세계의 중립자로서 선악을 극명히 나누는 교단이 이쪽에 선다면 황실을 압박하기도 한결 편할 터. 너의 권력이 필요하다.”
아이칼은 블라스코와 황실 간의 대립에 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 순간, 루테 블라스코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네가 그렇게 해 준다면, 나중에 돌아왔을 때 카티 옆에 있게는 해 주마.”
“그게 그쪽 허락이 필요한 일이야? 왜?”
“카티샤는 너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바랄 테니까. 내가 절대 너만은 인정 못 한다며 드러누워서 시위라도 벌이면 내 딸이 누구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지?”
“당연히 나.”
“……기분 나쁜 자신감이로군. 틀렸어. 카티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다.”
“아닐걸. 헤르젠 블라스코면 모를까.”
어쩐지 대답을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씁쓸해지고 마는 사실이었다.
루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귀엽게 생긴 걸 천운으로 알아라, 파수꾼. 조금만 덜 생겼어도 넌 탈락이야. 변덕스러운 신수 주제에 누구 딸을 감히…….”
“내가 굳이 그쪽 합격점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일부러 이러냐?”
루테 블라스코는 결국 역정을 내며 ‘그래서 거래할 거냐 말 거냐’ 종용했고, 아이칼은 받아들였다. 이러나저러나 방해꾼들은 하나라도 없애는 쪽이 이득이니.
그렇게 그날 카티샤는 모르는 비밀스런 거래가 성립했다.
아이칼은 힐끗 발치에 엎드린 교단주를 일별했다.
“어차피 쓸모를 다하면 죽일 거.”
교단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신수가 입꼬리를 살짝 당겨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하루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영감.”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교단을 재정비해. 힐라이야의 권능을 다룰 줄 아는 놈들로 병력을 다시 꾸리고. 잔챙이들은 다 빼. 군기가 개판이니까.”
“예, 예에!”
아이칼이 턱짓하자, 벌떡 일어난 교단주가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이스마는 도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를 향해 툭 물었다.
“봄에 뭐 급한 일이라도 있냐? 엄청 서두르네.”
“슬슬 돌아갈 거라서.”
“어디로?”
“아르템으로. 4월이 오기 전에.”
쥐 죽은 듯 고요한 설원을 응시하는 아이칼의 면면에는 마침내 제 영역을 되찾은 데 대한 기쁨이나 희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설원을 보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그 위로 전혀 다른 풍경을 그리는 듯, 그의 눈이 깊어진다.
‘봄, 4월.’
카티샤의 생일은 4월 1일이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석 달 반.
아이칼의 은푸른빛 눈에 처음으로 초조함이 어렸다.
‘조금 더 빨리 갈 수 없나?’
3년 반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한 번도.
지긋지긋한 성체화가 완전히 끝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완벽한 성체가 되었음을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교단을 손에 넣기 위해 이렐 반도로 올라왔다. 그러나 아직 그는 아르템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해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제게 닥칠 변화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힐라이야가 예고한 권능 소실의 시점이 바로 446년이다.
권능을 쓰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이칼은 아직 정확히 아직 알지 못했다.
“빌어먹을.”
그러니 또 얼마간의 적응기를 거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신중하게 제 상태를 점검해 볼 생각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안아야 하고, 몇 도의 체온이 가장 적당하며, 오러는 어느 정도까지 뭉뚝하게 누그러뜨려야 하는지.
권능이 소멸하고 나면 그 애가 다쳐도 순식간에 낫게 해 줄 수 없었다. 심지어 성체의 신수가 가진 힘은 유년기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예전처럼 함부로 안고 비비고 입 맞췄다가는 카티샤가 못 버틸 거였다.
‘다시 만나면 일단 손부터 잡아 보고…….’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된다면 어디까지 되는지 하나씩 다시 다 해 볼 생각이다.
그러니 카티샤에게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기억 속의 요정같이 작고 귀여운 소녀를 떠올리자 아이칼의 입매가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그런 그에게 이스마가 지나가는 어조로 말을 던졌다.
“그런데 너, 3월에 대륙 스케일의 검술제가 열리는 거 알고 있냐?”
“알 바 아냐.”
“거기 네 아가씨도 참가할 거라더라.”
“어디라고?”
냉정하게 대꾸하던 아이칼이 급격하게 태도를 바꿨다. 눈이 커진 게,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파르세네. 거기 참가할 거라던데?”
이스마가 저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새 검이 많이 늘었나 보지, 뭐. 그래서 3월 한 달 동안은 본가를 비울 거래. 참고하려면 해라. 괜히 서둘러 갔다가 빈집에서 시간 허비하지 말고.”
“잠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오렌지 양은 3월에 아르템에 없다니까.”
“말고. 카티가, 뭐에 참석해?”
아이칼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검술제?
그 조그맣고 살집 하나 없는 애가?
제 몸에 맞게 경량 마법을 걸지 않으면 진검도 무거워서 못 들던 카티가, 조금이라도 험한 길을 가야 할 때면 당연하다는 듯 두 팔 벌려 안아 달라던 애가, 대체 어디에……?
뭐에 참가를 해?
* * *
막 동이 튼 이른 아침이었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어나, 카티.”
싫어.
나는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베개에 푹 파묻었다. 곧장 서늘한 손이 다가와 내 뺨을 잡고 억지로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살금살금 파고들었다.
“일어나. 지각이야. 지금 안 일어나면 나중에 내 탓 해도 안 들어 줄 거다. ……카티, 눈떠 봐.”
“싫어, 오늘 주말이야…….”
“네 멋대로 주말이야?”
“응…….”
어차피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이불보째로 안아다 욕실에 넣어 버릴 걸 안다. 한껏 칭얼거리며 시원한 품에 얼굴을 묻으려 옆자리를 더듬었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쯤 열린 캐노피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흐릿한 시야에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보였다. 거기 있는 건 내가 예상했던 희고 긴 머리카락의 미소년이 아니었다.
짧은 백색 머리카락, 날카롭고 시원스러운 턱선과 넓은 어깨. 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내는 크고 단단한 손.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햇빛을 가리며 내게로 상체를 기울인 그가 짐짓 위험스럽게 속삭였다.
“일어나. 지금 안 일어나면…….”
깨물어 버린다.
내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나를 덮치듯 위로 올라탄 그가 목과 어깨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뺨으로 훅 와 닿는다고 느낀 바로 다음 순간 귓불을 깨물렸다.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황급히 양옆을 살펴보았지만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얀 베개와 시트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캐노피 사이로 들이친 가느다란 햇살이 텅 빈 침대 위를 가로질렀다.
‘뭐, 뭐, 뭐야……!’
나는 당황해서 손등으로 귀를 마구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목부터 뺨까지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