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귀를 물어뜯기는 꿈이라니. 꼭두새벽부터 무슨 이런 꿈을 꿔?
게다가 상대의 모습도 무척이나 낯설었다.
‘아키, 맞았지……?’
그간 꿈에 아이칼이 나왔던 적은 여러 번이지만, 오늘처럼 낯선 모습은 처음이었다.
비몽사몽간이라 얼굴은 제대로 못 보았다. 하지만 나를 모조리 덮을 듯 드리워지던 그림자와 바람 같은 목소리는 무척이나 생생했다.
생일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요즘 유독 더 생각이 나서 그런가……?
한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문득 배가 알싸하게 아파 왔다. 급격히 엄습하는 불안감에 이불을 젖히고 슬립을 걷어 봤다.
“……하아.”
얇은 옷자락에 비친 핏기를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설마가 역시나다.
‘으, 짜증…….’
나는 다른 의미로 아파 오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 맡에서 설렁줄을 찾아 당겼다. 그리고 캐노피를 활짝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햇살이 쏟아진다.
오늘은 446년 3월의 첫날.
대륙 검술제가 한창인 파르세네로 떠나는 날이다.
* * *
평소보다 조금 부산한 아침이었다.
비몽사몽 일어나 카렌과 마가렛의 손을 빌려 온몸을 뽀득뽀득 씻고,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를 걸친 채 침실로 돌아왔다. 시녀들이 바쁘게 짐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니엘라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얼른 화장대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앉으세요, 아가씨. 머리 만져 드릴게요.”
“으응…….”
“또 꿈꾸셨어요?”
“응, 그냥. 뭐, 평소랑 똑같이.”
“배는 안 아프시고요?”
“그냥 그래…….”
“어떡한담. 파르세네에서는 계속 돌아다니셔야 할 텐데.”
그러게…….
나는 비척비척 니엘라에게 이끌려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려한 테두리로 장식한 거울 속에서 젖은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맹한 눈으로 날 마주 보고 있었다. 이제 ‘애’라는 꼬리표는 영영 떼도 될 만큼 훌쩍 큰 나였다.
아침에 꾼 꿈 때문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살폈다.
열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고작 한 뼘밖에 크지 않아 속을 썩였던 키는 지난 4년 동안 한 뼘 반이나 더 컸다. 이제는 어딜 가도 마냥 작다고만 할 키가 아니다. 확연히 성인 태가 나는 체형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키와 몸이 쑥쑥 자라기 시작한 게 초경을 시작하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유달리 성장이 늦는 바람에 초경도 열다섯 살의 가을에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나를 처음 발견했던 게 니엘라였던가?’
그날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직감했다.
아, 이 축축하고 불쾌한 감각. 싸르르 아파 오는 배와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 저릿저릿한 다리…….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니엘라를 붙들고 죽어 가는 소리로 부탁했다.
“씻어야겠어……. 그리고 새 속옷을 가져다줘, 니니.”
니엘라는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벙긋거리다, 뛰쳐나가 마가렛을 불러왔다. 마가렛은 아르닌 언니를 불러왔고.
그 소식은 곧 아빠와 오빠에게도 전달됐다. 그리고 난 그날 저녁 다이닝 룸에서 거대한 2단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야 했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인 와중에 나만 오만상이었다.
아아,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던 전생에서도 이놈의 생리통 때문에 개고생을 했는데, 왠지 이번 생에도 그럴 것만 같아…….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지. 어쩐지 간밤에 몸이 축축 늘어진다 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랫배를 문지를 즈음, 마가렛이 몸을 따듯하게 해 준다는 차를 가져왔다.
“자, 쭉 들이켜시고요, 아가씨. 기다리시던 소포가 방금 도착했답니다.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어, 정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월경통 같은 건 순식간에 잊혔다.
아이칼이 두어 달에 한 번씩 보내오는 선물이 도착했다.
나는 마가렛이 내민 꾸러미를 풀었다. 끈으로 단단히 묶은 꾸러미 속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가 들어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어 본 뒤 작은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거…….”
상자 안에 소복이 담긴 건 입자가 고운 눈이었다.
녹지 않는 눈이 손가락 사이에서 사르르 부서졌다. 백의 교단이 있는 이렐 반도의 눈이 틀림없다.
‘다시 교단으로 돌아갔나 보네.’
아이칼은 반년에 한 번씩 아르템으로 서신을 보냈다. 일반적인 편지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가 떠난 뒤 내가 처음으로 받은 건 검고 반질반질한 돌멩이 세 개였다. 따끈한 돌을 쥐고 어리둥절한 내게 아버지가 그것의 정확한 정체를 알려 주었다.
“마력을 품은 흑요석이구나. 대륙 서쪽의 리트라한 화산 쪽에서 주로 발견되지. 그놈이 지금 그쪽을 지나고 있나 보다.”
또 어느 날 아이칼은 황금 사막의 모래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 보냈다.
또 다른 날은 썩지 않도록 얼린 풀꽃이었다. 풀잎 끝에 대륙 어느 지방에서만 자란다는 특이한 방울 모양 꽃이 달려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작은 유리병에 해변의 모래와 푸른 바닷물, 해초 몇 가닥을 넣어 보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지금 아이칼이 어디쯤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말주변도 없고 편지란 걸 써 본 적도 없는 그 애가 내게 보낼 수 있는 최고치의 애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
설마 한 번도 안 찾아오겠어, 했는데.
걘 정말 한 번을 안 왔다.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보내오는 소포들로 그도 아직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가끔은 이런 작은 선물들이 아니라 그 애 자체가 필요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몸이 안 좋은 날엔 더더욱.
‘아, 진짜 안 좋아…….’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피로한 낯빛을 감췄다.
비단 월경통 때문이 아니라, 요즘 점점 더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노을색이었던 내 오러는 지난 몇 년간 점점 진해져 거의 붉은빛에 가까워졌다. 가족들이 알아채면 걱정할까 봐 꾸역꾸역 숨긴 지도 꽤 됐다.
이래서 파르세네까지 무사히 갈 수나 있을까?
‘아냐, 가야지. 안 가면 우리 오빠 울어.’
이 세계는 5년에 한 번씩 전 대륙적인 검술 대회가 열린다. 그게 바로 파르세네 검술제다.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대륙 정중앙의 파르세네라는 작은 평화 지대라 파르세네 검술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벌써 300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 있는 대회고, 대륙의 실력자들을 랭킹화하는 공식적인 시합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에는 아빠와 루티어드 님께서 1, 2위를 싹쓸이하고, 5년 전에는 베르너 오빠가 1등을 먹었다.
지난 대회에서 베르너가 랭킹 1위의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땐 아카데미 시험 기간이라 못 갔다. – 그때 오빠는 단단히 토라져서는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
파르세네 검술제는 다른 검술제완 달리 나이 제한이나 참가 횟수 제한이 없어, 예선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몇 번이든 계속해서 랭킹에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오빠는 이제부터는 가주 후계자 업무에 더 치중해야 하니 5년 뒤에는 참가하기가 어려울 터. 사실상 이번이 오빠의 마지막 검술제인 셈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나도 필참이다.
게다가 검술제에는 아스트로카 귀족 대부분이 참석한다. 오르겐 후작은 물론이고, 황제와 황후도 당연히 참석할 것이다.
비단 아스트로카뿐인가? 파르세네 검술제는 전 대륙적인 축제였다. 경기장 귀빈석의 직관 티켓을 따는 것부터가 각국 정상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세계 최정상급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
그 기회를 놓칠 후작이 아니다.
특히, 지난 몇 년간 마공학 무기를 어떻게 하면 타국에 팔아 치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작자라면.
니엘라가 내 머리카락을 열심히 빗으며 오르겐 후작가에서 빼 온 정보를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황실 기사단장이 마공학 무기를 들고 직접 참가 지원서를 냈다더라고요. 그자는 황제뿐 아니라 후작과도 연이 깊죠. 이미 예선을 무패로 통과해서 이목을 끌었어요.”
“그래. 타국의 귀빈들 앞에서 본인이 만든 무기의 위력을 증명해 보여야 하겠지. 오르겐이 제작한 마공학 무기를 가진 자가 파르세네의 최종 우승을 거머쥐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테니까.”
“그리고 검술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무기를 해외로 팔아먹겠죠.”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황실 기사단장은 결국 결승전에서 베르너 오빠와 맞붙게 될 테고,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오빠가 베르너 블라스코고, 그자가 쓰는 무기가 아르닌 언니의 작품인 한은 영원히.
이번 검술제는 오르겐 후작을 파산으로 몰고 가기 위한 시작점이다. 내 계획은 완벽했고, 아버지의 행동력은 두말할 필요 없음이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우리 아가씨, 몸이 이렇게 안 좋으셔서 어떡하지?”
마지막으로 내게 모자를 씌워 준 니엘라가 걱정스럽게 나를 살폈다. 환상의 타이밍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또 이러네.’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을 꼽으라면 하나뿐이었다.
나는 장식장에 반듯하게 놓은 검을 힐끗 곁눈질했다.
마검 귀어스트.
저것이 내뿜는 마기 탓이다.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마기에 면역이 있는 편이지만, 역시 누적된 양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애써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걸 막았다. 니엘라에게 들키면 가족들이 아는 건 금방이다.
사실 이런 거, 어렸을 때처럼 아이칼이 정화해 주면 될 일이긴 한데…….
‘아마 권능을 잃어 가는 상태일 테니까.’
정화까지 바라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요즘의 나는 그 애가 필요했다. 아픈 걸 맘껏 티 내고 칭얼거리며 안길 상대가 절실했다.
‘주인님이 아픈데 얼른 안 돌아오고 뭐 하는 거야. 밤마다 불러도 안 오고…….’
짧으면 3년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했잖아. 이 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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