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한참을 투덜거려도 결국 결론은 언제나처럼 하나로 귀결했다.
“아키 보고 싶다…….”
“그놈, 아니지. 그분이 있었대도 별로 도움은 안 되었을 거예요. 월경 때는 배를 따듯하게 하는 게 좋아요.”
작은 혼잣말을 용케도 들은 니엘라가 득달같이 반론을 펼쳤다.
“이런 한겨울에 그놈이 왜 보고 싶으세요?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푹푹 찌는 여름에나 좀 쓸 만할까.”
“니니, 이제는 대놓고 그놈이라고 하는 거야?”
“새끼가 아닌 게 어디예요.”
그녀는 아이칼의 화제만 나오면 혀에 가시가 돋은 사람처럼 굴곤 했다. 446년이 밝은 올 초부터는 당장 내일 아침 아키가 아르템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아키 너무 싫어하지 마. 내 친구잖아.”
“……친구여야만 해요, 아가씨. 그 이상의 것을 하면 안 돼요.”
그 말을 듣는데 문득 아침에 꾼 꿈이 떠올랐다. 귀 밑의 턱선에 쪽 입 맞추고 귓불을 깨물던 낯선 그를 떠올리자 괜히 입이 말랐다.
“무, 무슨 소리야. 이상한 말 하지 마.”
“이상한 말이라니.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잖아요.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세요? 혹시 아가씨, 제게 뭐 숨기는 게 있으신…….”
“아냐!”
눈치 백단!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비틀어 빨개진 귀를 가렸다.
“머, 먼저 나가 있어. 마지막으로 빠뜨린 거 없나 보고 나갈 테니까.”
“아무래도 수상한데…….”
“저언혀 안 수상한데? 나가나가.”
니엘라를 쫓아내듯 내보내고 문을 탁 닫았다. 거울을 흘끗 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친구 이상의 것이라니. 그게 뭔데. 그런 거 안 해. 난 몰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엄한 생각을 쫓아냈다. 그리고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돌아섰다.
그 짧은 사이를 못 참고, 마검을 감싼 공단 사이에서 시커먼 마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4년 전 영령의 탑이 부서지던 날, 마검의 봉인도 반쯤 풀렸다. 아르템의 영령들이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봉인은 날이 갈수록 힘을 잃었다.
그건 곧 마검 속에 잠든 귀어스트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마기 덩어리가 서서히 마귀의 형태로 변했다. 시뻘건 불길을 품은 두 눈이 강렬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마귀가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등골이 오싹했다. 가끔 저것이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마기 덩어리를 향해 뻗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마기를 휘휘 저어 흐트러뜨린 뒤, 나는 헐거워진 공단의 매듭을 바짝 묶었다. 다시 화장대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파르세네에서 돌아오고 나면 4월이 목전일 것이다.
나는 함 속에 담긴 곱고 차가운 눈을 만지작거리다 화장대 위에 엎드렸다.
나쁜 자식.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정말 3월까지 꽉 채워서 돌아올 셈인가.’
이왕이면 좀 일찍 와 주지.
텔레파시라도 통하기를 바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주인님 아프니까 빨리 돌아와야 해…….”
그러나 나는 4월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바로 이틀 뒤, 파르세네에서였으니까.
* * *
카티샤가 검술제를 관람하기 위해 출발하기 보름 전, 그녀를 찾아온 누군가는 이미 파르세네에 도착해 있었다.
본선 첫 경기를 하루 앞둔 저녁이었다. 경기장 근처의 선술집은 해가 떨어지기도 전부터 만석이었다. 테이블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를 두고 한창 내기 판이 벌어졌다.
“당연히 블라스코지. 베르너 님이 3년 전에 경쟁자들을 압살했던 거 잊었어?”
“하지만 이번엔 에펠 로드리고가 참석하잖아. 아스트로카 황실과 오르겐 후작의 후원을 받는다는 기사단장 말이야. 그 유명한 칸소드를 들고 온다지. 이번에는 시범작이 아니라 완성품이라던데?”
“솔직히 궁금하긴 해. 검술제에 마도 무기를 쓰는 자가 등장하는 건 처음이잖아. 과연 위력이 어떨지, 설마 블라스코도 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에펠 로드리고가 그 무기로 블라스코 공자를 꺾으면…… 이제는 훌륭한 검사보다 훌륭한 무기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오겠군.”
“아아, 말세다. 말세야.”
본선에 턱걸이로 붙은 페테로 왕국 출신의 방랑 기사, 마르코가 시름시름 앓는 척을 했다. 10년간 뼈 빠지게 수련해도 마도 무기 하나를 든 자를 못 이긴다면, 앞으로 전 대륙적으로 검술에 대한 인식이 뒤바뀔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양 주먹을 굳게 쥐었다.
“난 블라스코를 믿어. 그 정통성 있는 재능을.”
그는 실버 두 개를 꺼내 베르너 블라스코의 이름 옆의 깡통에 넣고 이름을 적었다.
같이 고민하던 두어 명이 우르르 그를 따라 돈을 걸었다.
“그런데…… 들었어? 이번에 블라스코 직계 일가가 전부 왔다는 거.”
화제는 어느덧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공녀의 장미는 당연히 블라스코 공자에게로 가겠지?”
“그야 오빠니까. 게다가 공녀가 다른 놈에게 장미를 준다면 블라스코는 그날로 뒤집어질걸.”
여기서 블라스코 공녀라 함은 막내인 카티샤 블라스코를 뜻했다.
둘째인 아르닌 블라스코는 자연스럽게 논외였는데,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면 아랫도리를 얻어맞는다는 끔찍한 사실이 공식처럼 퍼진 덕분이다.
마르코가 한숨처럼 웃으며 맞은편 상대를 향해 말했다.
“막내 공녀님은 엄청 착하고 상냥하다던데. 실물로 한 번만 봤으면 원이 없겠다.”
“그래?”
맞은편에서 처음으로 답이 돌아왔다.
짧게 답하는 목소리에 마르코는 흠칫 놀랐다. 주위가 이렇게나 시끄러운데도 혼자서만 줄곧 침묵을 지키던 이였다.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는 사실보다도 그 목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상대는 마르코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나도 그런데.”
낮고 무심한 음색. 그러나 어딘지 홀리는 구석이 있다.
정체 모를 상대가 걸치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제야 그의 외모가 온전히 드러났다.
마르코는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턱 막히는 경험을 했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하얀 머리칼이 짧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가 대충 머리칼을 손으로 툭툭 털어 냈다. 은발이야 간혹 있다지만 저렇게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은 처음 본다.
이목구비는 또 얼마나 수려한지, 마르코는 상대가 같은 남자라는 것도 잊고 잠깐 얼을 뺐다.
눈동자 가장자리로 갈수록 푸른빛이 도는 은회색 눈동자는 동공이 세로로 미세하게 더 길었다.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신비로웠지만, 눈매가 길고 날카로워 유한 인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는 자였다. 무감각한 눈빛만 보면 세상 이치에 통달한 노인네 같은데 매끈한 뺨과 훌쩍 큰 키, 후드 아래로도 단단해 보이는 체격은 성년을 지난 훤칠한 청년이다.
그 정체 모를 맞은편 상대가 마르코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계속해 봐. 공녀에 관한 이야기.”
“아아, 응.”
마르코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이번에 블라스코 공자도 참가하잖아. 그래서 막내 공녀님도 경기를 보러 오나 봐. 3년 전에는 안 왔는데.”
“아……. 참석한다는 게 그 뜻이었나?”
백색의 청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러나 어쩐지 확연히 안도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기색을 엉뚱하게 받아들인 마르코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쪽도 들었지? 역시 소문이 빠르다니까. 어쨌든 그래서 우리 또래 남정네들은 다들 벼르고 있다 이거야.”
“왜 벼르지?”
마르코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소리 죽여 대답했다.
“소문으로는…… 막내 공녀가 엄청난 미인이래.”
“아하?”
상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일자로 다물고 있던 입매를 슬쩍 양쪽으로 당겼다. 그가 보인 최초의 표정 변화였다.
마르코는 어쩐지 신이 나서 덧붙였다.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했다던 동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랬다더군.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게 생겼다고.”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로는 줄곧 아르템에서 두문불출했대. 블라스코 공작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라지. 막내만 보면 그렇게 예뻐 죽는다더라. 그렇게 어화둥둥 사랑받고 큰 막내가 올해 성인이 됐단 말이야.”
“아직 3월인데.”
“물론 성년식은 4월에 치른다지만, 거의 목전이니 뭐. 무엇보다 그 막내 공녀는…… 아직 약혼자가 없단 말이지.”
약혼자라는 단어가 마르코의 입에서 튀어 나간 순간, 이번에는 청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순 파랗게 빛나는 안광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눈치 없는 마르코가 신나게 떠들었다.
“아스트로카 황실엔 결혼 적령기인 황녀가 없잖아.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번에 참석하는 아스트로카 귀족들 중 참가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아가씨는 공녀님 한 분뿐이란 거야. 공녀님의 장미를 받으려고 기웃거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걸.”
본선에 진출하는 참가자들은 총 100명이다. 미혼의 아가씨들이 참가자들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는 것은 파르세네 검술제의 또 다른 묘미였다.
물론 미혼의 영식들이 여성 참가자에게 장미를 건네는 일도 드물지 않다. 어느 쪽이건 젊은이들이 열광할 만한 이벤트였다.
“게다가 공자도 그렇고 둘째 공녀도 약혼자가 없었으니까. 블라스코 가문 특성은 연애결혼인 게 틀림없어.”
약혼자, 연애, 결혼.
상대는 마르코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는 기색이었다.
마르코가 검지를 척 치켜세웠다.
“바로 그래서 다들 관심 폭발인 거야. 공녀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된다는 말이잖아!”
“…….”
“블라스코의 사위라니. 그거야말로 수십만 검사 지망생들의 꿈 아니겠냐?”
줄곧 옆에서 콧소리로 맞장구만 치던 마르코의 동료가 우울한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공녀님 같은 분이 우리가 눈에 차겠냐? 당장 오빠가 랭킹 1위인데, 웬만한 실력으로는 비비지도 못할걸.”
“그러니까 더 기회라고! 공녀님이 보는 눈이 얼마나 높으시겠냐? 그러니 검술 실력 같은 건 사실 공녀님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단 거지. 매번 천상계의 실력자들만 보다가 인간적인 면모의 방랑 검객에게 한번 빠지면…….”
가열차게 희망 회로를 돌리는 마르코의 뺨이 발그레했다.
잭슨이 그를 비웃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1등이 가족이면 당연히 2등에게 관심이 가겠지, 랭킹 99위에게 눈길이 가겠어?”
“아, 촌철살인. 아프다, 잭. 안 그래도 뒤에서 2등이라 서러워 죽겠는데.”
마르코는 킬킬거리며 동료를 힐난하다 말고 문득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어째…….
‘좀,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봄에는 있을 리 없는 으슬으슬한 한기가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맞은편의 청년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