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그의 주위로 냉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 이런 존재감은 평범하진 않은데.
마르코는 테이블 맞은편의 컵을 흘끗 봤다. 컵 안에 든 물이 꽝꽝 얼어 있었다.
‘아니, 저게 왜 갑자기 얼어? 무섭게…….’
마르코는 시선을 슬그머니 위로 들었다. 그러곤 저를 지그시 쏘아보는 은푸른빛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기분이.”
백색의 청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썩 좋지는 않네.”
왜일까?
그가 눈짓으로 잭슨과 마르코에게 물었다.
둘은 맹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당연히 그들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눈앞의 신수가, 제가 모르는 공녀의 모습들이 너무도 많아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바닥까지 처박혔다는 것은 정말이지, 꿈에도.
그러나 질문을 던진 장본인도 정말 답을 구하려 한 건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칼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지금까지의 길고 지루한 대화가 시사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그의 카티샤는 인기가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이곳 파르세네에는 카티샤의 호감을 사려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러잖아도 낮은 온도의 눈동자가 한층 더 냉담해졌다.
‘그럼 일단 그것들부터 치워야겠고.’
그리고 하나 더.
이 검술제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목적들이 여럿 얽혀 있다. 누가 최종 우승을 거머쥐느냐에 따라 대륙 최강대국인 아스트로카 제국의 세력 판도가 뒤바뀐다.
블라스코냐, 황실의 기사단장이냐.
혹은 제3의 인물이냐.
마침 아이칼에게는 명분이 필요했다. 백의 교단이 아스트로카 정세에 개입할 명분.
인세에 관심이 없기로 유명한 신수가 블라스코의 편에 서는 이유. 그리고 백의 교단이 인세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단도 필요했다.
‘그리고 카티는 아스트로카 황실을 싫어하지.’
그걸로 약 3초가량의 고민이 끝났다.
아이칼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뜨려는 마르코를 불러 세웠다.
“너.”
“왜, 왜, 왜 왜……?”
가엾은 마르코는 달달 떨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발가벗고 쫓겨난 것처럼 냉혹한 추위가 살갗을 에었다.
“마르코?”
“어, 맞는데, 왜……?”
그를 빤히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이칼이 이윽고 입꼬리를 올렸다.
검지로 까딱, 마르코의 목에 걸린 검술제 참가 패를 가리키며 나른한 어조로 묻는다.
“랭킹, 올려 줄까?”
“뭐……?”
“바닥에서 천장까지. 한 번에.”
마르코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 * *
파르세네의 봄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석회석과 대리석으로 지은 경기장의 거대한 파사드가 따끈한 정오의 햇살에 기품 있게 빛났다.
파르세네 검술제의 무대는 고대의 유적인 원형 극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4개의 아치로 된 출입구로 온갖 내로라하는 왕족과 귀족들의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오늘부터 사흘간 이어지는 결선 토너먼트는 장장 보름간 이어진 검술제의 피날레였다.
예선과 본선을 지나 최종 토너먼트까지 올라온 이들은 총 10명. 앞으로 사흘간 그 최후의 10인 간의 랭킹이 결정된다.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전 대륙에서 앞다투어 이 파르세네로 향했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끄는 이들은 쟁쟁한 강대국의 황족들이 아니다.
누군가 옆 사람의 허리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왔다, 푸른 나비와 칼날.”
블라스코의 문장이 대문짝만 하게 찍힌 마차가 경기장 앞에 멈추었다. 그들이 나타난 순간 좌중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아스트로카는 역대 파르세네 우승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였다. 그리고 아스트로카 출신 우승자들 열 명 중 아홉 명은 블라스코의 직계다.
역대 파르세네 우승자 전체를 놓고 보아도 블라스코 직속 문하생 출신이 반절 가까이 되니, 이 검술제에서 블라스코의 위상이 어떠한지는 두말할 필요 없었다.
자타공인 명불허전의 검술 명가.
블라스코의 수장은 검을 배우는 모든 자의 스승이자 롤 모델이라는 말은 괜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문의 ‘그녀’도 검술제를 보러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올해의 파르세네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가씨를 꼽으라 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올봄에 성인이 된다는 블라스코의 막내 공녀.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블라스코 공작이 먼저 내리리라는 좌중의 예상과는 달리,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날씬한 아가씨가 가장 먼저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카티, 위험해!”
공녀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공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고대 신들의 조각상과 양각 장식들을 화려하게 조각한 압도적인 규모의 파사드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파사드에서 뚝 떨어진 햇살이 굽슬굽슬 늘어뜨린 머리칼과 하늘하늘한 몸, 활동성 좋으면서도 지나치게 간소해 보이지 않는 개나리색 드레스를 환하게 물들였다.
맑은 연녹색 눈동자를 품은 눈매의 곡선이 섬세하게 내리깔렸다 다시 뜨이기를 반복한다.
산호색 입술이 금방이라도 탄성을 지를 듯 벌어졌다.
“엄청나다…….”
그런 그녀의 뒤로 블라스코 직계들이 내리고 있었다.
곧장 공녀에게로 다가온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잔소리를 했다. 여전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기적인 외형을 자랑하는 인사다.
“뭐가 그렇게 급해, 카티. 마차가 멈추지 않으면 내리지 말라고 아버지가 몇 번이나……”
“죄송해요. 아빠랑 오빠가 여기서 몇 번씩이나 우승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공녀가 애교스럽게 공작의 팔에 달라붙었다.
눈을 제법 엄격하게 치켜뜬 게 무색하게도 단숨에 녹아 버린 공작이 입매를 허물어뜨렸다.
“아직 놀라기는 이른데. 파르세네 경기장은 내부가 진짜라서.”
“지금 들어가 봐도 돼요?”
“그래. 구경해 보자.”
“와아!”
종소리처럼 맑은 탄성을 지른 공녀가 공작의 팔을 끌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는 조막만 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청년이 수십이었으나, 뒤따르는 블라스코 공자와 공녀의 서슬에 한풀 기가 꺾였다.
베르너와 아르닌은 눈을 희번덕이며 주위를 휘 둘러봤다.
어딜 봐? 눈 깔아. 안 깔아?
그 무언의 몇 마디가 부푼 설렘을 안고 기웃거리는 청년들의 고막에 푹푹 꽂혔다.
결국 경기장 앞을 서성거리던 참가자들은 감히 공녀에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 * *
“언니,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아요?”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한 첫마디였다.
내 팔짱을 끼고 자리로 앞서 가던 아르닌 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난 언니에게 바짝 붙어 서며 비밀스럽게 속닥거렸다.
“아무래도 다들 언니를 훔쳐보는 것 같아. 눈빛들이 수상해.”
“글쎄? 언니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러면 혹시…… 아빠를 보는 건가?”
“그런가아?”
아르닌 언니가 나를 따라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였다.
나는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블라스코 수장이니까. 파르세네에서는 그 어떤 강대국보다 블라스코의 명성이 더 높다며?’
그러나 내 짐작이 틀렸다는 건 금세 밝혀졌다. 쭈뼛쭈뼛 주위를 맴돌던 이들이 하나둘씩 이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녀님, 제 주인께서 공녀님께 이것을 가져다드리라고…….”
“주인님께서 막내 공녀님께 이 꽃다발을…….”
“저희 도련님께서 이것을 꼭 받아 주셨으면 한다고…….”
다들 내게 장미꽃을 못 줘서 안달이었다. 순식간에 꽃에 둘러싸인 내가 어쩔 줄 모르고 가족들을 쳐다보자, 아빠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풍뎅이 같은 것들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받아도 돼요?”
“카티가 받고 싶으면 받아야지. 대신 네 건 아무에게도 주지 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아빠는 당장 저 장미 모가지를 뚝뚝 따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음, 안 받을래요.”
“아니야. 괜찮아. 내 딸이 검술제에서 꽃 한 송이 못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그런 것치곤 눈빛이…….
가족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는 사이, 나는 떨떠름하게 시종들이 내미는 꽃을 받았다. 경기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쌓인 장미꽃은 금세 스무 송이를 넘겼다.
“저어, 이런 장미는 보통 참가자들에게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말 제게 주시는 게 맞나요?”
“그럼요, 공녀님.”
“아르닌 언니가 아니고요? 하지만 언니는 이번에 검술제에 참가하지 않는데…….”
“아뇨! 막내 공녀님께 드리는 게 맞습니다.”
“아, 네에…….”
이 이상은 거절할까 하다가 그냥 받았다. 주는 선물은 거절하지 말라는 니엘라의 가르침이 떠오른 탓이다.
그렇게 한 송이 두 송이 꽃을 받다 보니 결국 한 아름이 되었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응원의 표시로 건네는 이 장미꽃을 내게 건넨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그 꽃들을 다발째로 베르너에게 넘겼다.
“오빠, 카티가 주는 선물.”
“나 주는 거야……?”
“응! 3년 전에 못 줬던 것까지 포함해서요.”
“카티이…….”
내게 꽃다발을 받은 베르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나는 오빠가 주책맞게 날 끌어안고 울기 전에 얼른 옆구리를 꼬집어 줬다.
여기 너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체통을 지키라고!
베르너가 장미 꽃잎으로 눈물을 닦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고마워, 우리 막내. 오빠 우승 상금이랑 상품 타면 다 카티 줄게.”
“저번에도 다 나 줬는걸. 괜찮아요.”
“아니야. 우리 카티 돈 좋아하잖아.”
“…….”
썩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이번 상금은 지난번의 두 배더라. 참가국이 많아져서 그런가?”
파르세네 검술제의 우승 상금을 떠올리자 본능적으로 입술이 오므려졌다.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타다다닥 때린 뒤, 눈알을 굴리며 못 이기는 척 말을 바꿨다.
“주…… 준다면 거절하진 않지! 굳이 주겠다면! 오빠가 돈이 썩어 나서 굳이 나한테 상금을 버리고 싶다면……!”
“응, 카티 다 가져.”
“……진짜……? 그치만, 상금 5000골드가 넘는데.”
“오빠는 이거 받았으니까 됐어.”
베르너가 꽃다발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훤칠한 미남과 꽃의 조화란 언제 보아도 흐뭇한 것이지만, 속세에 찌든 나는 다른 의미로 무척 심란해졌다.
저거 다 합쳐도 1골드도 안 할 텐데, 저렇게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어쩌려고 그러지, 우리 가주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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