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
16화
“……!”
소스라치게 놀란 아르닌이 고개를 내 쪽으로 홱 꺾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나를 봐주는 건 줄로만 알았던 나 역시 깜짝 놀랐다.
“넌 뭐야?”
아르닌이 앙칼지게 나를 쏘아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기세는 살기등등했지만, 아르닌의 눈 밑에는 투명한 물이 고여 있었다. 저게 절대 슬픈 표정은 아닌 것 같으니 분기에 찬 눈물이 분명했다.
반면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뻐.’
아르닌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미인이었다.
약간 헝클어진 포니테일과 뺨에 난 쓸린 상처는 그녀의 미모를 조금도 훼손하지 못했다. 아래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무섭게 내 목을 조여 오는 살기가 정신을 번쩍 깨웠다.
아차차. 미인계에 홀리면 안 된다.
“이거 드릴게요. 선물이에요.”
나는 그녀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직전에 얼른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리본 틈새로 약초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은 아르닌의 콧잔등이 움찔했다.
나는 얼른 내 첫 번째 선물의 효력을 설명했다.
“피부 깊숙한 곳까지 찬기를 스며들게 해서 부기를 가라앉혀 주고 통증을 줄여 주는 약초예요. 쿨 민트와 사이칼라닌 꽃즙, 새벽 연꽃의 뿌리를 말린 가루를 배합한 건데, 언니 나눠 드릴게요.”
헤르젠 할아버지의 집 3층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파묻혀 있는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약초를 정리한 찬장도 있었는데, 내가 흥미를 보이자 할아버지가 직접 몇 가지 약초 배합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건 그중 하나였다. 물론 간단한 배합이라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겠지만, 당장의 통증을 줄여 주는 데는 효과적일 것이다.
나는 결백하다는 표시로 양팔을 번쩍 들어 보였다.
“독 같은 거 안 들었어요. 안 믿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급할 때 진통제처럼 쓰기엔 괜찮을 거예요.”
아르닌은 대답 없이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녀의 하늘색 눈은 푸르른 창공보다는 좀 더 차가운, 서늘한 얼음장을 연상시켰다. 공작과 베르너보다 훨씬 더 온도가 낮았다.
“……어제 나무 위에서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고 있었던 게 너니? 마가렛 윈스티드랑 같이 나무 위에서 말이야.”
아르닌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차분했다. 아까처럼 흥분하는 일은 평소에는 거의 없는 듯했다.
‘역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구나.’
하긴 마가렛이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이 두 남매가 기척을 읽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르닌이 이채 섞인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시녀인 줄 알았는데, 꼬마 애네. 못 보던 앤데.”
“아, 저는……”
“최근에 저택에 나타난 뉴 페이스는 딱 한 명이지.”
내 자기소개는 가로막혔다. 아르닌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섰다. 열다섯 살치고 아르닌은 키가 훌쩍 컸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눈높이에 나는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네가 할아버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됐다는 그 상속녀니?”
이걸로 확실해졌다. 아르닌은 아무래도 오빠에게 가야 할 눈치를 대신 다 챙긴 게 틀림없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카티샤 아인슬리라고 합니다.”
자, 과연 아르닌은 내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르닌은 잠시 나를 파악하려는 듯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저절로 입안이 말랐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흐르기를 몇 초, 아르닌이 입술을 움직였다.
“제법이네. 눈치도 있고.”
아르닌이 내가 준 상자의 리본을 휙 풀었다. 안에서는 청록색 약초즙을 담은 작은 유리 용기가 나왔다.
나는 유리병을 쥔 아르닌이 웃옷을 휙 벗는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선명한 복근과 멋지게 갈라진 삼두근은 둘째 치고, 대체 베르너에게 뭐로 얻어맞은 건지……. 촘촘하게 근육이 잡힌 그녀의 어깨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아르닌이 오른쪽 어깨에 약초즙을 들이부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환부가 빠르게 가라앉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아르닌이 어깨를 두어 번 움직여 보곤 툭 내뱉었다.
“괜찮네. 고마워.”
생각지도 못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설마 이렇게 순순히 인사를 해 줄 줄은 몰라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
“어,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서랍 쪽으로 돌아간 아르닌이 붕대를 꺼내 어깨를 단단히 잡아맸다. 이로 매듭 끝을 물고 꽉 조이는 모습에서는 야성미마저 느껴졌다.
탑 위로 드러난 어깨와 팔뚝에 군데군데 새겨진 흉터들, 그리고 양손에 잔뜩 박인 굳은살들은 치열한 노력의 증거였다.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기사님이다, 기사님…….”
“뭐?”
“언니 너무 멋지다…….”
블라스코 직계 중 유일한 여자인데도 아르닌을 온실 속 화초에 빗대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그녀는 정말이지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확실히 아버지나 오빠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르닌은 내 존재에 큰 적개심을 표출하지 않는 듯했다.
왜지, 왤까?
난 궁금한 걸 잘 참지 못했다.
나는 아르닌이 매듭을 한 번 더 묶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운을 떼 보았다.
“공녀님은 제가 아니꼽지 않으세요?”
아르닌이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내게 시선을 던졌다.
“내가 쥐콩만 한 꼬마를 아니꼬워해서 뭐 해?”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나를 모욕했다.
쥐콩이라니……. 자기들보다 작은 사람을 모독하는 건 아무래도 블라스코 가풍인 게 확실하다.
“뭐, 베르너는 길길이 날뛸 것 같긴 하더라만. 귀어스트를 뺏길 위기라니. 그놈이 널 아니꼬워하던?”
“저를 무척 싫어하시던데요…….”
“베르너가 원래 밴댕이 소갈딱지야. 속이 좁지.”
어딜 봐도 오빠를 향한 존경심은 느껴지지 않는 언행이었다.
아르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기야, 마검까지 넘어갔다는 건 좀 의외긴 하지만. 내 알 바 아니라서.”
“……그게 끝이에요?”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아르닌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럼 무슨 반응을 바라지?”
“어…… 공작님이랑 공자님은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하셔서……. 상속 포기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요…….”
“그야 아버지랑 오빠에겐 심각한 문제긴 하겠지. 블라스코의 위신이 달린 문제니까.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잖아? 귀어스트가 내 게 될 것도 아니고.”
그제야 나는 왜 아르닌이 심드렁한지 이해했다.
어차피 그녀는 마검 귀어스트의 상속자 순위에서 공작과 공자 다음 순서로 밀려나 있었다. 어차피 제 손에 들어올 수도 없는 물건이니 미련도 없는 것이다.
“누가 귀어스트의 주인이 되건 난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 누군가가 과연 마검을 쥘 자격이 되는가야.”
아르닌이 다시 재킷을 걸치며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천부적인 실력자인가? 베르너만큼 무식한 훈련광인가? 나만큼 열정적인가? 너는 그 세 조건을 모두 능가하니?”
“아니요. 미달이죠.”
난 당당하다. 검이 내 재능이 아닌걸.
그러나 아르닌은 냉정하게 현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너는 할아버님께 선택받았지. 그 이야긴 너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셨다는 거고. 그건 네가 앞으로 증명해야 할 거야.”
내게로 쑥 몸을 숙인 아르닌이 별안간 내 팔뚝을 잡았다. 단단한 손아귀에 붙잡힌 내 팔은 당장이라도 똑 부러질 속 빈 죽순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르닌은 전혀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뭐, 아주 재능이 없진 않은 듯하니 죽기 살기로 노력한다면 베르너 발뒤꿈치까진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는 그런 걸 증명하면서 크고 싶지 않은걸요…….”
난 돈을 벌면서 살고 싶지 몸을 축내며 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 종이 인형 같은 몸뚱어리에 검술 재능이 대체 어디 있다고?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아르닌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도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봐. 할아버님이 네게 어떤 힌트라도 주신 적 없는지 말이야. 그분의 진짜 뜻이야 지난 10년간 함께 산 네가 더 잘 알겠지.”
아르닌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그녀가 바로 코앞에서 나와 눈을 맞췄다.
“분명히 뭔가를 남기셨을 거야. 말로든, 글로든, 어떤 물건으로든.”
가까이서 보니 아르닌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뭔가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종전과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듯했다.
이 기시감……. 어쩐지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은 것 같은데…….
“지금 한 얘긴 말이야, 비단 검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야, 아가야.”
아르닌이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떴을 때,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엔 형형한 안광이 깃들어 있었다. 놀라우리만큼 공작과 공자의 눈빛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약간 돌아 있다는 뜻이다.
아, 이런. 급발진의 전조다.
“현금 백만 골드에, 리덴 영지에 부수입들 싸그리, 그리고 고대 유물 컬렉션까지 전부 네 거라고? 그게 말이 돼?”
“어…….”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할아버님 금고에는 말이야, 내가 전 대륙을 다 뒤져도 손에 넣지 못했던 귀한 재료들이 잔뜩 파묻혀 있을 거란 말이지. 마력 강화석이라든가, 드워프의 건틀렛이라든가, 기타 등등 부옵션들을 잔뜩 붙일 수 있는 강화 재료들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어…… 아마도…….”
“언젠가는 아버지든 베르너든 내게든 물려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네가 그걸 홀라당 먹어 버려? 앙?”
“음…….”
“귀어스트로 고기를 썰든 사람을 썰든 수프를 끓여 먹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유산만은 절대 내 거야. 특히 그 금고, 할아버님 금고! 네겐 절대 안 뺏길 거야, 알겠어? 아스트로카의 금고는 이 언니 거라고!”
사실 나는 아르닌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너무 빠른 데다 또다시 팔을 콕콕 찌르는 살기에 몸이 가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최종 정정한다. 아르닌도 역시 다혈질과 급발진의 상징 블라스코가 맞았다.
나는 아르닌이 숨을 쉬기 위해 말을 잠깐 멈춘 틈을 타 냅다 외쳤다.
“그럼 공녀님, 저랑 딜 안 하실래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