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 * *
관객들은 물론이고 우리 블라스코까지도 경악한 준결승전이 끝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에펠 로드리고를 묵사발 낸 정체 모를 검사.
오늘은 그자와 베르너 오빠의 결승전이 치러진다. 파르세네 검술제의 클라이맥스였다.
어제 마가렛이 내게 준결승 경기 장면을 담은 영상석을 가져왔다.
나는 밤새 그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영상 속 마르코 에반스라는 이름의 검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휘감고 있었다. 후드 끈을 꽉 조여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로브 끝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단단한 징이 박힌 가죽 부츠와 안쪽에 입은 하얀 훈련복이 슬쩍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키는 아스트로카에서도 장신으로 꼽히는 베르너만큼이나 컸고,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로브의 모양으로 보아 체격도 오빠와 비슷한 것 같았다.
경기 자체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에펠 로드리고가 4클래스짜리 화염 마법과 방어 결계, 오러 정제 기능이 탑재된 검을 다루는 솜씨는 분명 봐 줄 만했지만, 정작 상대에게 먹히는 공격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마르코 에반스는 마치 상대의 수를 미리 읽는 것처럼 움직였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피하고, 대담하고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상대를 코너에 몰아붙였다.
비록 검술에 재능은 없어도 검가의 막내로서, 나도 이제 검술 대련을 대충은 읽을 줄 안다. 마르코 에반스의 검법은 다듬어진 것이 아니었다.
‘검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는 게 분명해.’
심지어 쓰는 검조차 어디 시장 바닥에서나 굴러다닐 법한 싸구려였다. 그럼에도 불필요한 동작이 없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변칙적으로 방향을 꺾어 급소를 노리는 모습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방금 보았던 경기의 일부를 다시 반복해 재생했다. 검은 로브의 남자가 에펠 로드리고의 검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튕겨 내고, 손아귀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매가 갈고리처럼 휜 발톱으로 쥐를 움켜잡듯이. 집채만 한 들짐승이 어린 초식 동물을 사냥하듯이.
에펠 로드리고는 제대로 반격할 틈조차 없이 그에게 잡아먹혔다.
그래, 그건 잡아먹힌 거다. 인간과 인간이 검을 겨룬 게 아니라, 짐승이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든 것이었다.
불쑥,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는 짐승이잖아요.”
왜 하필 이때 예전에 니엘라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지금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영상 속 그자가 사내의 목을 쥐고 아래로 찍어 눌렀다. 쿠웅 하는 둔탁한 굉음과 함께 에펠 로드리고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헉……!》
다시 봐도 압도적이었다.
에펠 로드리고가 쓰는 검은 아르닌 언니가 섬세하게 조작해 놓은 마공학 무기였다. 일정량 이상의 오러를 증폭시켜 공격력을 끌어올리고 나면, 그 뒤로는 오러의 흐름이 완전히 역행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승패가 결정되다니.
근육질의 기사를 간단히 때려눕힌 검은 로브의 남자가 오물을 털듯 손을 툭툭 털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생히 그려졌다. 심상한 무표정이겠지.
영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이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후드의 그늘에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틀림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집착적으로 샅샅이 살피는 듯하다가, 조금 놀란 듯 자리에 못 박혀 서더니, 그러고도 또 한참 동안.
뚫어지게…….
나는 또다시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설마…….’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저 심증뿐이었다. 본능적인 이끌림에 가까웠다.
‘설마.’
아이칼이 나를 떠난 지 4년이 지났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어린애에 가까웠던 소녀에서 성인이 되기에는 충분했고,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신수가 성체화를 거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기엔 차고 넘쳤다.
내가 자란 것처럼 그 애도 자랐을 테고, 어쩌면 몰라보게 변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변한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 아직까지 확신이 없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진짜 그라면 왜 바로 내 앞에 안 나타나는데?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쑥 억울해졌다.
왜 아는 척 안 하는데!
울분이 치솟아 주먹을 까득 움켜쥐었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정작 넌 바로 이 파르세네에 있으면서 날 안 찾아? 그게 말이 돼?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반드시 확인하고 말리라.
꽉 움켜쥔 손바닥에 옅게 땀이 배었다.
곧 시합은 시작되고, 파르세네의 우승자가 가려진다. 그리고 상대는 우리 오빠다.
이 시대에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로 꼽히는 베르너를 상대로 에펠 로드리고와의 시합처럼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을 터.
이미 조금 전에 오빠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왔다.
“벗겨요, 오빠.”
“뭐라고, 카티?”
“벗기라고요. 마리노인지 마리코인지, 그 우습지도 않은 이름을 쓰는 애 말이에요.”
“……우리 카티는 오빠를 변태로 만들려는 거야?”
“무슨 소리예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경기가 시작하면 그 시커먼 로브부터 벗겨 보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아니면 오러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끝의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좋겠어요. 인정사정없이!”
경기에 임하는 건 베르너인데 긴장한 건 나였다. 이상하리만큼 심장이 쿵쿵 고동쳤다.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경기장 양쪽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참가자가 오늘의 무대 위로 올라왔다.
쌍안경까지 챙겨 온 아르닌 언니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인물이 좋긴 좋네, 저 둔탱이.”
검은 웃옷과 발목에서 꽉 조인 훈련 바지, 검집을 꽂아 넣은 허리 벨트. 일반 기사들과 다를 바 없이 간소한 차림새인데도 빼어난 얼굴의 힘인지 오빠는 빛이 났다.
상체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몸에 달라붙게끔 만든 웃옷 위로 근육의 골이 선명하다. 내 앞뒤로 앉은 여자들이 뒷목을 짚고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눈들이 죄다 하트야.
반면 맞은편에서 경기장으로 올라온 마르코 에반스는 오늘도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저래서 앞은 볼 수 있나 싶을 만큼 후드를 푹 내려 썼다.
당장 저 답답한 걸 걷어 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온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정말 네가 맞는지, 아니면 그냥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엉뚱한 착각을 하는 건지.’
다시 한번 뿔나팔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렸다. 파르세네 검술제의 클라이맥스, 결승전이 막을 올렸다.
* * *
눈이 따라갈 수가 없는 속도였다.
경기가 시작하고 지금까지 10여 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마르코 에반스를 관찰하기는커녕 경기의 흐름을 쫓아가기만도 급급했다.
그들이 합을 주고받는 과정을 채 눈에 다 담지도 못했다. 검의 궤적이 잔상처럼 남아 시야를 어지럽힌다.
베르너가 밀리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오빠가 대단히 우세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우열을 판가름하기 힘들다.
굳이 그 이유를 따지자면, 그들이 서로에게 달려드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검은 로브의 남자는 사실 검 같은 건 없어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검은 단지 공격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 검술 실력을 겨룬다는 검술제의 취지에는 전혀 맞지 않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제 경기가 기록된 영상구와 똑같은 경기력이다.
베르너는 차분히 상대의 변칙적인 공격을 막으며 빈틈을 유도하고 있었다.
‘오러, 오러…….’
나는 점점 더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갔다. 오러만 쓰면 알 수 있다.
그의 오러는 인간과는 다르니까.
틈을 살피던 베르너가 전광석화처럼 대각선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곧장 급소로 이어지는 빈틈이었고, 검으로 막을 수 없는 사각이라 즉각적인 방어가 불가능했다. 그대로 경기의 승패가 갈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악.
허공에 하얀 오러가 눈꽃처럼 피어났다.
경기장 바닥을 뚫고 치솟은 얼음 줄기가 막 목덜미를 파고드는 베르너의 검날을 낚아채듯 휘감았다.
거의 동시에 베르너 역시 검에 오러를 실었다.
“……!”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폭풍처럼 불어닥친 베르너의 새파란 검기가 공기를 마구 진동시켰다.
가면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상대의 후드가 목 뒤로 흘러내렸다.
어지럽게 춤추는 검기의 향연 속에서 짧은 백색 머리칼이 아찔하게 흩날렸다.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그 깨끗한 흰빛을 보자마자 온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그가 내 쪽을 힐끗 일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은푸른빛 눈동자가 웃음기를 띠고 가늘어진 순간, 또다시 하얀 오러가 폭발하듯 경기장을 수놓았다.
베르너의 푸른 검기가 그대로 잡아먹혔다.
* * *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참가자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장내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인간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을 법한 존재감이었다.
그는 도저히 같은 종족으로 보기 힘들 만큼 이질적인 기운을 풍겼다. 비단 외형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의 오러는 저렇게 허공에서 폭발하는 듯한 궤적을 그리지 않는다. 베르너의 눈매가 탐탁지 않은 빛을 품고 가늘어졌다.
티 없는 백색. 눈과 얼음의 속성. 운무처럼 하얀 오러. 종합하면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진 않다.
여전히 검을 맞댄 채, 베르너는 눈앞의 신수에게 툭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꼬맹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