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교차한 두 개의 검날이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졌다.
짧은 힘겨루기 끝에 두 인영이 동시에 서로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베르너는 못마땅한 눈으로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막내 여동생이 4년 전까지 옆에 끼고 다녔던 신수의 존재를, 베르너 역시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놈이 끝까지 제 인간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사라지는 바람에 놈의 생김새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기랄. 껍데기로는 흠을 못 잡겠는데.’
저 반반한 껍데기로 막냇동생을 홀렸을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무려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 애기 때부터!
도둑놈의 새끼!
베르너가 살기등등한 검기를 내뿜으며 빈정댔다.
“이클라스족의 하프께서 인간들의 축제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관심은 없어.”
단조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기가 찰 따름이었다.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보아하니 정식으로 참가 자격을 얻은 것도 아닌 모양인데, ‘마르코’.”
베르너는 일부러 아이칼이 사용한 가명에 힘을 줬다.
검을 휘둘러 검날에 붙은 얼음 조각을 털어 내던 아이칼이 입매를 끌어당겼다.
“나는 관심이 없지만, 공작이 원했지.”
“아버지가?”
“그자는 내가 인세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를 원했거든. 그러면 카티샤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물론 루테는 그런 관대한 조건을 건 적이 없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베르너가 기가 막혀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아이칼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완전히 풀어 내렸다. 로브는 그의 손을 떠난 즉시 미세한 눈 입자로 변해 바람에 훅 날아갔다.
그의 허리춤에 꽂힌 하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험한 기운을 훌훌 날리는 성스러운 자태의 검. 드디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이 속속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대부분은 각국의 왕족들이 모인 3층석이었다.
“신수……. 이클라스족의 신수입니다. 힐라이야의 성검을 수호한다는, 백의 교단의 파수꾼!”
백의 교단은 지금은 이 세계를 떠났다고 알려진 고대 신들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은 유적이기도 했다.
여신을 모시는 신도들은 신의 권능을 일부 다룰 줄 알며, 교단의 파수꾼인 신수는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갑작스레 나타난 신수에 좌중에 긴장감이 퍼졌다. 그와 대치한 베르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셈이지?’
아이칼은 딱히 새로 검을 뽑아 들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됐나.”
새 검을 쥐는 대신, 아이칼은 제 손에 든 낡고 조악한 검을 발치에 휙 내던졌다.
베르너는 어안이 벙벙한 채 제 앞까지 몇 번이나 굴러온 검을 내려다봤다.
검술 시합에서 검을 버리는 행위가 뜻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다.
기권.
‘설마?’
검술제의 심판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르코 에반스…… 아니, 아니지. 그, 혹 기권하겠다는 의미인지……?”
아이칼이 대답 대신 검자루가 베르너를 향하도록 검을 툭 찼다. 상대에게 검자루를 맡긴다는 뜻, 기권패의 선언이다.
베르너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냐?”
“나를 이길 자신이 있으면 계속해도 상관없지만, 무의미한 걸 굳이?”
“왜지?”
“파르세네 검술제에는 인외존재의 참가가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그러니 참가 자체가 무효라는 소리였다.
그제야 베르너도 그런 규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래, 그렇긴 한데…… 그러면 애초에 왜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인 거야? 검술제에 참석한 목적이 뭔데?”
“블라스코의 후계자와 겨뤄 보고 싶어서.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걸로 충분해.”
미리 준비해 온 대사를 읊듯 딱딱하고 고저 없는 어투였다. 베르너가 무척이나 찜찜한 기색으로 인상을 구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솔직히 말해. 너 내 동생 보러 온 거지?”
“물론 9할은 그 이유지만.”
“야, 어림도 없어. 다시 해! 내가 기필코 네놈 이겨먹고 말…….”
“너는 여전히 눈치가 없군.”
“뭐?”
“내가 져주겠다잖아.”
아이칼이 하등한 것이라도 보듯 한심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펄펄 뛰던 베르너가 그제야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경기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져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관람객들에게는 일련의 대화가 빠짐없이 충격적이었다. 신수가 자의로 패배를 선언했다. 파르세네의 승자가 정해진 순간인 것이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이칼이 고개를 들었다. 냉연한 시선이 무대를 둘러싸듯 굽어보는 3층석을 길게 훑는다.
3층석을 떠받치는 기둥 사이사이에서 흰 제복을 입은 교단병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각국의 귀빈들 사이에 파란이 일었다.
신비로운 공명이 깃든 무심한 음성이 얼어붙은 관객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교단이 너무 오랫동안 중립을 지켰지. 그러나 내 대에는 다를 거야.”
백의 교단이 움직인다. 그 말은 그들이 인세의 세력 균형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선악의 추가 확연히 악으로 기울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직접 대륙 정세에 개입하겠다는 천명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아스트로카 황실 기사단장을 때려눕히고, 블라스코 후계자에게는 선뜻 기권 표를 던진 상황에서.
파수꾼이 검을 놓은 순간부터 백의 교단의 입장은 명확해졌다. 아이칼의 낯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기대되네. 인간의 세계.”
아스트로카 황족들과 오르겐 후작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봄에는 있을 리 없는 추위가 휩쓸고 간 관객석은 여전히 경악스러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얼어붙었다.
경기장 바닥은 이미 얇은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 방대한 오러를 지금껏 갈무리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오러 민감도가 높은 나조차도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이…….
옆자리에서 아버지가 긴 탄식을 흘렸다.
“어쩐지, 계속 뭔가가 수상쩍다 싶더니. 이 시점에 나타날 줄은.”
아버지는 나보다 한발 먼저 이 오러의 정체를 간파하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줄곧 심기가 불편해 보이셨던 걸까?
아니, 그런 건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내를 고요 속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나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은 더 이상 내게 닿지 못했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달음박질쳤다. 마음만 급했는지 발이 꼬였다. 드레스 자락을 잘못 밟아 비틀거리는 나를 누군가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카티샤, 괜찮아?”
“아…… 프리츠.”
언제 이만큼 뒤쫓아 온 건지, 황태자가 내 팔뚝을 낚아채듯 붙잡고 있었다.
하마터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놔주세요.”
“안색이 심상치 않은데. 핏기가 하나도 없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지금 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쌩쌩해요.”
나는 심호흡을 하며 어깨를 감싸듯 한 프리츠의 팔을 밀어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키 차이가 이렇게 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나 정도는 가볍게 저지할 수 있을 만큼 컸다.
나는 프리츠에게서 벗어나려 끙끙거렸다.
“놔 달라니까요, 전하. 정말 괜찮……”
“어디를 가려는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프리츠는 그런 나를 놓아주기는커녕, 외려 내 허리를 감싼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누구를 찾으러 가는데?”
“……오빠.”
나는 가까스로 변명거리를 목구멍에서 끄집어냈다.
“오빠 찾으러요. 경기가,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해서…….”
납득한 만한 말이었는지, 프리츠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이유 없이 날 막아선 데 대한 질책이나 힐난의 눈빛 따윌 쏘아 보낼 정신도 없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하.”
곧바로 그를 지나치느라 나는 프리츠가 그 순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옷 위로 드러난 맨살이 따끔거렸다. 빨리 오지 않는 나를 다그치고 재촉하듯이, 서늘한 오러가 자꾸만 나를 콕콕 찌른다.
‘참가자 대기실, 대기실……!’
양쪽에 늘어선 수많은 천막 중 들어갈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석에 이끌리듯 저절로 걸음이 떨어지고, 정면의 천막이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노크도 인기척도 없이 천막의 문을 젖혔다.
그리고 안쪽에서 망토의 목깃 끈을 묶는 이의 뒷모습을 본 순간.
터질 듯 뛰던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백색 머리카락, 섬세하게 떨어지는 옆선에 무게감을 더하는 다문 입매, 무엇보다 4년 전과는 비교할 바 없이 높아진 눈높이와 커다래진 체격.
하나같이 낯선 것투성이였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당황했을 때였다.
기척을 느낀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그만 탄식이 새었다. 서늘함이 배어 있던 눈매가 나를 보는 순간 활짝 휘었기 때문이다.
그 웃음 하나만이 익숙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아는 그의 전부였다.
“아…….”
멈추나 싶었던 심장이 이내 세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놀란 탓인지 설렜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말이지 미친 듯이 뛰고 있단 것 외엔…….
머리가 무언가를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은 이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원한 겨울의 냄새가 코끝으로 한가득 밀려들고 나서야 내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는 걸 알았다.
막무가내로 달려와 목에 매달리는 나를 아이칼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 안았다.
나와 같은 힘으로 나를 힘껏 당겨 제 품에 넣었다. 뭐라고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왈칵 눈물이 났다.
“너…….”
갑자기 뭐야?
이렇게 나타나 버리면 어떡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언제 온 거야.
그 말들이 덩어리처럼 엉겨서 정작 입 밖으로 나가는 건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나보다 그가 더 빨랐다.
“안녕.”
달랑 한마디의 인사가 귓가로 살랑거리며 내려앉았다. 거기에서 끝은 아니었다. 곧바로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카티, 잘 있었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