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한 팔로 나를 숨 막히게 안은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고저 없이 얼핏 무뚝뚝해 보이는 음성 속에 묻은 간지러운 애정은 오직 나만이 알 것이다.
머리론 응, 하고 대답해야지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내 의지완 상관없이 열다섯 살 어린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이칼이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내 말을 따라 했다.
“잘 못 지냈어?”
“……너는?”
그게 겨우 꺼낸 내 첫마디였다.
“글쎄.” 하고 모호하게 대답한 아이칼이 내 목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만족스럽게 숨을 삼키곤 내 귓불을 장난스럽게 깨문다. 문득 며칠 전 꾸었던 꿈이 생각나 어깨가 흠칫 말려들어 갔다.
‘간지러워…….’
어렸을 때는 심심찮게 했던 장난에 이렇게 과민해지는 건 역시 그 꿈 때문이겠지.
꿈에서처럼 더는 어리지 않은 그가, 역시 더는 소녀가 아닌 내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얼마나?”
“하루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
“그래서 너보다 더 잘 못 지냈다고 하면 믿을래?”
“안 믿어…….”
아이칼이 적어도 나보다는 멀쩡히 잘 지냈을 거란 데 내 머리카락을 다 걸 수도 있다.
‘원래 신수는 혼자도 잘 살잖아.’
난 지난 4년간 아이칼이 겪은 감정 변화를 그래프로 그릴 수도 있었다. 내가 극과 극을 오가며 삐죽삐죽한 선을 그렸다면 그는 그저 고요히, 잔잔한 일직선을 그렸을 것이다.
얘는 원래부터 감정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 먼 과거에도 그랬고, 검투장에서 다시 만났던 9년 전부터도 쭉 그랬다.
코를 훌쩍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너야말로 내가 어떻게 지낸 줄 알고 그래?”
“즐겁게 잘 지냈겠지. 카티는 친구가 많으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말이 어째 뾰족한 듯도 했다.
뭐야, 지금 불평해야 하는 쪽이 누군데!
울컥하는 마음이 그대로 입술을 타고 나갔다.
“고작 그런 걸로 질투하는 거야? 네가 나만큼 외로웠겠어, 아니면 울기를 했겠어. 편지를 기다려 봤겠어…….”
불만을 토로할수록 아이칼의 오러가 위아래로 파도쳤는데, 어째 즐거운 기색이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아?”
“응, 좋아.”
입술을 움직여 내 뺨에 쪽 입 맞춘 아이칼이 나를 제게서 조금 떼어 냈다.
그 바람에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버린 얼굴을 감출 새도 없이 죄 내보이고 말았다.
4년 전에 우리가 헤어지던 날처럼, 그는 울고 있는 나를 보곤 조금 놀란 듯했다. 기억과 꼭 같은 은푸른빛 눈동자가 살짝 커지나 싶더니, 이내 웃음기를 띠며 가늘어졌다.
“울지 마, 카티.”
“치, 마음에도 없는 말…….”
언제는 내가 우는 게 좋다고 했던 주제에.
저것 봐. 지금도 저렇게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주제에 가당키나 한 위로인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며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그러나 이미 고장 난 수도꼭지가 된 눈물샘을 주체할 길이 없어, 결국 도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온다는…… 말 없었잖아.”
진작 했어야 하는 질문이 이제야 흘러나왔다.
“며칠 전에 소포 보냈을 때, 나는 네가 이렐 반도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걸 보낼 땐 분명히 거기 있었지.”
“그럼 지금은……?”
“지금은 여기에 있고.”
아이칼은 내 멍청한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딱 묻는 말에만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파르세네로 온 건지, 왜 왔는지, 방금 결승에서는 왜 기권패를 선언한 건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한 일인지…….
실은 그딴 것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권능은 아직 건재한 건지, 아닌지.
뭘 먼저 입 밖에 내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말들이 목구멍 아래를 두드렸다.
그 숱한 물음들 중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건 확인이었다.
“이제 안 갈 거지?”
“가라고 해도 안 가.”
“약속한 거야.”
“응.”
아이칼의 대답은 바로바로 돌아왔다.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약속인지 네가 알아야 할 텐데, 카티.”
“하나도 안 무서워. 네 발로 왔으니까. 너야말로 앞으로 내 옆에서 못 떨어질 줄 알……”
나는 득달같이 반박했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천막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가까이에, 아. 저긴가?”
“그런데 정말 그놈이랑 그런 약속을 하신 게 맞아요, 아버지? 어떻게 우리 막내를 그런 놈에게 홀라당!”
“난 그렇게 구체적인 약속 한 적 없다. 그냥 옆에 있게만 해 준다고 했을 뿐이야.”
말소리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빠랑 오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여긴 간이 대기실로 마련해 놓은 천막이다. 아무런 잠금 장치가 없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후다닥 아이칼에게서 떨어져 고개를 돌리자, 틈새란 틈새는 죄다 새하얗게 얼어 버린 문이 보였다.
‘아니, 언제?’
어이가 없어 아이칼을 돌아봤다.
그는 바깥의 소란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쥐고 만지작거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질 줄 모른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가 감정의 변화가 많지 않다고 여긴 게 무색하게, 은푸른색 눈동자에 흥미와 놀라움, 반가움, 들뜸, 맹목적으로 느껴질 만큼 집요한 애정이 차례로 스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내 얼굴을 하나하나 담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봤다. 그 거칠 것 없는 시선에 볼이 조금 뜨거워졌다.
“키 많이 컸네, 카티.”
“다, 당연하지. 이제 옛날만큼 작지 않아. 그런데 저기, 지금 밖에……”
“예뻐졌어.”
순간 심장이 쿵 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사치레일 뿐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정말 나보다 더 예뻐졌네, 카티.”
떠나는 날에 내가 장난처럼 던졌던 말을 이제서야 받아치는 것뿐일 텐데 왜 이렇게…….
나를 샅샅이 뜯어보는 아이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감탄스럽기라도 한 듯 그가 나직이 혼잣말했다.
“왜 그딴 기분 나쁜 말들이 도는지 이제 알겠다.”
이마가 아슬아슬하게 맞닿을 만큼 거리가 지척이었다. 심장 어귀가 자꾸만 간지럽고 울렁거리는 탓에 쏟아지는 눈빛을 온전히 받아 내기가 버거웠다.
나는 귀까지 빨개진 채 공연히 문가만 훔쳐보았다.
“그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나한테 보여 주지도 않고 이렇게 다 커 버리면 어떡해? 너무 많이 변했잖아. 난 하나도 못 봤는데…….”
“몰아서 보면 되지. 보여 줄게.”
보여 줄게?
그 말의 뉘앙스가 뭔가 이상했지만 이제는 정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의 오러가 직선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신 나도 볼 거고. 하루 이틀로는 안 되겠는데.”
“아, 알겠으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 밖에 우리 아빠가……”
‘나중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아이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 보내려고?”
“일단 지금은…….”
“방금 전에 가지 말하고 해 놓고서.”
위험하다는 직감이 왔다. 여기서 얘랑 이러고 있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들켰다간 그 후폭풍이 어찌 몰려올지 안 봐도 뻔했다.
“아스트로카 공관.”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서쪽 별관을 블라스코가 사용해. 내 방은 3층이야. 바로 앞에 벚나무가 있어서 발코니에 벚꽃 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 거기로 와.”
“언제?”
“오늘 밤에.”
바깥의 발소리들이 이제 정말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얼른 까치발을 들고 아이칼의 왼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마음이 급해지니 옛날 버릇이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아이칼의 고집을 꺾는 효과적인 방법임이 틀림없다. 은푸른색 눈이 살짝 흔들리고, 손에 닿는 그의 뺨이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나한텐 계속 쪽쪽거렸으면서, 고작 볼 뽀뽀에 당황하는 건 뭐야.’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지금 내 안에서 울렁거리는 애정이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라며 속삭였다.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뻐.”
“카티…….”
“널 경기장에서 발견할 줄 알았더라면 장미를 따로 챙겼을 거야. 아직 늦지 않았다면 오늘 밤에 줄게.”
아이칼이 눈을 수도 없이 깜빡였다.
나는 그의 오른쪽 뺨에도 얼른 마저 입을 맞췄다.
“이따 보자, 아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재빠르게 그에게서 떨어져 천막의 뒤쪽 문을 열었다. 이쪽은 다행히 얼어 있지 않았다.
완전히 빠져나와 문을 도로 내리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반대편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들이닥쳤다. 얼음이 파삭 깨지는 소리가 났다.
“카티샤, 여기 있, ……오랜만이구나, 아가. ……아가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컸군.”
“저 덩치에 아가는 무슨 아가예요, 아버지! 너 인마, 내 동생 어쨌어? ……입은 왜 막고 있는데!”
와, 아슬아슬했다.
‘현장을 안 들켜서 천만다행이야.’
나는 오러로 기척을 감추며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내 짧은 도망은 채 5분도 안 되어 아르닌 언니에게 체포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