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 * *
밤은 금세 왔다.
나는 초조하게 방 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문득 지금 이 기다림이 4년 전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땐 설움과 외로움만이 북받쳐 올랐다면 지금은 설렘에 더해 정체 모를 초조함까지 어우러진 감정이다.
‘이게 다 언니가 이상한 소릴 해서 그래.’
낮에 아르닌 언니가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같은 침대를 쓰지 않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잠옷 바람으로 만나는 건 절대 금지야. 그건 완전…… 완전 그냥 나 잡수시오 하고 들이미는 격이니까! 반대도 물론 마찬가지고!”
금지 사항도 참 많았다.
잠옷이 뭐가 어때서? 잘 때 입는 옷일 뿐인데.
그러면서도 나는 괜스레 옷자락을 한 번 움켜쥐어 보았다.
‘너무 얇은가……?’
따듯한 봄 날씨에 맞게 얇은 면 소재로 재단한 슬립 드레스였다.
망할 월경통 때문에 이따금 배가 콕콕 찌르는 듯 아파서 도톰한 숄도 걸쳤다. 숄은 내 어깨와 상체를 완전히 다 덮을 만큼 컸다.
나는 거울을 힐끔거리며 숄을 좀 더 꽁꽁 여몄다. 이러면 전혀 잠옷처럼 안 보이지!
‘어차피 이 시간에 평상복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잖아. 괜찮아,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칼인데.’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대도 아르닌 언니가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낭설을 믿을 어린애가 아니라는 말이다.
키……부터 시작해서 그 이상의 것들까지, 내가 그 애랑 할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친구 사이는 그런 거 안 해.’
아이칼도 그럴 거라는 데 내 키 10센티미터를 건다. 그렇게 공연히 뛰는 가슴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발코니 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창문의 걸쇠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내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나가듯 매끄럽게 잘려 나간다.
창문 두 쪽이 소리도 없이 바깥을 향해 활짝 열렸다. 나는 숨도 못 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 내 시야에는 닿지 않는 곳에서 덩치 큰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그 울음이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뒤이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누군가가 발코니 난간을 디뎠다.
서늘한 한기를 품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숄이 날아갈 것만 같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커다란 창문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인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낮에 내가 저 품에 매달려 안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바람이 꽃가지를 사각거리며 휘감는 소리를 제외하면 사위는 고요했고, 달은 휘영청 밝았으며 눈앞의 내 친구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벚꽃이 피어나는 계절에 눈이 온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상상했다. 그래서인가, 이제야 다시 그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만 같다.
446년. 이제야 어긋났던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듯이.
“안녕, 내 겨울.”
바람에 조그맣게 실어 보낸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하고 예뻤다.
난간에 한쪽 무릎을 대고 자세를 낮춰 나를 내려다보던 아이칼이 저를 부르는 호칭에 소리 내 웃었다.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 그대로, 그가 나를 따라 속삭였다.
“안녕, 내 여름.”
* * *
나는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을 꼭꼭 닫은 뒤, 방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다시 확인했다. 혹시라도 밤사이에 누군가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낭패다.
어렸을 적에도 온 저택 사람들이 우릴 같은 방에 있지 못하게 했는데, 훌쩍 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 나도 그 정도 자각은 있다.
방문 앞에 안락의자까지 끌어다 놓은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
‘이쯤이면 갑자기 문이 열려도 도망갈 시간은 벌겠지!’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캐노피를 반쯤 내린 침대로 서둘러 다가가자, 캐노피 사이로 팔이 불쑥 나타나 나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허리가 붙들려 침대 위에 앉혀졌다.
“……!”
하체에 닿는 작은 충격에 배가 쿡 쑤셨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푹신한 침대라서 다행이다. 잠깐 불청객처럼 침범한 월경통은 운 좋게도 오래지 않아 잊혔다.
나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칼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이제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 근데 좀 어둡네…….”
얼굴부터 자세히 다시 볼까 했는데, 밤인지라 불빛이 없어 어두웠다. 침대 옆으로 몸을 기울이고 협탁을 더듬었다.
“잠깐만, 여기 어디 발광석 등이 있는데.”
“괜찮아.”
“응?”
되물을 필요 없이 아이칼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허공에 육각면체로 깎은 주먹만 한 얼음이 나타나더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사위가 은은한 은빛으로 밝아졌다.
그제야 나는 내 친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
“…….”
우리는 잠시간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아이칼은 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리고 한쪽 무릎은 세워 앉은 채, 팔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걸치고 있었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를 하나하나 훑었다.
가장 큰 변화는 머리카락의 길이였다. 꼬맹이 시절에는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소년 시절엔 어렵지 않게 묶을 정도의 길이를 유지했던 아이칼은 이제 확연히 짧아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묶기는커녕 이마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짧다. 덕분에 어린 시절보다 굵어진 얼굴선이 한눈에 보였다.
그다음으론 소년 시절보다 훨씬 넓고 단단해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낮에 입고 있던 훈련복은 어디 벗어 던지고 왔는지, 아이칼은 칼라와 손목을 끈으로 조이는 형태의 가벼운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도 나 정도는 품에 쏙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지만, 지금은 조금…… 그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까.
슬금 손을 움직여 보았다. 무릎 위에 비스듬히 걸친 그의 팔을 손끝으로 스치며 타고 내려가다가, 희미하게 힘줄이 돋은 손등을 톡 건드렸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으며 크기를 비교해 보았다.
‘크다…….’
원래도 나보다야 크기는 했지만, 이 역시 예전과 비할 바는 아니다. 성기게 깍지를 끼고 있으니 그의 손안에 들어간 내 손은 무척이나 조그마해 보였다.
나는 힐끔힐끔 아이칼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훔쳐보았다.
이목구비의 섬세하고 고결한 느낌은 그대로인데, 소년티만 벗었다고 이렇게 한순간에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들지……?’
내가 알던 그 애가 맞는 거겠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처럼 아이칼은 이번에도 내가 저를 어색해하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내 손에 반쯤 얽혀 있던 그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봤어?”
내가 침대 위로 올라온 순간부터, 아니, 그가 발코니에 나타난 순간부터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은푸른색 눈이 바로 지척이었다.
그 눈이 묘하게 타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재차 물었다.
“그럼 이제 나도 봐도 돼?”
“뭐? 뭘……?”
아이칼이 대답 없이 깍지 낀 손을 당겼다.
나는 무척이나 가볍게 그에게로 끌려갔다. 마치 다리 사이에 갇힌 모양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아이칼이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곧장 왼쪽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닥쳤다.
“아야……!”
아이칼이 내 어깨를 깨물었다. 혼이라도 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뾰족하다.
“모르는 놈 보듯 하지 마, 카티.”
“아, 안 그랬어.”
귀신이야?
아픈 것보다 놀라서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언제 흘러내렸는지 숄 한쪽이 등허리로 흘러내려 가 있었다.
드러난 맨살에 그가 코와 입술을 묻었다.
“여전히 좋은 냄새.”
“씻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머리가 기억하는 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나는 반 박자 뒤에 그 말은 덧붙이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아이칼이 내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결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며 열을 앗아 갔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허리가 빳빳하게 곧추섰다.
같은 대화를 예전에도 두어 번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 위험스러운 분위기였던가……?
내가 잔뜩 경직해 있는 걸 몸으로 느낀 듯, 아이칼이 내 쇄골 부근에 이마를 댄 채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어떻게 할까, 궁리라도 하는 양.
그러더니 뜻 모를 소릴 중얼거렸다.
“그래, 천천히.”
다치면 안 되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그 따끈한 숨결이 이번에는 반대로 슬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더더욱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얼굴이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너무 가까워…….’
천만다행으로 아이칼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우리 사이에 다시 공간이 생겼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가슴은 여전히 벌렁거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내게서 손까지 떼고 손등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댄 그가 내 정신을 깨웠다.
“궁금한 거 없어, 카티?”
“……아!”
그제야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4년간 밀린 이야기들이 속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있어! 그러니까 뭐부터 말해야 하지. 일단은…….”
나는 허둥거리며 아무 말이나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 그러니까…… 성체화는 정확히 언제 끝났는지부터 물어보려고 했어!”
한번 물꼬를 트니 다행스럽게도 그다음부터는 술술이었다.
나는 잠깐 찾아왔던 묘한 위화감을 잠시 미루고, 우르르 질문 보따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