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뭐가?”
“체온.”
“괘, 괜찮아. 적당히 따듯하고…….”
“그래? 다행이네.”
열을 내기 위해 일부러 오러를 순환시키는 듯, 아이칼의 체내에 가득한 오러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 흐름이 꼭 파도가 치는 것 같아 덩달아 나까지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듯했다.
어질어질, 울렁울렁.
“그럼 이건? 이렇게 쥐는 거.”
“괜찮아…….”
“이 정도는?”
“어, 그것도……. 아야, 방금은 좀 아픈데…….”
“아하.”
내 손을 자연스럽게 가져가 이것저것 집요하게 시험하던 아이칼이 흡족한 눈을 했다.
“이 정도까진 된다는 거지. 이제 좀 알겠다.”
그의 말대로였다. 체온도 따듯하고, 깍지 낀 손의 악력도 적당히 셌다. 내 몸에 싣는 무게도 거의 없었다. 그 바람에 내려가라며 밀어낼 구실이 없어졌다.
뺨에 또 열이 올랐다. 어제부터 얘만 보면 계속 이러는 게, 아무래도 어딘가 고장 난 게 틀림없다.
“이런 걸 왜 지금 하는 건데…….”
“미리 알아두려고.”
그러니까 왜? 왠지 답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왔다.
요상 야릇한 감정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기 전에, 나는 얼른 몸을 비틀어 아이칼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럼 다 알았으니까 이제 됐지? 이제 내려가. 오늘 밤에 축하연 있잖아. 그거 준비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씻고 준비해야 해.”
“같이 할래?”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설마 같이 씻자는 건 아니겠지?
아이칼이 뻔뻔하게 내 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제 네가 잠드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봤어.”
“그러니까, 뭘?”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부분이 그대로인지, 거의 못 봤……”
“야아……!”
나는 질겁해서 손바닥으로 아이칼의 입을 틀어막았다.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표정을 보니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
“못 보긴 뭘, 어제 몇 시간이나 봤잖아!”
“달라.”
“뭐가 달라. 안 달라!”
엄한 말을 늘어놓는 건 쟨데, 왜 나만 토마토야!
어디서 힘이 났는지, 나는 놀라운 괴력으로 아이칼을 퍽 밀쳤다.
“너 진짜 미쳤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와 가지곤. 너, 너어, 계속 이러면 내 침실에 출입 금지야……!”
그렇게 속사포로 빽 외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도망쳤다. 그리고 문을 콰앙 닫아 버렸다.
문 쾅 작전은 열다섯 살 이후론 안 쓴 건데. 이번만큼은 논외다.
‘뭐야, 정말. 쟤 이상해!’
쿵덕거리는 심장을 진정하기를 한참, 깜빡하고 간밤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가장 중요한 말을 안 했다.
‘오늘 축하연……!’
오늘 밤 축하연에서 어떤 식으로 교단의 입장을 표명할 것인지, 미리 입을 맞춰 두어야 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욕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힘주어 열자마자 바로 문 앞에 서 있던 아이칼과 맞닥뜨렸다.
언제 따라온 거야!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입을 벙긋거렸다.
“그, 그…….”
“그?”
“그, 에펠 로드리고, 너랑 준결승에서 붙었던 아스트로카 황실 기사단장……. 오늘 축하연에 그자를 데려와야 해…….”
다행스럽게도 말은 술술 잘 나왔다.
“그가 경기에 들고 나왔던 검도 같이. 꼭, 잊어버리지 말고…….”
“알겠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 그래. 그럼 난 이만!”
“카티?”
답을 듣자마자 다시 문을 쾅 닫으려 했는데, 문짝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칼이 한 손으로 가뿐히 문을 막고 있었다.
내가 낑낑거리며 문고리를 당겨도 요지부동이었다.
내 원맨쇼를 빤히 내려다보던 아이칼이 고개를 슥 기울이며 묘하게 웃었다.
한 손으로 문틀을 짚은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왜, 왜! 뭐어……?”
“아까 한 말 말인데.”
얼른 물러나려고 했으나 아이칼이 더 빨랐다.
문을 놓은 대신 내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가볍게 끌어온 그가 귓가에 나직한 속삭임을 떨어뜨렸다.
“축하연 참석 준비를 같이하자는 거였어, 카티샤. 같이 씻자는 게 아니라.”
“아…….”
“물론 그것까지 같이해도 좋지만.”
펑 터졌던 민망함이 그가 덧붙인 사족을 듣자마자 갈피를 잃었다.
……어쨌든 결국은 같은 말이잖아!
‘이게 주인님을 놀려 먹고 있어……!’
불타는 눈으로 그를 이글이글 쳐다보자 아이칼이 눈매를 예쁘게 휘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안 했어!”
“씻고 나와. 기다릴게.”
내 항변은 깨끗이 묵살되었다.
내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춘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자라가 등딱지에 목을 집어넣듯이 욕실로 몸을 구겨 넣었다.
“…….”
그리고 3분 후, 자괴감을 느끼며 다시 문을 열었다.
“저기, 설렁줄 좀 흔들어서 마가렛 불러 줘…….”
밤새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덕분에, 욕실에는 갈아입을 옷이고 속옷이고 수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막 일어나 씻어야 하는 이 비루한 몸뚱이 하나뿐.
아이칼이 결국 소리 내 웃으며 설렁줄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나는 풀이 죽어 욕실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거울로 본 내 얼굴은 여전히 홍당무 저리 가라였다.
* * *
파르세네의 최종 우승자가 결정된 이튿날 저녁, 검술제의 폐막을 기념하는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오색의 불꽃놀이가 청명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경기장 밖에서는 경기를 보러 모인 평민과 중산층들이 축제를 즐겼고, 각국의 공사관들 한가운데 세워진 영예의 전당에서는 귀족들을 위한 축하연이 열렸다. 축하연의 메인이벤트는 새롭게 갱신된 랭킹을 발표하는 것이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음에도 홀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일국의 수장들에게는 이 자리가 정치적 교류의 장이고, 젊은 왕족과 귀족들에게는 친교와 화합의 장이다.
연회 내내 오르겐 후작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마공학 무기 제작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서부 트리아탄 왕국의 왕자가 몇 시간 전 정중히 계약을 고사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온 탓이다.
서부의 대금광 지대를 보유한 트리아탄은 몇 년째 주변국들과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황금이 썩어 나는데 그를 지킬 군사력과 무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 그야말로 노다지 같은 고객이었는데…….
문제는 트리아탄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축하연에서 백의 교단의 입장 표명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나라들이 태반이다.
교단의 파수꾼이 왜 블라스코의 편에 서서 아스트로카 황실을 향해 정치적 개입을 선언했는지, 그 연유를 파악해야겠다는 것이다.
신수가 적으로 돌리는 황실과 거래했다간 분노의 불똥이 자국에도 튈 수 있으니 미리 몸을 사리는 셈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서부 국가들과 접선할 수 있을지 모른다.’
후작은 마음이 급했다.
다른 무엇보다 오르겐의 재정 상황이 문제였다.
지난 4년간, 오르겐은 아스트로카 국경 지대에 영지를 갖고 있는 귀족들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아스트로카 국내 시장에서의 수입으로는 간신히 본전치기에 그쳤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경비가 크니 당연한 일이다.
그놈의 공방주, 어찌나 바가지를 긁으며 재료값과 인건비를 살뜰히 뜯어 가던지.
본전을 찾았다 싶으면 바로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자금 상태를 조금 회복해 놓았다 싶으면 귀신같이 영수증이 날아오고.
게다가 공방주와 공방의 장인들에게 지급하는 인건비만 해도 만만찮았다.
수틀리면 기술을 고스란히 들고 블라스코로 튈 위험이 있으니 연봉 협상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외로, 특히 대륙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북서부 나라들로 눈을 돌린 것인데…….
후작의 주먹 쥔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그 신수는 왜 하필이면 블라스코 편에 섰을까. 뭘 알아서?’
신수가 ‘악’이라고 규정할 만한 것.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뿐이다.
20년 전, 황제가 직접 손을 썼던 블라스코의 비극.
초대 황제의 비기술을 살인에 사용했던 바로 그 사건 외에는 짚이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건 황제와 황후, 그리고 후작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백의 교단이 어찌 알아서?
‘설마 루티어드 블라스코, 그놈이 백의 교단에 마수를 뻗쳤나? 왜?’
복수하기 위해서?
“너무 걱정 마세요, 할아버님.”
초조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조금 전 2층에서 홀로 내려와 후작의 곁을 지키던 황태자가 그를 안심시켰다.
“할아버님께서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마도 무기 사업을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공방주를 발굴하고 키우신 분도 할아버님이시고요. 아무리 백의 교단이라고 한들 없는 꼬투리를 어찌 잡겠습니까.”
그거야, 후작은 목 뒤로 침음을 삼켰다. 그거야 황태자가 20년 전의 일을 몰라 하는 속 편한 소리다.
루테 블라스코가 죽은 그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놈의 낯짝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뒤이어 그놈의 장례식에서 루티어드 블라스코가 자신을 찢어 죽이고픈 눈으로 쏘아보던 것도.
후작은 진저리를 치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니, 아니다. 이제 와서 동요할 필요 없는 일이야.’
상식적으로 루티어드가 백의 교단을 포섭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교단은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 관계에 직접 나설 만큼 엉덩이 가벼운 기관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가 루테 블라스코를 죽였다고 한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루테 그놈은 언젠가는 죽어야 했어. 대륙 곳곳을 떠돌고 다니면서 블라스코의 이름값을 높이고 있었단 걸 몰랐을 줄 알고? 그게 다 황실에 위협이 된 탓인데.’
자신의 사위, 페르테스는 황제였다.
중부와 동부를 호령하는 최강자 아스트로카 대제국의 수장이다. 감히 황제의 뜻에 반해 황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미리 뿌리 뽑았다는데 그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멍청한 딸년의 정신도 차리게 할 겸, 시기적절하게 잘 치웠다. 그리 자위하니 불안감으로 흐려졌던 정신이 명료하게 밝아졌다.
블라스코의 비극은 이제 와선 케케묵은 과거의 편린일 뿐이었다.
지난 20년간 블라스코와 황실은 사사건건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단 한 번도 블라스코의 아성이 아스트로카 대제국의 위명을 넘어선 적은 없었다.
블라스코의 이름 뒤에는 늘 악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황실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부풀려 퍼뜨린 소문들은 블라스코가 아스트로카 귀족들과 결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훼방꾼 역할을 했다.
게다가 그간 블라스코를 감시하는 일을 소홀히 한 적도 없다. 오르겐 후작가와 황실이 공유하는 정보망에, 블라스코와 백의 교단이 접선했다는 사실은 한 번도 걸려든 바가 없었다.
그러니 비약이다. 당초의 계획이 틀어져 지나치게 초조한 탓에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남은 해외 수주라도 지키려면 이만 정신 차려야 했다.
“……못난 할애비가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전하. 크게 염려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예, 할아버님. 무리하지 마세요.”
손자의 다정한 격려를 받으며 후작은 허리를 곧게 세웠다. 때마침 홀 앞에 마차 한 대가 당도했다.
푸른 나비와 칼날. 블라스코 일가가 도착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