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 * *
축하연에 참석한 블라스코는 세 명이었다.
공작, 공자, 그리고 막내 공녀.
둘째 공녀는 불참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의 신수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해서 새롭게 홀에 들어선 이들 중 가장 먼저 좌중의 시선을 압도한 이는 자연스레 공작이 되었다.
구태여 미사여구를 붙여 찬탄하기도 입 아픈 화려한 외형의 사내. 그는 한때 쌍둥이 형제와 함께 이 파르세네의 전당에 세 번이나 이름을 올렸던 실력자였다.
숱한 선망의 눈길이 공작의 얼굴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나 몇몇은 금세 위화감을 감지했다.
아스트로카 출신 귀빈들의 낯에 하나같이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귀족들이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오늘 공작의 분위기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어째 오늘따라 좀, 방탕한 느낌이…….”
의아한 건 황족들을 위해 마련한 2층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 로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공작이…… 원래 저런 분위기를 풍겼던가?”
공작, 루티어드 블라스코의 차림새가 평소와 달랐다.
태도는 오만할지언정 의복만큼은 강박이 느껴질 만큼 완벽히 갖추어 입던 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한없이 가벼운 차림을 하고 왔다.
바지에 드레스 셔츠, 베스트는 생략하고 은실로 자수를 놓은 쥐스토코르만 대충 걸쳤다.
그나마 중앙에 루비를 박은 크라바트를 대충 매어 최소한의 격식만 차렸다. 심지어 늘 깔끔하게 위로 쓸어 올렸던 머리 모양마저도 오늘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다.
마치 억지로 몸에 끼워 맞췄던 틀을 깨부수고 나온 듯이.
로사리아는 홀린 듯 그의 옆얼굴에 눈을 고정했다.
시선을 느낀 공작이 고개를 들어 정확히 2층 상석을 쳐다보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로사리아의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저, 눈빛…….’
불손하고 반항적인 저 눈빛.
완벽하게 제련한 완성품처럼 고고하고 절제된 루티어드 블라스코의 눈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냉혹하고 생동적이며, 무엇보다도 날것이다.
로사리아는 저런 눈을 가진 유일한 남자를 알았다.
2층 상석의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공작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저 비딱한 웃음마저도!
놀라우리만큼 저자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눈에 익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낱낱이 발가벗기는 듯한 눈빛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작의 곁에 있던 화려한 색채의 누군가가 눈길을 끌었다.
탐스러운 주황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막내 공녀였다. 즐거운 미소를 걸고 아버지와 오라비 곁에 꼭 붙어 있다. 아카데미 졸업 이후 죽 아르템에서만 지내, 다 큰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동자 색과 같은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공녀는 꼭 숲의 요정처럼 싱그럽고 사랑스러웠다.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공녀가 지닌 독특한 색채의 머리칼이 노을이 길게 드리운 사막을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세월에 묻혀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참을 수 없이 질투했던 상대. 그 여자.
루테 블라스코의 약혼녀.
그래, 그 여자를 닮았다.
‘말도 안 돼!’
로사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우연인가? 아니라면?
‘설마, 아니야. 다 죽었잖아. 틀림없이 죽었어. 전부 다!’
살아 있을 리가 없다. 20년 동안이나 그리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제 와 그 믿음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이 막내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말했다.
공녀가 눈을 빛내며 아버지에게 뭐라 또 묻고, 공작은 피식 웃으며 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떠밀어 공녀를 큰아들에게 보냈다.
블라스코 남매는 곧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아들딸을 플로어로 내보낸 공작이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또다시 눈빛이 맞부딪쳤다.
‘확인, 확인을…….’
질 나쁜 장난인지, 혹은 공포스러운 현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마침 그녀의 남편인 황제는 이웃 왕국 페테로의 왕족들과 긴한 논의를 나누고자 자리를 비웠다. 그가 돌아오면 공작에게 접근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로사리아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어머니?”
1층 홀로 내려온 로사리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다름 아닌 프리츠였다.
프리츠의 옆에 있던 오르겐 후작이 득달같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블라스코 일가가 등장한 직후부터 황후와 정확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후작은 딸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대번 알아챘다.
그가 소리 죽여 로사리아를 꾸짖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폐하! 지금 저자에게 가서 무얼 하시려고요?”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 봐야 해요. 아버지도 느끼셨잖아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위험합니다!”
“아뇨. 지금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예요.”
로사리아는 저를 붙잡는 오르겐 후작의 손을 뿌리치고, 공작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로사리아의 만면에서 불안감은 걷히고, 대신 대제국의 황후로서 마땅히 연마해야 할 품위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공작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로사리아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떨지 않기 위해 갖은 힘을 다 끌어모아 마침내 그의 앞에 섰다.
“한 곡 청해도 될까요, 공?”
공작이 제게 내민 그녀의 매끈한 손등을 빤히 응시했다.
어느새 모두가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아스트로카의 황후가 블라스코 공작에게 춤을 청했다.
공작이 픽 실소했다.
“아내를 끔찍이도 여긴다는 남편 눈앞에서 나랑? 감당 가능합니까?”
놀라거나 의외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렇겠지. 내려와 직접 확인해 보라 눈빛으로 종용했으니.
‘페르테스가 이 모습을 봤다간 또 미쳐 날뛰겠지만.’
지금은 남편의 의처증보다도 눈앞의 사내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게 더 시급했다.
“……그럴 리는 결단코 없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내 짐작이 맞는다면.”
로사리아의 목소리 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섞였다.
“둘만 있을 장소를 마련하는 것보다 이 연회장 한가운데가 더 내게 안전하겠지요.”
지켜보는 눈들이 그녀의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루테의 입술에 걸린 호선이 짙어졌다.
“똑똑하네.”
그가 로사리아의 손등을 잡아채듯 쥐었다. 손을 부서뜨릴 듯 움켜쥐고 반강제로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로 끌고 나갔다.
로사리아는 비틀거리며 연회장 한가운데 섰다.
칼날 같은 긴장감 아래,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그대에게 죽은 동생을 흉내 내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장내에 흐르는 교향곡은 모데라토 템포의 왈츠였다.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어도 기계적으로 학습한 스텝은 완벽했다.
“대체 무슨 장난질을 꾸미고 있는지 묻고 싶은데요, 공.”
로사리아는 눈앞의 춤 상대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건성으로 스텝을 밟고 있다는 게 티가 났지만, 빛이 나는 외형과 체격 덕분인지 그마저도 우아해 보였다.
“일부러 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대체……”
“왜?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할 줄 알았더니.”
공작이 툭 대꾸했다.
말이 짧다. 반말과 존대가 뒤섞인 이상한 말투였다.
본래 저렇게 말하는 자가 아니다. 제 아내와 동생이 죽은 뒤로 변덕이 죽 끓듯 하며 악명만 나날이 갱신해 온 공작이지만, 저보다 신분이 높은 자나 연장자에게는 최소한의 존중을 표할 만큼 이성적이고 예의에 엄격하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연기인가? 아니면…….
“폐하께서.”
곡에 맞추어 로사리아의 몸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손이 닿았을 때, 끊어진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나를 그렇게 사랑했다던데.”
이게, 연기라고?
공작에게 틀어 잡힌 로사리아의 손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20년 전에 죽어 버렸던 그녀의 청춘을 장식한 남자를 어찌 몰라볼까.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모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단 한 번 알아채지도 못하는 걸 보면…….”
저 오만방자한 말투, 불손한 눈빛, 늘 일자로 묵묵히 다물고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비죽 끌려 올라간 입꼬리.
공작이 싸늘하게 그녀를 비웃었다.
“여전히 얄팍하기 짝이 없으십니다. 당신이 품었다던 그 연정이란.”
그럴 리가.
로사리아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에서 남자가 서늘한 비소를 머금는다.
로사리아는 벌벌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루……테.”
루테 블라스코.
20년 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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