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뾰쪽하게 솟아올랐던 아르닌의 오러가 멈칫 흔들렸다.
그녀가 내게 의심 섞인 시선을 던졌다.
“딜이라면, 어떤?”
“공녀님께도 좋고, 저도 좋고, 모두가 해피 엔딩일 수 있는 제안이에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조금 전까지 이어진 아르닌과 나눈 짧은 대화에서, 나는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확신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공녀님.”
무조건 직진이다. 그렇다고 감정에 호소하거나 불도저처럼 들이미는 게 아니라, 정확한 셈으로 득실을 따지는 거래.
“제 편이 되어 주세요. 곧 소집할 가문 회의에서 상속 시험을 볼 수 있도록이요. 그리고…….”
나는 내게로 똑바로 찔러 들어오는 아르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냈다.
“제가 블라스코의 유산을 전부 다 상속받을 수 있도록, 저를 보호해 주세요.”
* * *
아르닌은 순간 헛것을 들은 줄로만 알았다.
대체 이 조그만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도 어이가 없어 경계를 내비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 지금, 네 앞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아는 거지?”
“그럼요, 아르닌 공녀님.”
“……블라스코의 직계인 내게, 원래 우리의 것이었어야 할 유산을 당당히 가져가겠다고 선포하는 거야?”
“네!”
허, 이런 맹랑한 것을 보았나?
아르닌은 그만 헛웃음을 짓는 사이, 아이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유산은 블라스코의 것이 아니었어요. ‘헤르젠 블라스코’의 것이었죠.”
카티샤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양 주먹을 옹골차게 말아 쥐고 저를 직시하는 눈빛이 맑고 곧다.
“할아버지의 유언장에는 관할 행정청과 법무부, 그리고 마법 관리국의 공증이 찍혔어요. 그 말은, 제가 가장 ‘적법’한 상속인이라는 뜻이지요. 사실 자격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블라스코의 세가 아무리 강해도 아스트로카 제국법 위에 군림할 순 없으니까요.”
심지어 말을 길게 늘이는데도 장황한 구석이 없고, 나름의 논리마저도 있었다.
카티샤의 말인즉슨, 자신의 자격 유무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자격을 메꿔 주고 있으니까.
퍽 야망 있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저를 쳐다보는 아이의 생김새며 표정은 너무나 밝고 순했다. 그 괴리감이 엄청났다.
“……그래서? 넌 원래 네 것을 찾아가려는 것뿐이다?”
“네. 그러려고 왔어요.”
확답을 듣자 아르닌의 눈에 진한 흥미가 번졌다.
‘이런 식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의 상황에 분노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뇌 주름이 부족한 베르너는 이런 당돌한 선언을 듣자마자 욱하기부터 했을 테지.
하지만 자신은 그 둔치와는 다르다.
조금 더 들어 보자.
아르닌은 팔짱을 끼며 눈짓으로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카티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갑자기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 유산을 상속받는 순간, 제게는 수많은 적들이 생긴다는 걸 알아요. 사실 제국법은 실질적으로 저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될 순 없으니까요.”
“왜지?”
“여기는 블라스코니까요. 법은 멀고, 주먹은 빠른…….”
어느새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에 물기가 반질거리고 있었다.
허어, 아르닌은 또다시 기가 찬 신음을 흘려야 했다.
“야, 그래서 우리가 널 패기라도 한단 말이야? 아버지께서 그러시던? 블라스코가 무슨 범죄자 소굴인 줄 알아?”
카티샤가 움찔하며 입을 꼭 다물었다.
그 순간 가문을 향한 아르닌의 긍지에 쩍 금이 갔다.
“깡패 같은 귀족인 거지, 귀족 같은 깡패가 아니라고!”
“다, 다른가……?”
“천지 차이거든!”
아르닌이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열변을 토했다.
“블라스코가 관대함을 베푸는 세 부류. 아이, 노인, 동물! 몰라?”
“물론…… 공작님과 공녀님, 공자님께서는 그러시겠지만요……. 가문 회의가 열리면…….”
“안 때려! 험하게 구는 놈이 있으면 나한테 이름 말해! 콱 반 죽여 놓을 테니까!”
냅다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아르닌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잠깐,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말 유산을 얘한테 넘겨주겠단 얘긴데?’
그럴 순 없는데……?
순간 혼란에 빠진 아르닌의 속을 고스란히 읽어 낸 것처럼, 카티샤가 눈을 빛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공녀님 같으면 물론 좋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순탄할 리가 없어요. 원래 세상은 요지경인 거거든요.”
고작 열 살 난 아이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카티샤의 동그란 눈매가 어느새 냉철하게 굳어 있었다.
“믿을 건 도덕이나 신의, 법 같은 게 아니라 내 손에 쥔 자산이에요. 현금성이든, 부동산이든, 보험이든.”
마찬가지로 열 살 꼬마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발언이었다. 심지어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공작이 들었다면 절로 얼씨구 소리가 나왔겠지만, 아르닌의 귀는 점점 쫑긋 서고 있었다.
카티샤가 중대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엄숙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유산을 상속받고 나면, 제가 언니의 투자자가 될게요.”
“투자자?”
“공녀님,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금고가 탐난다고 하셨죠?”
“어? 어어. 그랬지…….”
“그게 제 손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거기서 공녀님께서 필요한 거 다 찾아 드릴게요. 연금술에 필요한 강화 재료들, 고대 유물들, 각종 설계도들까지.”
뭐?
아르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카티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공녀님 이름을 딴 무기 공방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초 투자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
“너, 그거 어떻게 알았……?”
블라스코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본인의 이름을 딴 공방을 차리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아르닌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 몰래 공작의 눈을 피해 그녀가 제작한 무기들을 경매에 내다 팔며 돈을 불리던 중인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고?
“공방을 열 부지가 필요하시면 그것도 사 드려요!”
연이어 몰아닥치는 유혹에 아르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티샤가 통통 튀어 다니는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장사는 목이고, 목은 돈이죠. 물 좋고 교통 좋고 사람 많은 곳으로 수소문해 볼게요.”
“……수도에도 가능해?”
무심결에 그렇게 되물은 순간, 아르닌은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차.’
카티샤가 어쩐지 사악해 보일 만큼 씨익 웃고 있었다.
아이가 엄지를 치켜들며 음흉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완전 가능하죠. 할아버지가 제게 소유권을 넘겨주신 정보 길드에 의뢰해 볼게요.”
“…….”
“단, 지금 말씀드린 건 다 제가 유산을 무사히 모두 상속받는다는 걸 전제로 해요.”
“그러려면 내가 너를 도와줘야 하고?”
“맞아요.”
당혹감에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아르닌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착실하게 튕겼다.
어차피 헤르젠 할아버님의 금고는 카티샤의 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아버지에게 넘어갈 테고, 그다음에야 직계인 자신과 베르너에게 내려올 텐데, 그러려면 족히 20년은 걸릴 테다.
‘내 손에 들어와도 베르너와 갈라 먹어야 할 테고…….’
그렇다면 그냥 이 애에게 줘 버리고, 내가 필요한 것만 싹 긁어다 쓰면…….
“쌍방 손해 볼 것 없죠?”
“그렇네……. 아니, 잠깐!”
아르닌이 미처 손을 내젓기도 전에 카티샤가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
“우리 쇠뿔도 단김에 뽑아 버려요, 언니! 당장 계약서 써 드릴 수도 있어요.”
“계약서라니, 무슨 계약……?”
카티샤가 제 옷 앞주머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졌다. 그러고는 돌돌 만 두루마리종이를 끄집어냈다.
설마.
“주…… 준비해 왔어?”
“네. 두 번째 선물!”
카티샤가 그것을 반듯하게 펼쳐 아르닌에게 내밀었다. 그러곤 아주 해맑게 웃는다.
“요기 밑에 서명하시면 돼요.”
제법 바른 글씨로 조건을 조목조목 적은 계약서 밑에, 아이의 서명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카 티 샤 아 인 슬 리 ♡]이름 밑에 작은 하트까지 그렸다.
무슨 이런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계약서를 들고 와선…….
‘서명만 한다고 번듯한 계약서가 되는 게 아닌데.’
아르닌이 떨떠름히 생각한 순간, 카티샤가 기쁘게 외쳤다.
“그리고 나중에 시간 되시면, 우리 같이 행정청이랑 법무국이랑 마법 관리국에 공증받으러 가요!”
“…….”
“할아버지 유언장처럼, 누구도 절대 파기할 수 없게!”
아르닌은 이번에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얘, 정말 열 살 맞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