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루테는 몸부림치는 후작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아르닌의 눈물이 잦아들고 후작의 몸에 옮겨붙은 불길이 시뻘건 화상 자국을 남긴 채 완전히 꺼졌을 때, 그가 움직였다.
후작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루테가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숨이 넘어갈 듯 신음하는 후작의 턱을 움켜쥐고 제 쪽을 보도록 추켜올렸다.
“당신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어.”
“허억, 커흡, 큭…….”
“매일같이 한 명 한 명의 죗값을 저울질하며 살았지.”
“…….”
“어제는 단번에 목을 베어 버릴까 싶다가도, 오늘은 또 그게 너무 쉬운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루테는 그날 마차 안에 있었다. 루티어드와 이엘의 맞은편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나 늘어놓다가, 형제의 몸속에서 오러가 역행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흐름이 뒤바뀐 오러가 혈관을 찢고, 심장을 터뜨리고 온몸의 구멍으로 용솟음쳤다. 이엘이 발작하는 남편의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루티어드……!”
“이엘, 떨어져요!”
“……어땠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루테가 속삭이듯 물었다.
“형이 죽기 전에 보았을 것 아냐?”
“무, 무얼……?”
“마지막에 내 모습을 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봤잖아.”
그날 황성에서 열렸던 만찬에는 오르겐 후작도 참석했다.
모를 리가 없다. 황제가 홧김에 루티어드에게 그런 비술을 걸었을 리가 없었다. 검사도 아닌 자의 기척과 살기를 알아채지 못할 형이 아니니까. 분명 이자가 형을 유인했을 터다.
루테가 발로 진물이 질질 흐르는 후작의 팔뚝을 무참히 짓밟았다.
후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묻잖아, 내가.”
“크아악……!”
“그때 형에게 수를 쓰고, 돌아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내지르는 고함과 초점이 희미해진 푸른 눈에 처절함이 깃들었다. 고통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스무 해의 세월이 흘러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에게 고여 있었다.
루테가 후작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후작이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알고 싶은가, 루테?”
후작이 흉하게 뒤틀린 입술을 움직였다. 밭은 숨과 함께 그가 실성한 인간처럼 키득거렸다.
“네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 궁금해?”
“…….”
“그렇다면, 내 입에서 대답이 나가기 전까지는, 넌 나를 죽일 수 없겠군.”
루테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격정이 빠져나갔다.
후작이 헉헉거리며 그를 비웃었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듯, 늙은 사내가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이름으로 대신 살아가니 어땠나, 루테? 하하, 하아, 가엾기도 하지. 루티어드. 돌아 나가는 순간까지 바로 몇 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거야! 아우가 뻔뻔하게도 제 이름을 도둑질해 살았다는 걸 알면, 흐핫, 어떤 기분일까? 하하, 이런 촌극이 다 있나……!”
루테가 동작을 멈추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불길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네가 죽인 거야. 네 형은, 네가 죽인…….”
“…….”
“네놈이…… 죽었어야 했는데.”
후작이 그를 노려보았다. 화상으로 피부 껍질이 벗겨져 흉한 얼굴 만면에 적의가 득실거렸다.
“너 때문에 다 망칠 뻔했어. 내가 어떻게 오르겐을 일으켜 놓았는데, 내가, 딸애를 황제에게 팔아넘기면서까지…….”
생의 끝에 다다른 노인이 짐승처럼 절규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모습을 관전하던 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딸 데리고 결혼 장사를 한 게 왜 내 탓이야.”
어느새 그의 입꼬리는 본래의 호선을 회복하고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째깍거리며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문득 루테가 바람 같은 실소를 흘렸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내가 진짜 루티어드였다면 좋았을 텐데.”
“뭐……?”
“형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었거든. 착해 빠져 가지고는.”
폭격처럼 쏟아진 말에도 루테는 흔들린 기색이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죄악감 속에 갇혀 살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훗날 죽어서 형과 이엘을 만나는 날에 그들에게서 갖은 원성을 듣는다 할지언정, 염치없더라도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다.
그날 죽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사랑하는 딸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때때로 이는 삶의 회의감과 불면은 따사롭게 웃는 아이의 미소 한 번에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살아갈 이유이자 목표가 되는 아이가 있으니 잔파도에 휘청거리는 것조차 사치에 불과했다.
“난 내 딸이 꼬마 할머니가 되는 걸 보기 전까진 안 죽어.”
“아하하…….”
“더 이상 들을 말은 없겠군.”
그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직감한 후작의 낯이 시커멓게 죽었다.
“……여기서 나를 죽이면, 로사리아는 가만둘 건가?”
“유감스럽게도.”
후작의 눈에 검날이 내뿜는 서늘한 빛이 비쳤다. 이어질 말과 상황을 직감한 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루테가 냉랭하게 일갈했다.
“다음은 당신 딸이야.”
새벽 공기를 가르며 쇄도하는 검날의 반사광이 후작이 본 생의 마지막 빛이었다.
루테는 절명하는 이에게서 끝까지 싸늘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맥박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뒤에야, 루테는 몸을 일으켰다. 검을 성의 없이 뽑아낸 뒤 횡으로 휘둘러 핏물을 털었다.
늙은 사내의 몸이 발치로 형편없이 무너졌다. 무표정하던 그의 입가에 차차 호선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기분이 죽이는데.”
후, 루테가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건 이제껏 이 검으로 행해 온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고 보람찬 일이었다.
아르닌이 달려와 널브러진 시체를 발로 마구 걷어찼다.
“이 인간도 못 되는 새끼, 아버지가 성자라 이렇게 단번에 간 줄 알아. 빌어먹을,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을 새끼…….”
아르닌이 지금 자리에 없는 베르너의 몫까지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그러고도 또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홱 돌아서서 루테를 끌어안았다.
“고생하셨어요, 아버지.”
“아직 끝난 건 아니다만.”
“그래도요. 저 영감탱이는 곱게 죽지도 않고, 끝까지 쓸데없는 말만 지껄여서는 사람 기분을 박살 내고…….”
“됐다. 별로 신경 안 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막내가 눈에 어른거리던 차였다. 그의 삶을 꽤 괜찮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아이가 달려와 어깨를 콩콩 두드려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돌아서기 직전, 루테는 마지막으로 엎어진 후작의 등에 시선을 던졌다.
“……당신이 내 이름 앞에 달아 놓은 악명이 한둘이 아니지.”
당신이 내게 씌운 바로 그 악명대로 악귀가 되어 볼 생각이다.
루테는 속으로 뇌까렸다.
나는 어쩌면, 당신이 씌운 그 화려한 악명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간일지도 모르거든.
블라스코의 비극이 덮쳤던 426년과 427년. 셋이 죽고 마지막 한 명조차 영영 잃을 뻔했다. 그렇게 똑같이 되돌려 줄 생각이다.
루티어드가 생전 남겼던 말이 무엇인지는 그의 혈관에 금기술을 쑤셔 넣은 장본인의 입으로 들을 것이다.
루테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제 다음은 아스트로카 황성이다.
* * *
아르닌의 공방이 대충 정리되는 데까지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치안대 쪽으로 신고가 들어갈 테고, 달려온 이들은 폭발의 흔적이 여실한 공방과 그 한가운데 고꾸라진 후작을 발견할 것이다.
니엘라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신 하나를 후작의 코트 안에 쑤셔 넣었다. 지켜보던 루테가 물었다.
“그건 뭐지?”
“유서입니다, 각하. 공녀님께서 이리하라고 명령하셨어요.”
니엘라가 목에 건 통신석을 들어 보였다. 작은 마석에서 카티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테의 안색이 금방 밝아졌다.
《후작의 유서에 오르겐 후작가의 빚을 로사리아 오르겐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을 명시해야 해. 유서가 없으면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에 진 빚은 유야무야될 테니까.》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은 황실이 직접 운영에 관여하는 공기관이었다. 황실에서 변제해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귀족들에게서 진 채무는 이야기가 달랐다.
《자칫하면 변제 의무를 동생인 나이락 오르겐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황후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어. 무조건 황후를 걸고넘어져야 해. 황후가 빚쟁이라는 걸 온 제국에 선전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기 위해서 제일 좋은 건 유서를 발표해서 채권자들의 귀에 들어가게끔 하는 거야.》
《채권, 차용증, 거래 계약서 같은 것들은 빠짐없이 모으고.》
“카티샤가 미리 네게 전달한 건가?”
“네. 바로 어제요.”
“누굴 닮아 그렇게 영특한지.”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방은, 하자품을 줄줄이 생산해 낸 곳이니 수색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오르겐 후작가로부터 인수했다고 발표하면 돼. 어차피 원래부터 후작가 명의로 된 게 아니니까 빚쟁이들이 건들진 못할 거야.》
《그럼 오르겐 후작 쪽은 이쯤이면 다 된 것 같네. 네 주정뱅이 아버지 나이락 오르겐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니엘라. 하지만 지금 나서면 안 되는 거 알지? 지금 오르겐의 사생아라고 나섰다간 너 유산으로 빚만 잔뜩 물려받는다?》
“착하기도 하지…….”
“…….”
《아, 그리고. 혹시 같이 듣고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면…….》
《후작이 뭐라고 씨불이든 들은 척도 하지 마세요, 아빠! 카티가 많이 사랑해요.》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경직해 있던 루테의 만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가 마석 너머의 딸과 대화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귓등으로 잘 흘렸어. 들을 가치가 없었지.”
살아 숨 쉬는 것이 더는 죄악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네가 나를 수렁에서 꺼내 주었잖아.
그러니 가슴에 깊은 웅덩이가 고인 채 살아가더라도 더는 그 속으로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