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루테는 숨을 고르게 가다듬은 뒤, 니엘라에게서 마석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아이는 카티샤가 4년 전에 거두었던 오르겐 후작가의 사생아였다.
“……니엘라.”
“예, 각하.”
“내 딸이 너를 믿는다곤 하지만, 네게 오르겐의 피가 절반이나 흐르는 이상 너는 내게 자격을 증명해야 할 거다.”
“걱정 마세요, 각하. 저는 공녀님의 체스 말이니까요. 수는 아가씨가 두시죠. 저는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고요.”
“카티가 다음 수를 두었나?”
“네. 퀸 앞으로.”
퀸이라.
루테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추켜 올라갔다. 역시 카티샤는 그의 마음을 잘 안다.
루테는 이만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날이 밝으면 후작의 사망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리라.
니엘라가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공녀님께서는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아르템으로 먼저 돌아가셨는지……?”
“카티는 내일 올 거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루테의 미간에 돌연 깊은 두 줄이 생겨났다. 이제껏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망각하고 있었다.
파르세네에 베르너와 카티샤에 더해, 그 아이도 남겨 두고 왔다는 걸.
“베르너가 함께 있으니 별일은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예?”
“사내새끼란 하나같이 속이 음험해서…….”
“공자님 말씀이십니까?”
“……아니. 하얗고 귀여운 그 말썽꾼.”
귀신같이 알아들은 니엘라가 입을 쩍 벌렸다. 그 신수가 돌아왔단 말이야? ― ‘귀여운’이라는 가당찮은 수식어는 알아서 걸러 들었다 ― 아니, 그보다. 아직 그들이 파르세네에 있다는 건…….
‘그러니까 지금, 내 공녀님을 그놈과 둘만 있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말이야?!’
니엘라가 기겁하는 사이, 루테는 나름대로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 아이, 오른손이…….’
검이 폭발하며 피보라가 튀었던 것을 상기하면 오른손의 부상이 상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멋대로인 성미는 알았지만 해도 하필 거기서, 카티가 보는 앞에서 제 손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을 건 또 뭐란 말인가? 물론 딴에는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수년 전 아버지가 지나가듯 흘린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나는 고놈도 참 걱정이다. 신수는 불완전함에 익숙해질 수가 없는 종족인데……. 일생 단 한 번도 다쳐 본 일이 없을 텐데, 어찌 적응하려 저러는지. 여신이 말한 그 ‘대가’라는 것도 영 찜찜하고…….]‘언제 한 번 그 아이를 불러다 제대로 살펴봐야겠군.’
명색이 사바나의 주인이 아닌가?
루테는 자신이 짐승을 살피는 일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신했다. 게다가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해 버린 딸애의 표정도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찌하고 있으려나.
루테는 못내 불길함을 떨치지 못한 채 공방을 나섰다.
* * *
그 시각, 파르세네.
베르너가 엄하게 손을 내밀었다.
“자, 손.”
“…….”
“얼른 이리 내. 착하지?”
강아지 어르는 듯한 말투에 곧장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베르너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면 될 거라고 하셨는데.”
눈높이를 맞추고,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참을성 있게 여러 번. 베르너는 눈앞에서 저를 있는 대로 쏘아보는 이를 덩치 큰 한 마리 개라고 상상하려 애썼다.
‘엄밀히 따지면 표범이지만.’
영예의 전당에서 나온 직후, 베르너는 막냇동생과 신수를 끌고 아스트로카 공관으로 돌아왔다.
본래라면 아버지와 함께 곧바로 이동국으로 가 텔레포트 진을 이용했겠지만, 손에서 피를 뚝뚝 떨구는 놈이 있어 응급 처치라도 하기 위해 공관으로 막 들어선 참이다.
“형님 무서운 사람 아니다. 자, 손 내야지, 아키.”
“꺼져.”
즉각 칼 같은 거절이 돌아왔다. 지금 제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조차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베르너는 어깨를 으쓱하며 옆자리를 향해 고갯짓했다.
‘눈치가 있으면 재깍 말 들어라, 요놈아.’
아이칼이 그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보았다가 흠칫했다. 카티샤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로.
두 청년 사이에 무언의 시선이 급박하게 오갔다.
‘카티 화났다.’
‘봤냐? 우리 애기 화났잖아.’
카티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한테 손 줘, 아이칼.”
언제 꺼지라는 망언을 내뱉었냐는 듯, 아이칼이 재빠르게 베르너의 손바닥에 제 손을 착 얹었다.
오러가 역류한 검이 결국 폭발할 때까지 쥐고 있던 탓에 그의 손은 손등이고 손바닥이고 할 것 없이 상처투성이였다.
부상을 살핀 베르너의 낯에서 장난기가 싹 걷혔다.
그는 아이칼의 팔뚝을 쥐고 소맷자락을 죽 밀어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막내는 보지 마. 나가 있을래?”
“아니요.”
“마가렛, 막내 데려가.”
“저 여기 있을 거예요.”
“안 돼.”
“왜?”
“첫째, 네가 볼 만한 모습이 아니고. 둘째, 치료하고 난 다음에 오빠가 아키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만 나가 있자, 카티.”
결국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카티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아주 그냥 잔뜩 화가 났다.
그럴 만도 했다. 이건 블라스코가 아이칼과 합의했던 사항이 아니니까.
“인마, 넌 어딜 가?”
베르너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카티샤를 따라가려는 아이칼의 목덜미를 턱 잡아챘다.
“넌 치료 겸 면담이다, 파수꾼.”
그깟 하자품의 폭발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꼴이라는 건 일부러 의도했다는 뜻밖에는 되지 않는다.
“일단, 좀 참아라, 아가야.”
대충 피딱지를 닦아 낸 베르너가 환부 위로 소독약을 부었다. 화상을 입어 살갗이 벗겨지고 검날에 베여 속살을 드러낸 환부에 기포가 톡톡 올라오기 시작했다.
베르너는 흘끗 아이칼을 눈으로 살폈다. 머릿속으로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말을 찬찬히 되짚고 있었다.
“이클라스족의 신수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재생의 권능 덕분에 통증을 오래 느낄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아닐 테니까. 상처를 입었을 때 인간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법은 모를 거다. 이스마가 그것까지 가르칠 수는 없었을 테니.”
그러나 아이칼은 미간이 살짝 좁아져 있을 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참는 건가?’
그럼 참을 줄 안다는 건데.
베르너는 환부가 완전히 지혈된 것을 확인한 뒤 두 번째 포션을 부었다.
“이런 회복제를 아무리 들이부어도 낫는 속도는 느릴 거야. 네가 가진, 아니, 가졌던 권능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이 속도에 익숙해져.”
“익숙하진 않아도 알고는 있어.”
“어떻게?”
“올해 들어 이것저것 실험해 봤으니까.”
베르너가 인상을 구겼다. 뭘 실험해 봤다는 거야?
‘설마……?’
아이칼이 너덜너덜해진 손바닥을 들여다보곤 곁에 놓여 있던 붕대를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도 쉽게 붕대를 감는 폼이 능숙했다.
“권능이 없어도 이 정도 부상이 오래가진 않을 거야. 반은 짐승이라 그런가, 회복력은 좋던데.”
“…….”
“이깟 걸로 호들갑 떨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 말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베르너의 얼굴이 이번에는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혹시 미친놈인가?
“혹시 너 뭐 고통을 즐기는…… 그런 쪽이냐?”
아이칼이 대답 대신 베르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보다 더 한심스러운 것을 못 보았다는 듯 딱하기까지 한 시선이다.
울컥한 베르너가 쏘아붙였다.
“그럼 왜 굳이 그런 걸 직접 시험해 본 건데?”
“알아야 내가 여전히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게 된 것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
“…….”
“그래야 카티에게 뭘 얼마만큼 해 줄 수 있는지도 윤곽이 잡히고.”
이렇게 대답하면 질책할 말이 또 쏙 들어간다. 막내를 위해서라는데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고.
아버지와 할아버님의 영령으로부터 대강 듣기로는 카티샤가 무사히 블라스코로 올 수 있었던 데에 이놈의 공도 상당하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 아가를 넘겨주어야 하는가……?’
베르너가 착잡한 한숨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거야 나중 일이라 치더라도.
“너, 그 말 카티 앞에서는 하지 마라. 그 오른손이랑, 몸에 상처나 흉터……가 남아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보여 주지 마. 방금 했던 이야기도 입도 뻥끗하지 마.”
“……?”
“애 울리지 말라고.”
“내가 아닌 다른 이유로는 울게 두지 않아.”
베르너는 다시금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유로는? 그럼 저 때문에 우는 건 괜찮다는 거야, 뭐야?’
아무래도 후자 같았다. 눈앞의 신수가 갑자기 달리 보였다.
‘설마, 성향이 그런 가학적인 쪽이라든가……!’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역시 어떤 정상 참작 사유를 대든 저놈은 유죄다.
베르너는 엄중하게 도둑놈의 어깨를 턱 붙들었다.
“야. 나는 반대다.”
“응, 그래.”
도둑놈의 새끼는 그 말만 띡 내뱉곤 모습을 바꿨다.
위협적인 크기의 눈표범이 꼬리를 유유히 휘저으며 복도로 나갔고, 베르너의 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붕 떴다.
“…….”
베르너가 한 박자 늦게 주먹을 말아 쥐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난, 반대야.”
나는 절대 반대다. 절대 반대야. 뭘 반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반대한다. 저놈과 카티샤에 관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뭐든 반대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