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 * *
나는 화가 났다.
그런데 화만 난 것은 또 아닌 듯했다.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안간힘을 써서 참는 중이다.
“세상에, 아가씨! 얼른 이리 오셔요. 누가 우리 아가씨를 이렇게 울렸을까?”
그 와중에 마가렛이 반강제로 욕실로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세수까지 했다. 욕실 거울을 보고 내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걸 안 건 덤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달랜 마가렛이 나를 침대로 들여보냈다.
“내일 새벽 일찍 아르템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세요. 일찍 깨워 드리러 올 테니 푹 주무세요. 아셨죠?”
“으응.”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한 뒤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지금쯤 오르겐 후작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니엘라에게 전언을 담은 마석까지 넘기고 왔으니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겠지.
아빠와 언니가 갔으니 염려할 건 없었다. 이제 문제는 심란하다 못해 폭풍우 치듯 울렁거리는 내 마음이다.
연회장의 허공에 핏방울이 흩뿌려지던 순간이 망막에 잔상처럼 들러붙어 떠나질 않았다.
침실 문이 열린 건 밤이 깊었을 때였다.
소리를 죽일 생각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일어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이불을 젖히고 부드럽게 파고들어 왔다. 뒤이어 침대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허락도 없이 무도하게 내 침대로 올라온 아이칼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카티, 화났어?”
“……저리 가.”
나는 그를 밀치며 이불을 더 꽁꽁 몸에 말았다. 귀엽다는 듯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내 뺨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아.’
살갗끼리 닿는 감촉이 아니다. 아이칼이 손을 움직이자 붕대의 거친 천이 볼과 목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손. 저놈의 손!
나는 이불을 홱 젖히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이칼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렸지만 무시했다.
“왜 그랬어?”
“뭐가?”
“왜 안 놓았냐고, 그 검! 끝까지 계속 잡고 있었잖아.”
“아아.”
아이칼이 대수롭지 않은 감탄사를 흘리며 벌렸던 팔을 내렸다.
오른손을 감싼 붕대 아래에 핏기가 살짝 비친 것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겼다.
“내가 분명히, 그게 폭발할 거니까 미리 손에서 놓으라고 당부했는데. 왜……!”
“인간들은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으니까. 덕분에 효과가 좋았잖아.”
아이칼이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살짝 웃는데, 나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신수에게도 상처를 입힐 만큼 위험한 물건이라는 걸 강조해 후작이 빼도 박도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겠지. 덕분에 시각적으로 무척이나 훌륭한 연출이 이뤄졌다.
“……그래, 그런데.”
“응?”
“그래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하지 말랬는데 네 멋대로 한 거야?”
“…….”
“사람들은 눈으로 봐야만 믿는다고? 그걸 내가 몰라서 하지 말라고 한 줄 알아? 네가 다치니까 손 떼라고 한 거잖아.”
“아, 별로 상관없어.”
“상관이 없다고?”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아이칼이 의아한 기색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파르세네 축하연이 카티에게는 중요한 기회였잖아.”
“연회장에서 얼마나 대단한 장면이 연출되든, 그게 네 손보다 중요하진 않았어.”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손은 아니야.”
“내겐 있어! 네겐 없을지 몰라도, 내겐 있다고!”
“왜?”
“다치면, 아프잖아. 그리고 넌 이제 이런 상처 단번에 낫게 하지도 못하잖아!”
“그다지 안 아파.”
그럴 리가 있냐! 네가 무슨 무통 인간도 아니고. 손이 너덜너덜 넝마가 됐는데!
복장이 터졌다. 아이칼의 이런 곧이곧대로 화법에 답답함을 느끼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어진 말이 불러온 충격에 비하면 약과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아이칼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정말이야. 경험상 이 정도는 일주일이면 깨끗이 사라져.”
나는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누가 불시에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친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경험상?
“일주일이면 사라진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상처를 일주일씩 가지고 있었던 적이 어디 있다고…….”
당황스럽게 중얼거리다 퍼뜩 깨달았다.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최근에 다친 적이 있었어?”
“…….”
꼬박꼬박 대꾸하던 아이칼이 이번에는 침묵을 택했다.
“왜 대답 안…….”
문득 무서운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아이칼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을 숨기기는 할지언정 나를 속이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그걸 거꾸로 돌리면, 지금 이 침묵은.
“……너 이리 와 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아이칼이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이번만큼은 내가 더 빨랐다.
그의 얇은 옷자락을 쥐고 위로 확 들추었다. 굴곡진 근육이 빼곡히 들어찬 복근이 절반쯤 드러났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해 보이는 근육 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열상 흉터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아이칼은 짧게 혀를 찼다.
흉터를 가리키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거, 뭐야? 설명해.”
“……확인차 북해에 내려갔었어. 이렐 반도에서.”
“그, 마물이 들끓는다는? 하지만.”
거기에 너를 이 꼴로 만들 만한 마물이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아이칼이 회수당한 건 신의 권능이지, 이클라스족의 신수가 가지는 능력이 아니었다.
아이칼이 고개를 흔들었다.
“확인차, 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데?”
“권능이 얼마나, 어디까지 소실됐는지 자세히 알아야 했어. 그래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점검해 봤을 뿐이야.”
“그래서 일부러 부상을 당해 봤다고?”
그 뜻이야, 지금?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결코 상처라는 귀여운 단어로 표현할 만한 흉터가 아니었다. 이딴 걸 몸에 내 놓고, 치유 능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재 봤단 소리가 아닌가?
그걸 지금, 내 앞에서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가 낸 건 아냐. 북해에서 적당히 확인만 하고 바로 죽였……”
“또 있어?”
나는 아이칼의 헛소리를 끊어 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충격이 극심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건가. 눈물 대신 스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갔다.
“벗어.”
“뭐?”
“벗으라고. 이딴 짓을 대체 몇 번이나 해 놓은 건지, 내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그의 웃옷 자락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어 위로 젖혀버렸다. 그 시도는 아이칼이 가까스로 내 손을 낚아채며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대로 관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카티샤, 잠깐만.”
“너도 나한테 다 보여 준다고 했잖아……!”
“그게 이런 뜻은 아니었…….”
처음으로 아이칼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침대 위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벗기려는 쪽과 벗지 않으려는 쪽의 팽팽한 대립이었다.
몇 분간 옥신각신한 끝에, 나는 그를 반쯤 깔아뭉개듯 허벅지 위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늘어나기 일보직전인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빨리 벗어.”
“벗겨서 대체 뭘 보겠다는 거야. 아무것도 없어.”
“그거야 내가 판단하는 거고. 내가 하는 게 싫으면 네가 해. 난 지금 당장, 반드시 확인해야겠으니까.”
“……후.”
아이칼이 무의식적으로 내 손목을 세게 감쌌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다른 손을 웃옷 아래로 집어넣자, 그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곤혹이 체념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겠어. 놔 봐.”
결국 아이칼이 내 손을 가볍게 떼어 냈다.
손등이 하얗게 되도록 옷자락을 쥐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손이 달랑 들렸다. 가슴팍 언저리까지 파고 들어 여기저기 더듬던 왼손도 붙잡혀 나왔다.
그대로 나를 밀어낸 아이칼이 목깃 아래의 끈을 죽 당겨 풀어냈다. 그리고 스스로 웃옷을 벗었다.
골격과 근육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짜인 상체가 가리는 것 없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가 웃옷을 침대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시선이 애매하게 나를 비껴간다.
“됐지?”
“…….”
되긴 뭐가 돼.
그 말은 하지도 못하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깻죽지에 길게 찢어진 열상이 하나, 왼쪽 갈비뼈 부근에 자상 흉터가 하나. 오른쪽 복사근 쪽에 또 하나.
떨리는 손끝으로 복부의 흉터를 겨우 더듬자 아이칼이 움찔했다.
덩달아 나도 화들짝 놀랐다.
“아, 아파……?”
“……아니.”
그러나 이미 내 안에서 그를 향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냥 다 기가 막혔다. 확인차 가볍게 몇 번 다쳐 봤어, 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 놈도 이해가 안 가고, 그 꼴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은 이스마 아저씨도 기가 찼다.
“너, 넌…… 진짜……. 구제 불능이야.”
눈앞이 뿌옇게 물들었다. 이제야 눈물샘이 다시 제 역할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다 나은 부상이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나는 오늘 알게 된 일련의 사실들로 아이칼의 사고 회로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다. 그 오류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들까지.
이 자식에게 똑바로 확인받아야 할 것이 생겼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