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나는 거칠게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너 말이야. 만약에, 내가 또다시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치면……”
“뭐?”
허공을 배회하던 아이칼의 눈동자가 대번 내게로 돌아왔다. 도통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없는 얼굴이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사납게 찌푸려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과거와 똑같이 할 거야?”
아이칼이 내 의중을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럼?”
“같은 방법으론 안 되겠지. 이미 한 번 썼으니 효력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 같은데.”
“또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응.”
그 단답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제발 망설이기라도 해, 아키.”
“망설일 이유가 없는 일에 왜 고민을 해야 하지?”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엇나가고 있었다. 보는 시야각이 완전히 달랐다.
아이칼이 문득 입을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모은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카티샤, 뭐가 문제야?”
“……네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문제야. 대체 왜 그렇게 몸을 막 굴리는 거야?”
“막 굴렸다고?”
“내 기준에선 그래! 난 네가 다치는 게 싫어. 아픈 게 싫어.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싫다고!”
“왜?”
“너를 좋아하니까!”
참지 못하고 버럭 외치자, 아이칼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반면 나는 이제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길게 설명을 거쳐야 납득할 수 있는 일인가?
“내겐 네가 나보다 더 소중한데, 너는 너 자신을 그따위로 취급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넌, 너는…….”
로켓 속에서 읽었던 예언이 자꾸만 머리를 두드렸다.
[하나를 구하고자 억천만의 피조물을 버리는구나.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대가. 내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음으로써 아이칼이 치러야 하는 그 대가. 절대자가 내린다는 뭔지도 모를 그거.
나는 항상 그게 무서웠다. 곱씹을수록 두려워서 일부러 뇌리에서 몰아낸 적도 여러 번이다.
혹시 나 때문에 그가 잘못되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생각보다 크기라도 하면.
단순히 권능이나 수명뿐만이 아니라 더 커다란 걸 앗아 가기라도 하면?
아이칼이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면.
오늘 벌어진 일은 그간 켜켜이 쌓여 왔던 내 불안감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목소리가 까슬하게 갈라졌다.
“네가 더는 나 때문에 희생하고 버리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
“난 희생한 적이 없어.”
“내게는 그렇게 느껴져.”
“그렇다면 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지.”
대화는 끝없는 도돌이표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냥 기절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데?”
“널 필요로 했던 건 나야.”
“…….”
“네가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 버려서.”
아주 먼 과거의 일이다. 어느새 글자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나의 기억이 된 날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내가 내 이름도 모르고 가진 육신도 없었던 때 소년과 눈밭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애초에 그때 난 죽은 혼령이었다고. 언제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았어.”
“그렇지. 그걸로 널 탓하려는 건 아냐. 단지 난 네가 떠난 뒤에도 네가 필요했을 뿐이고. 그래서 방법을 찾았고, 결국 너를.”
“…….”
“다시 찾아왔지.”
아이칼이 이렇게까지 말을 길게 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생각을 가다듬는 듯, 그의 눈이 깊어졌다.
“그건 나를 위한 거지, 너를 위한 건 아니었어.”
“…….”
“네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는지는 내겐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든.”
“…….”
“그러니 사전적인 의미의 희생과는 결이 다른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화가 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칼에게 이렇게까지 화가 났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매섭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서 앞으로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넌 내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네 멋대로 하겠다 이거야?”
“필요하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즉답이었다. 아이칼은 내게 져 주지 않았다.
“내 말은, 내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고려하지 않겠다? 내가 전혀 고맙지 않다고 해도?”
“네게 고마움을 사려고 하는 일들이 아닌데 그걸 왜 고려해야 하지?”
“그래서 나는 그냥 네가 다치건 말건 보고만 있어라?”
“굳이 그렇게 표현하겠다면 그렇게 되겠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이 정도의 부상은 내겐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까.”
“넌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야? 내 생각은 전혀 안 해?”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일에 네 생각은 안 하냐고 화를 내면 어떻게 해?”
아이칼은 이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도 점차 답답해지는지, 목소리가 차츰 딱딱해지고 있었다.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카티, 애초에 인간의 평균치에도 못 미칠 만큼 약한 건 너야. 내가 아니라.”
“…….”
“달마다 아파야 하고, 피나 흘려야 하고, 고작 이 정도의 냉기도 못 견뎌서 달달 떠는 건 너라고.”
“…….”
“4년이 더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아니지.”
“……아이칼.”
“우리 중에 더 걱정을 사는 쪽은 너야.”
말문이 막혔다.
아이칼은 차분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그런데 나더러 네가 죽어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게다가 왜 네가 내게 화를 내? 너라고 딱히 내 말을 듣는 것도 아니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마귀.”
눈 깜빡할 사이에 아이칼이 내 손을 쥐고 치켜들었다.
아이칼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몸에서 흘러나온 주황색 오러가 휘감겼다. 이전보다 훨씬 맑고 투명했지만 군데군데 작은 점처럼 검은 마기가 얼룩져 있었다.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다 정화된 게 아니었나?’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친 아이칼이 허락도 없이 내 안으로 제 오러를 쑤셔 넣었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으며 소름이 돋았다.
‘아읏, 차, 차갑…….’
그것 보라는 듯, 아이칼이 실소했다.
“나도 할 말은 많아. 하지 않는 거야. 어차피 네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걸 아니까.”
“…….”
“그러니 너도 내가 어떻게 굴건 이해해. 이해가 가지 않으면 그냥 받아들여. 나처럼.”
“…….”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아까부터 죽 이 말을 하고 있었어.”
이건 평행선인 걸까. 아니면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서 있나?
아니다. 아이칼과 나는 그저 서로 고집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이 똥고집.”
“너야말로.”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 그게 낫겠어.”
“그래? 그럼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정말 나랑 싸우자는 거야?”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너야, 카티샤.”
“이제 한마디도 안 지겠다 이거지? 내 순딩이 아키는 대체 누가 잡아먹은 거야?”
“네가 이렇게 들쑤시지만 않으면 난 착하게 굴어.”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팽팽하고 의미 없는 공방만 이어졌다.
“……됐어. 그만하자.”
나는 이를 갈며 아이칼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왔다. 이대로 얼굴을 보고 계속 이야기했다간 정말 크게 싸울 게 뻔했다.
그에게서 비켜나고 나서야 그가 아직도 상의를 벗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몸에 난 흉터가 보기 싫어서 이불자락을 팩 내던졌다.
“옷이나 입어, 이 멍청아.”
“너나 입어. 입으나마나 한 그런 거 말고, 제대로 된 잠옷 없어?”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끝까지 내 속을 뒤집겠다 이거야?
“내가 뭘 입고 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개인플레이 하자며!”
“개인플…… 뭐?”
“시끄러, 신경 꺼. 나한테 말 걸지 마!”
그렇게 빽 외친 뒤 이불 속으로 머리를 쑤셔 넣었다.
몇 초간의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불 밖에서는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화를 다스리기를 또 몇 분. 뒤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로 잘래?”
“뭐?”
나는 그 대목에서 정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이불 속으로 숨은 게 무색하게도 다시 이불을 홱 걷었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가지 마! 여기 있어!”
나도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는 냈지만, 짜증 나서 꼴 보기도 싫지만, 그래도 아주 가라는 건 아니었단 말이야.
아이칼은 어느새 다시 고요해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꼬박꼬박 돌아오던 말대꾸가 없으니 덜컥 불안해졌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정말 가 버릴 것 같아서, 급히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2000골드, 너 그거 다 까려면 아직도 멀었어. 주인님이 있으라고 하면 있는 거야, 그냥. 왜 자꾸 속상하게…….”
“알겠어.”
아이칼이 내 말을 끊으며 침대에 몸을 들였다. 허리를 끌어당겨 나를 제 품 안에 넣어 버리곤 모로 누웠다. 이불까지 푹 당겨 내 머리를 덮어 버렸다.
“자자.”
“누, 누가 이렇게 자자고…….”
“얼굴도 보기 싫어? 그래, 그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아이칼이 손쉽게 나를 옆으로 굴렸다.
도로록 한 바퀴 구른 나는 그에게 뒤에서 안긴 자세가 되었다. 황당하게 눈만 깜빡거리는데,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됐지?”
“…….”
“이제 그만 자. 나 너랑 다시 만난 지 하루 만에 싸우기 싫다.”
그렇다기엔 이미 충분히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는데.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의지를 피력하듯, 아이칼이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려 버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등 뒤에서 닿아 오는 그의 체온에 말문이 막혔다. 맨살갗에서 딱 적당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온기…….’
아이칼의 몸속에서 오러가 일정하게, 쉬지 않고 잔잔히 소용돌이친다. 전혀, 하나도 춥지 않았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가린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완벽한 내 패배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