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 * *
수도 펠라임의 황성에는 이른 시각부터 암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어젯밤 황제와 황후가 파르세네 검술제에서 돌아온 직후 날아든 비보에 황후가 혼절하고 만 탓이다.
그 비보란 이러했다.
지난 새벽, 오르겐 후작이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펠라임 외곽에 있는 에이슬라 공방에서 끊겨 있었다. 그곳에 남은 폭발의 흔적이 파르세네의 영예의 전당에서 일어난 폭발과 비슷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후작이 그가 제작한 마공학 무기를 직접 시험해 보다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가설이 유력했다.
더는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유서를 쓴 다음 자결했다……. 그것이 현장으로 달려갔던 치안대와 황실 기사들이 가져온 보고다.
현장에는 타살로 보이는 증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로사리아는 확신했다.
“죽인 거야.”
까득, 까드득. 그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손톱을 물어뜯었다.
“죽인 거야. 루테가, 아버지를…….”
“오늘 밤, 당신들 셋 중 누군가는 무사히 펠라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누가 될까? 가장 먼저 처리되는 건.”
첫 타깃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그다음은 누굴까?”
저를 똑바로 쏘아보던 새파란 두 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로사리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음은 나야.’
아비를 잃은 슬픔보다 죽음의 공포가 사고를 마비시켰다.
언제 어디서 그자가 숨통을 조여 올지 모른다. 한때 자신을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빠뜨렸던 자가, 이제는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로사리아는 체면도 잊고 소파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로사.”
“……페르테스.”
로사리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가 처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곧장 그녀에게 다가온 황제가 두 팔 벌려 그녀를 안았다.
“소식은 들었어. 후작의 비보는 유감이야.”
“그자가 죽인 거예요, 페르테스.”
로사리아가 숨을 헉헉대며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
“당신도 그날 봤죠? 그…… 그자의 얼굴을요.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자가 살아 있었단 걸…….”
“로사, 내 사랑. 지금 지나치게 흥분했어.”
“루테가 살아 있다고요! 아버지를 죽이고, 오르겐을 파멸시키고. 다, 다음은 나를…….”
“로사리아.”
경련을 일으키기 직전인 그녀와 달리 황제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다정한 미소를 건 그가 조곤조곤 말했다.
“황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약조하지.”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거기 제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들었어요.”
유서의 진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유서에 명시된 내용이다. 황실이 오르겐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것. 그 내용이 채권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채권자들은 귀족이다. 오르겐의 거래처였던 레바토 후작가, 일리아스 변경백, 벨리가 자작가를 비롯한 숱한 귀족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중 레바토 후작가는 7귀족회에 속한 대귀족이다. 레바토와 블라스코가 귀족회에 오르겐 후작가와 황실의 사기극이라는 안건을 올리면, 그 불똥은 고스란히 황후인 자신에게로 튈 것이 뻔했다. 로사리아는 황실과 오르겐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나이락 오르겐이 후작 작위를 이을 거고, 후작의 유서는 그의 선에서 적당히 덮을 수 있도록 조처해 놓았어. 아스트로카의 황후가 그런 불명예를 뒤집어쓸 수야 있나?”
“이미 사람들은 황실과 오르겐을 한 몸처럼 생각해요.”
“꼬리야 자르면 그만이지.”
“오르겐을…… 버리겠다는 말인가요?”
로사리아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페르테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냉랭하게 다문 그의 입매는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엄중함을 풍겼다.
로사리아의 동생이자 오르겐 후작가의 후계자인 나이락은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그에겐 아이도 없으니 장차 방계 쪽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할 텐데, 파산한 후작가의 대를 잇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돈이 없어도 재기를 꿈꾸려면 신용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오르겐 후작가의 신용은 파르세네라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바닥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이제는 절대적인 아군이라 믿었던 아스트로카 황실까지 오르겐을 등질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이 와해됐다. 그리고 유일한 믿을 구석인 남편은 더 이상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그럼 내 아버지의 명예는? 내 가문의 위신은……?’
황망해져 우두커니 선 로사리아를 황제가 꿀 바른 목소리로 달래었다.
“로사, 이건 내 뜻에 따라 줘야 해. 당신을 빚쟁이로 만들고 황권을 추락시킬 수는 없잖아. 응? 당신 아버지는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도록 해. 감히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무기를 팔아먹다니, 그것도 타국으로…….”
“내 아버지만 죄인인가요?”
“뭐?”
로사리아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이 번들거리는 그녀의 눈에 원망과 경멸이 그득했다.
로사리아가 악을 쓰듯 외쳤다.
“루티어드 블라스코를 죽인 건 당신이잖아. 아버지가 아니잖아!”
“로사.”
“당신이, 그 추악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루테를 죽여 버리겠다고 날뛰었잖아. 아버진 그걸 지켜본 죄밖에 없잖아……!”
“로사, 로사. 내 사랑. 잊었어?”
황제가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몸부림치는 로사리아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페르테스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말도 안 되는……”
“내게 그를 죽여 달라고 했잖아. 그놈의 약혼녀도, 그 여자가 배고 있던 애도.”
눈물이 가득 고인 로사리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먼 과거, 그녀가 제 입으로 내뱉었던 말들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냥 죽여 버려요, 페르테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나아.”
20년 전,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던 그녀의 죄가 이제야 먼 길을 지나 되돌아오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로사리아를 페르테스가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걱정 마. 너 하나는 그놈의 마수에서 반드시 구해 줄 테니. 당신만 나를 사랑한다면 말이야.”
“…….”
“설마 놈이 돌아왔다고 흔들리는 건 아니지?”
로사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가까스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미친 남자는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테스, 당신은 몰라. 그 남자가 어떤 눈으로 날 봤는지.’
루테 블라스코는 추격자였고, 살육자였고, 동시에 심판자였다. 젊은 사랑과 청춘의 열정은 루티어드 블라스코가 죽은 그날 죽은 꽃처럼 바스라졌다.
까딱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생겼는데.
“사랑한다고 말해, 로사.”
“…….”
“껍데기라도 좋으니.”
남편이라는 자는 이런 속없는 사랑 구걸이나 하고 있다니.
로사리아는 그의 품속에서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황제다.
“……프리츠도 지켜 줘야 해요. 그 아이야말로 아무런 죄도……”
맥없이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무심코 문가로 고개를 돌린 로사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언제부터였을까. 황태자가 문 너머에 우두커니 얼어붙어 있었다.
* * *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프리츠.”
프리츠는 꽉 쥔 두 주먹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묵묵히 바닥만 응시했다. 한 시간 전 조부의 부고를 전해 듣고 한달음에 황후궁으로 달려온 그였다. 그러나 채 모친의 처소에 들어서기도 전에 경악스러운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프리츠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혼절 직전인 로사리아는 이미 침실로 옮겨졌고, 지금 눈앞에 남은 이는 아버지뿐이었다.
늘 품위를 지키던 어머니가 이성을 잃고 악을 쓰는데도 아버지는 소름 끼치도록 태연했다. 지금도, 찻잔을 들고 차 향을 음미하는 그의 얼굴은 여상하기만 할 뿐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프리츠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정말, 아버지가 죽이셨습니까?”
“무얼?”
“블라스코 공작 말입니다. 두 분께서 말씀 나누시는 것을 전부 들었습니다.”
프리츠가 아는 현 공작의 이름은 ‘루티어드’였다. ‘루테’가 아니라.
그러나 부모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이름은 전부 루테였다. 둘은 쌍둥이였다. 어렵지 않게 현 상황이 그려졌다.
페르테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습니까?”
프리츠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는 공작이다. 아무리 황실과 블라스코의 사이가 최악이라고는 하나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셨을까?
프리츠는 믿기 싫은 가정을 가까스로 입 밖에 냈다.
“어머니가…… 그분을 사랑하셨던 겁니까?”
“놈에게 존칭을 쓰지 마라, 프리츠.”
시가에 불을 붙이던 페르테스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꾸였으나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알아채지 못하기가 더 어려웠다. 프리츠의 얼굴이 허탈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비정상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익히 알았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그것도, 그의 약혼자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까지…….
차라리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망연하지는 않았으리라.
충격 어린 아들의 얼굴을 흘끗 일별한 페르테스가 마뜩찮게 혀를 찼다.
“결론적으로는 죽이지 못한 게 맞겠지. 루테 블라스코도, 그놈의 딸도 지금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으니.”
“……딸이라 하시면 막내 공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친딸이 아니고서야 놈이 그리 곁에 끼고 살 리가 없으니까.”
세상이 또 한 번 아찔하게 돌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