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아키는 내 건데.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는 다른 여자랑 그러면 안 되는 게 맞는 거다.
나는 아무렇게나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래, 2000골드. 그거 다 까려면 아직도 멀었어. 심지어 지난 4년은 호위 기사 직무 유기잖아.
“…….”
그래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마가렛과 카렌이 양옆에서 열심히 거품을 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솔직히, 그가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야……. 아가씨를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보증만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는 또 없죠.”
“이 이야기는 니엘라에게는 비밀이에요. 걘 아이칼의 아 자만 나와도 눈부터 부라리더라.”
“하지만 그만한 놈 찾기도 어려워. 우리 아가씨 정도는 백 명도 거뜬히 지킬 수 있을 만큼 실력도 출중하고.”
“……?”
그런데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가 미묘했다.
“저기, 잠깐만.”
“그리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무엇보다 우리 아가씨랑 정말 잘 어울리잖아. 아휴, 참 잘 커 가지곤…….”
“사실 그런 신랑감을 또 어디서 구하겠어요? 여러모로 블라스코에 딱이다, 정말.”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난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다.
방금 오간 대화를 머릿속에서 한차례 복기하고 난 다음에야 물속에서 첨벙 상체를 일으켰다.
“둘 다 무슨 소리야, 정말!”
얼굴에 화악 열이 올랐다.
나는 시선 둘 곳을 모르고 방황하며 더듬더듬 반박했다.
“시, 신…….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언니들이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김칫국도 정도껏이지!
그러나 마가렛과 카렌은 외려 저들이 동그랗게 토끼 눈을 떴다.
“무슨 소리라니요, 아가씨?”
“신랑…… 어쩌고 말이야. 이상한 말들 하지 마……!”
“네에? 설마, 아가씨.”
마가렛이 당장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달리 마음에 둔 영식이 있으셔요?”
“……갑자기 왜 그런 쪽으로 튀어?”
지금 내 동공은 틀림없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구 떨리고 있을 것이다.
카렌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아가씨, 그 신수가 아니면 누구랑 성혼을 하시게요?”
“아……?”
벌어진 입술에선 멍청한 소리만 흘러 나갔다. 대화의 흐름은 이미 손쓸 수 없이 나를 앞질러 가 있었다.
“우리 아가씨를 9년 동안 모셔 왔지만 달리 마음에 둔 분이 있으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희에게만 살짝 말씀해 주세요.”
“그, 그런 거 없어. 다른 누가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역시 그렇죠? 아마 있어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아키가 진작 없애 놓았을 테니.”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인 것 같은데.
이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걔랑 결혼을 어떻게 해? 그런 건 정인이랑 하는 거야.”
“네에, 아가씨. 그럼요. 하지만 가끔은 그 둘이 동의어일 때도 있답니다. 이성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건 순식간이죠. 물론 아가씨께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물론 난 아니야. 이성이라니. 아키가 무슨 남자야? 걘 그냥 내…….”
내…… 친구인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마가렛과 카렌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이 돌연 무척 기묘한 말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마가렛이 어깨를 으쓱했다.
“으음, 여자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
그렇지. 남자기는 하구나.
나는 마치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멍청해졌다.
내가 그를 거의 무성처럼 대한다고 해서 아이칼이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깨닫고 나니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것들이 갑자기 자연스러워졌다.
‘걔가 아니면 누구랑 성혼할 거냐고?’
그야 성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아이칼과 하게 되겠지. 물론 최근에는 말도 안 섞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내 옆자리는 언제나 그의 것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 중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이칼이 유일했다. 그러니 뭐, 언젠가 때가 온다면 당연히…….
‘아?’
그렇게 무심코 수긍해 버린 뒤에야 나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건 뭔가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왜 내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지?
내 안의 삐뚤어진 내가 입을 뚜하니 내밀었다.
‘왜, 뭐! 살다 보면 더 훌륭한 남편감이 나타날 수도 있지.’
걔처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데다 벽창호인 인외 존재가 아니라, 세간에서 말하는 다정하고 묵묵한 그런, 그런…….
나는 머릿속으로 내 옆자리에서 아이칼을 치우고 얼굴 없는 다른 남자를 앉혀 보았다. 그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가, 소름 끼치는 어색함과 불편함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상상 속에서 아이칼을 도로 내 옆에 앉혀 놓으니 그제야 평온이 찾아왔다.
상상 속에서 내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이칼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럼 그 이상은?
머릿속 장면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잠깐 사이에 목덜미까지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아무래도 물이 너무 뜨겁고 공기가 습하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욕조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이제 그만 나갈래. 여기 있으니까 이상한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어머나아.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잠시만요, 아가씨. 수건 가져올게요.”
애초에 이 고민은 가장 근본이 되는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나는 내 몸에 커다란 수건을 둘러 주는 마가렛에게 딱 잘라 선언했다.
“난 아직 누구와도 성혼할 생각이 없어. 난 아버지랑 언니오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 거야. 한 10년쯤.”
“으음, 10년이든 20년이든, 언젠가 성혼을 하셔야 하는 때가 되면 아키와 하실 거지요?”
“그런 날이 온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결혼 생각이 없다는 게 중요하다니까! 나 아직 성년도 아니고…….”
“어머, 열흘 뒤면 4월이에요, 아가씨. 얼마 안 남았는데?”
“……왜 그렇게 웃어?”
“저희가 뭘요?”
“뭔가 음흉하잖아, 지금.”
“설마요. 자, 아가씨.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고요.”
왜 내 시녀 언니들이 하루가 다르게 능글맞아지는 것만 같지?
나는 그들을 의심스럽게 흘겨보며 욕실을 나왔다. 막 걸음을 떼는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
이마를 짚고 어지럼증이 가실 때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가렛과 카렌이 괜찮으냐며 묻는 소리가 이명이 되어 아스라이 메아리쳤다.
‘또 이러네.’
요즘 들어 갑자기 몸을 일으키거나 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바뀔 때마다 짧은 빈혈이 찾아오곤 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어지러우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눈동자에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또렷하지 않았다. 눈을 비비는 척하며 마가렛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았지만, 그 뒤로도 어지럼증은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지금 쓰러지면 낭패다. 마가렛과 카렌이 당장 아버지께 뛰어갈 게 뻔했다. 아키가 알면 당장 로켓을 뺏으려 들 거고.
게다가 슬슬 수도에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됐다. 오르겐 후작의 죽음으로 수도에 불을 붙여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나는 루시스 경을 방으로 불렀다.
“펠라임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에게 대자보를 만들어 수도 곳곳에 붙이라고 전해. 들어갈 내용은, 황후의 폐위를 촉구한다.”
“황후의 폐위를요?”
“응.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 한복판이면 더 좋아. 황실 기사들이 떼어 내도 계속 붙여. 소문이 수도 전체로 퍼질 때까지.”
황후가 외척과 함께 무기 사업으로 사기극을 찍다 들통났다는 사실을 수도 전역에 널리널리 퍼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후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이 짙어질수록 황제도 마냥 침묵하기만은 어려울 테니.
“이 일에 제국민의 혈세 수십억 골드가 들어갔다는 사실도 꼭 넣도록 해. 그러느라 정작 필요한 곳에 쓸 예산이 없어서 세금을 더 걷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야 사람들이 내 일처럼 분노할 거야. 아, 아스트로카가 대륙 서부 분쟁 국가들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도 포함하면 좋겠네.”
“잠시만요, 아가씨. 적고 있습니다.”
루시스 경의 깃펜이 날아갈 듯 움직였다.
나는 눈을 제대로 뜨기 위해 노력하며 웅얼거렸다.
“음…… 그리고 끝에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던 황제와 황후 사이에 얽힌 진실’, 이 구절도 덧붙이는 게 좋겠다.”
“사이에…… 얽힌, 진실……. 블라스코에 관한 이야기는 쓰지 않아도 될까요?”
“블라스코 이야긴 쓰지 마. 평민들에겐 검술 명가라는 인식보다 악당 집합소라는 인식이 훨씬 강해. 역효과야.”
“예, 알겠습니다. 이대로 적어 붙이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그런데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괜찮으십니까?”
“목욕을 좀 오래 했나 봐. 걱정 마.”
루시스 경이 악필로 빼곡하게 채운 종이를 들고 나가자마자, 나는 솜 인형처럼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어지러워…….’
쉬자.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다.
잠결에 누군가 나를 안아 올리는 느낌이 났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상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실 구태여 눈을 뜰 필요도 없었다.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너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티.”
나직하게 뇌까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그 품을 꿈질꿈질 파고들었고, 그제야 한결 편안한 수마가 찾아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