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
18화
* * *
‘아싸, 서면 계약 긍정적 검토.’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르닌의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새, 생각해 볼게.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돌아가.”
아르닌은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진땀을 빼는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확신할 수 있었다.
‘통했다!’
어제 약초 배합이 끝난 뒤 로켓에 다시 들어가 보길 잘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뒤져 본 소설 초반부에, ‘아르닌의 무기 공방’에 대한 내용이 스치듯 서술되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수백 년 전에 존재했다는 전설의 3대 대장장이들처럼, 오롯이 본인의 힘만으로 일군 주문 제작 공방을 차리고 싶다는 것은 아르닌의 오랜 소망이었다. 귀어스트에도, 블라스코 가주직에도 욕심이 없는 그녀가 가진 유일한 목표다.
[지.우.마>의 시점에서, 그러니까 5년 뒤 성인이 된 아르닌은 곧바로 비밀리에 공방을 차린다. 그러나 기존에 블라스코가 유통하던 무기들과 큰 차별화가 없는 아이템들은 고객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블라스코의 위상을 내려놓고 나니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는 자괴감에 그녀의 성질이 한층 더 난폭해졌다고, 원작에서는 그렇게 서술했다.
‘글쎄, 과연 원작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만난 아르닌은 고작 그 정도 좌절에 무릎 꿇을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내 제안이 꿀처럼 달았으리란 점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기성 아이템과의 차별화, 그건 바로 무기에 어떤 강화 옵션이 붙었느냐에 좌우되니까.
그 강화 재료들이 아마 할아버지의 금고에는 넘치도록 쌓여 있을 것이고. 아르닌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 계약서까지 써 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상속 시험 정도는 보게 해 주겠지.’
제발 그래야 할 텐데!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바삐 종종걸음 쳤다.
이미 해가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오늘의 마지막 미션. 바로 베르너에게 내 하루 일과를 보고하러 가는 것이다.
나는 얼른 오솔길을 지나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베르너가 여전히 수련장에 있다고 기사들이 귀띔해 준 덕분이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유, 감사는요! 아직 대련이 안 끝나서 위험할 수 있으니 저랑 같이 가시죠, 아기씨.”
저택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모두 내게 친절했다. 니엘라도 이렇게 블라스코 사람들과 잘 지냈던가?
“아직 바람이 날카로울 수 있으니까 조심조심 다니시고요. 바닥이 여기저기 패어서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꼭 어른 손을 잡고…… 어이쿠야!”
“으앙악!”
“아이고, 아기씨!”
그 당부를 듣자마자 발을 헛디뎌 남매의 합작품인 크랙에 빠지는 바람에, 나는 연무장까지 키스 경에게 달랑달랑 안겨 갔다.
이왕 들려 가는 김에, 나는 그에게 공자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베르너 포섭을 위한 사전 조사였다.
“키스 경, 공자님은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우리 도련님이요? 당연히 검술 연습이지요.”
“검에 관련된 거 말고 다른 건요?”
“예? 글쎄요……. 도련님께서 검을 떨어뜨려 놓으시는 시간이 거의 없으신지라.”
그렇게 듣게 된 베르너의 하루는 놀라우리만큼 규칙적이고 단순했다. 기상 후 새벽 명상, 아침 식사 후 기초 체력 및 검술 훈련, 점심 식사 후 검술 훈련 마무리 및 아카데미 과제, 저녁 식사 후 마법 수련. 수련, 수련, 수련…….
역시 가까운 미래에 대륙 랭킹 2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실력자다웠다. 아무래도 나랑 같은 종족은 아닌 것 같지?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아직 대련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마가렛이 챙겨 준 얼음과자를 오독오독 먹으며 관람석에서 대련을 구경했다.
상대가 일반 기사이다 보니, 베르너는 오러를 구사하지 않고 있었다. 어제처럼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나 푸른 오러 돌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련이 끝나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늦었어, 꼬맹.”
베르너는 수건을 들고 달려온 나를 보고 딱 한마디 했다. 기사들은 내가 베르너와 나쁘지 않게 지낸다고 생각했는지, 죄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틀렸어요, 동네 사람들. 이 도련님은 나를 자기 똘마니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사정을 모르는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커다란 고목 아래 꽃무늬 천을 깔아 주었다.
나는 베르너가 찬물로 목을 축이는 동안 어제 하루 종일 내가 뭘 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고 주방에서 주방장님과 조리사 언니들을 도와서 감자를 깎다가 점심 먹고 시내에 구경 갔어요. 그리고 방 청소를 하고, 마가렛과 빨래터에 같이 갔어요…….”
은근슬쩍 주어를 생략해 보기도 했는데, 베르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눈치가 없었다.
“주방에 출입했다고? 독극물을 섞은 거 아니야?”
나는 내가 들고 온 다과 세트를 노려보는 베르너를 보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자기 동생이 어깨를 다쳤는지 어쨌는지도 모르지. 이 답답이!
“제가 기미 상궁 해 드릴게요.”
“기미…… 뭐?”
“독이 있나 없나 확인해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그렇게 오늘도 쿠키 한 접시를 모두 내 배 속에 저장하려다가, 베르너의 왼쪽 발목에 붕대가 칭칭 감긴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도련님, 다치셨어요?”
깜짝 놀랐다. 심지어 자세히 보니 그냥 붕대만 감은 게 아니라 작은 부목을 덧대고 있었다.
제 발목을 흘끗 일별한 베르너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접질렸다. 어제 아르닌하고 한판 붙는 바람에.”
어제 그 대련의 여파가 베르너에게도 닥친 모양이었다.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길래 봐주는 줄 알았는데…….
“두 분 다 좀…… 살살 하시지…….”
“살살? 그런 게 어디 있어! 진검 대련을 할 때는 항상 목을 내놓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해.”
“그, 그래도 다치면 아프잖아요.”
“부상이 두려우면 애초에 검을 잡으면 안 되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르닌만큼이나 베르너도 검에 미친 놈이라는 걸 깜빡했다.
베르너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아르닌은 항상 진심을 다해서 덤벼. 나보다 더 열정적이고 무모하지. 내가 걜 우습게 아는 순간 아르닌은 내 발목을 잘라 갈걸. 대체 검에 강화술을 몇 개를 걸어 둔 건지…….”
정말 극단적인 남매였다. 이러다 정말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어진 베르너의 혼잣말이 조금 의외였다.
“그 애는 훌륭한 검사야. 그만한 실력자가 전력으로 달려오는데, 나도 진심으로 상대해야지. 그게 검에 인생을 바친 자들 간의 예의다.”
“……그렇구나.”
역시 베르너는 여동생을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는 듯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응수하는 게 베르너의 스타일인 모양이다.
잠깐의 침묵이 스치고, 베르너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곤 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언젠가부터 내게 진심으로 살기를 풍기는데…….”
그의 날 선 눈매가 누그러지고, 새파란 눈에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옛날에는 그 애와 대련하는 게 즐겁기만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아냐.”
“…….”
“대체 뭐가 매번 그렇게 절박한지도 모르겠고.”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조금, 상처받은 것 같았다.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가 정말로 도련님을 싫어하시는 건 아닐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도련님도 아가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잖아요. 많이 생각해 주고 계시면서……. 아르닌 아가씨도 똑같으실 거예요.”
껍데기뿐인 위로였는데도 베르너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조금 옅어졌다.
“그래, 뭐. 이러나저러나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남매인데.”
나는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조금 상향 조정했다. 핀트를 못 잡는 둔탱이에서 우직하고 올곧은 둔치로.
그러나 너무나 블라스코답게도, 베르너의 말투는 곧장 삐딱선을 탔다.
“이번에 아르닌을 이기면 각하께 대련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글렀다, 썅. 생각해 보니 걔 일부러 노린 게 틀림없어.”
이를 득득 간 베르너가 벌러덩 뒤로 누웠다. 그의 몸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 오러가 겉돌다가 스르륵 갈무리되는 게 보였다.
‘각하라면 공작님을 말하는 거겠지.’
혹시 이런 건 물어봐도 될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살짝 운을 떼어 보았다.
“왜 공작님을 아버지라고 안 부르세요?”
“……니까.”
“네?”
일부러 그런 건지, 베르너가 발음을 불명확하게 뭉개는 바람에 잘 듣지 못했다.
“……그냥, 아버지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니까. 아직 입에 안 붙었다.”
베르너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부자는 같은 집에서 서로 동선도 겹치지 않을 정도로 소원한 사이였다.
방학도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서 그런 걸까?
하지만 공작님은 자식들을 꽤 걱정하는 눈치던데. 이쪽의 사정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심지어 공작님은 할아버지와도 골이 깊어 보였고……. 풀어야 할 실타래가 한둘이 아닌 듯하다.
내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자, 베르너가 작게 키득거렸다.
“왜, 이상해?”
“아니요. 이상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저도 그 기분 잘 알아서, 웃음이 안 나올 뿐이에요.”
나도 전생에 한 번도 새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내 진짜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난 친아빠에게도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거의 없다. 공작과 베르너보다 더 극단적으로 얼굴을 못 보고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죠. 세상에는 정말 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는걸요.”
“그렇지. 이상한 건 아니겠지?”
“그쵸, 뭐.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고, 가족 같은 남도 있고. 그런 거지…….”
애써 냉정하게 말을 주고받는데, 어쩐지 베르너도 나도 종전보다 더 우울해져 버렸다.
그래도 역시 부럽다. 일단 피를 나눈 형제도 있고, 아버지도 계시고…….
엉키고 꼬인 실타래는 시간이 걸려도 풀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속이 시끄러울 베르너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속으로만 삼켰다. 그러고 나니 조금 더 울적해졌다.
‘할아버지 보고 싶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