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 * *
헤르젠 블라스코는 손녀의 침대맡에 걸터앉은 청년을 유심히 관찰했다.
드디어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성체의 모습으로 돌아온 신수가 침묵만 지킨 게 벌써 두어 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으나, 헤르젠은 관록으로 그의 무표정 이면에 서린 감정을 읽어 냈다.
[어째 너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구나, 아이칼.]한참 만에 아이칼이 대답했다.
“생각을 해 보고 있어.”
[무슨 생각?]“내가 치러야 한다는 대가에 대해서.”
헤르젠의 영령이 호오, 하고 흥미로운 소리를 냈다. 의외인 일이다.
[네가 그걸 진지하게 고민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두려워지기라도 한 거냐?]“……경우에 따라서는 그럴지도.”
아이칼이 검지로 로켓의 모서리를 힘주어 눌렀다.
살갗이 툭 터지며 핏방울이 동그랗게 배어 나왔다. 그는 검지 끝에 난 작은 상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본래라면 살이 찢어지자마자 아물었어야 할 상처는 꽤 오랜 시간 피가 멎지 않았다. 아이칼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치유는 날아갔고.”
재생, 치유, 정화. 앞의 두 개는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정화였다.
‘설마 정화까지 같이 사라졌나?’
로켓 속에서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마기가 그의 오러에 잡아먹혔다.
아이칼이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눈살을 좁혔다.
아직은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정화되는 속도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지금까지 권능이 소실된 속도로 볼 때 한 달에서 한 달 반 뒤면 정화의 권능까지 깨끗이 소멸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카티샤의 몸에서 마기를 몰아낼 수 있는 시간도 딱 그만큼 남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아이칼의 낯에 다시금 보기 드문 초조함이 어렸다. 그를 이렇게 조급하게 만드는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뿐이었다.
“최근 들어 유독 어지러워해. 잠이 많아졌고. 악몽을 꾸는 빈도도 늘어난 것 같고. ……그런데 잠버릇은 얌전해졌고. 기운이 달려서겠지.”
[작년부터 유독 피곤해하는 날이 잦기는 했다만, 그래도 이 정도로 그친다는 것이 천운이다.]“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으니 문제라는 거야.”
카티샤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귀어스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건, 상반된 두 힘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덕이었다. 귀어스트의 파괴와 힐라이야의 재생의 힘을 반씩 빌려 되살아난 영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달리 말하면, 카티샤가 그가 없던 지난 4년 동안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힐라이야의 안배 덕분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카티샤의 오러에 흐르고 있는 재생의 권능을 아직 거두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진 세계’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여신이 흘렸던 탄식이 아이칼의 귓가를 맴돌았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녀의 예언이 풍기는 기묘한 위화감. 왜 이전까지는 그 표현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나.
“그 예언.”
아이칼의 목소리가 스산하리만큼 낮아졌다.
“주어가 없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
[…….]“당연히 나인 줄 알았는데.”
하나를 구하고자 억천만의 피조물을 버리는구나.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뒤 구절의 주어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맥락상 그에게 내린 예언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요즘 들어 자꾸만 생각의 방향이 꺾인다.
시공을 어그러뜨리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쪽은 누구일까?
일을 저지른 쪽인가, 아니면 일을 저지른 이유가 되는 쪽인가? 여신은 어느 쪽을 골랐는가.
아이칼이 입술 안쪽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올해 들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힐라이야의 권능을 점진적으로 회수당하는 와중에도 그가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차라리 신의 저주를 받아 추악한 짐승으로 강등되기라도 했으면 이것이 대가구나 하고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권능을 소실하며 다소의 불완전함은 생겼으나 그의 본질은 여전히 홀로도 완벽한 존재, 성스러운 짐승이었다. 여전히 강하고, 세상의 그 어느 피조물보다 우월하다.
모순적이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아이칼은 불안감을 느꼈다.
왜 아직도 내가 멀쩡하지? 내가 아니라면, 화살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거야?
하나둘씩 솟아나는 의문의 결론이 죄다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마침내 아이칼이 품은 근원적인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은 영령의 안색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설마, 그 예언이 가리키는 게 카티일 수도 있다는 말이냐?]“계속 아프잖아. 4년 전에는 오러만 조금 짙어질 뿐이지, 이렇게까지 몸으로 영향이 오지는 않았어.”
[아니, 힐라이야께선 왜……. 일을 친 건 당신 새낀데 왜 애꿎은 내 손녀한테 지랄이시냐!]“내 말이 그 말이야.”
아이칼이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손바닥만 한 영령이 콧김을 씩씩 뿜었다.
[허, 참 내. 그리 둘 줄 알고? 방법을 찾아보마.]“어떤?”
[아르템에는 아직 32인의 영령이 남아 있어. 귀어스트가 폭주하지 않도록 500년 가까이 지켜 온 이들이다.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도록 대비책을 강구해 보마.]최악의 상황이라 함은, 아무런 보호구 없이 마검을 만진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마귀에게 이지를 잡아먹히고 마물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상태가 되기 직전에 이르면 블라스코의 금기가 발동하여 마검의 주인을 빠른 시일 내에 죽음에 이르도록 이끈다.
그다음 단계는?
뻔하다. 영령화다.
“……언제 급작스럽게 안 좋아질지 몰라.”
헤르젠 블라스코의 영령체를 바라보는 아이칼의 눈동자에 미세한 떨림이 지나갔다.
“뭐든 좋으니, 귀어스트를 카티에게서 떼어 낼 방법을 찾아. 나도 계속 생각하는 중이니까.”
[알겠다. 일단은 우리도 펠라임으로 갈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군. 이런 썩을, 우리 아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겨우 원래 집 찾아 돌아온 것밖에 없는데!]영령이 욕설을 지껄이며 창밖으로 휙 사라졌다.
그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카티샤가 뭐라 웅얼거렸다.
“아키, 그러지 말…….”
얼굴을 살펴보려 했으나 제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칼은 그녀를 일으켜 볼까 잠시 고민했으나, 곧 제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눈을 맞추는 쪽을 택했다.
“영령……. 해방, 응…….”
몇 마디 잠꼬대를 중얼거린 카티샤가 다시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아이칼은 불편한 자세로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카티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던 날, 그녀가 쏘아붙였던 말들은 대부분 핵심을 비껴갔다.
“내가 또다시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치면. 그러면 과거와 똑같이 할 거야? 또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그게 아니야, 카티.”
카티는 아무것도 모른다. 가끔 이 애는 너무할 정도로 그의 마음을 몰라 줬다.
“난 네가 다치는 게 싫어. 아픈 게 싫어.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싫다고!”
“나는 그게 너일까 봐 겁이 나.”
다치고 아픈 게 너일까 봐.
무심코 내뱉고 나서야 아이칼은 요즈음 저를 거슬리게 하는 초조함과 조급함의 정확한 이름을 알았다.
불안과 무지에서 싹튼 미약한 두려움. 그건 아이칼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느낄 필요조차 없었던 인간적인 공포였다.
“……아니야.”
아니겠지.
“그것만은 아니어야 해.”
카티샤와 목소리를 높여 가며 다툴 땐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불길한 가능성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우려가 급속도로 현실이 되어가는 걸 체감할 때마다 그는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칼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숨 막히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몇 분간 숨을 참고 있던 아이칼이 돌연 헛웃음을 지었다.
“하.”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 꽤 신선한 경험이다. 그의 세상에는 이제껏 확신뿐이었으니까.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체감한 건 처음이었다.
권능이 차츰 소멸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순간조차 썩 체감하지 못했던 사실이 이제야 피부로 와 닿았다.
자신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어쩌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생긴 시점부터 예견된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진 순간, 그는 더 이상 신 앞에서 오만할 수가 없었다.
불안이라는 이름의 작은 균열이 나뭇가지처럼 수도 없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간다. 일어날 수도 있는 수십 수백 개의 불길한 가능성들이 견고한 자아를 깨부수고 그를 뒤흔들었다.
육체의 고통은 이딴 거지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비할 게 못 됐다.
아이칼이 간신히 진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카티샤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 있던 그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거슬리는 것은 원인이 되는 싹부터 뽑아 없애버리면 된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칼에게 카티샤 외의 것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제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카티.”
아이칼이 작고 따끈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달빛을 머금은 은푸른빛 눈동자가 서느런 안광을 발했다.
“네 말대로, 두 번째엔 내가 뭘 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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