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 * *
그 시각, 수도 펠라임.
니엘라는 오르겐 후작 저택을 생경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오르겐이 이렇게까지 망할 수도 있구나.’
저택의 내부는 아주 엉망이었다. 후작으로부터 계약금과 대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권자들이 이미 한차례 들이닥쳤다.
블라스코에서 전수 조사를 행하고 있으니, 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오르겐의 사유지와 소유물에 손을 댈 수 없다. 오르겐이 황제의 비호 아래에 있던 때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와 황후는 오르겐 후작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얼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오르겐은 황실로부터 버려졌다.
니엘라는 작게 키득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아버지인 나이락 오르겐의 침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실 아버지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다. 니엘라가 오르겐의 사생아라는 것을 아는 사람 자체도 극소수였다.
고작해야 니엘라를 낳은 하녀의 동료 몇 명, 이미 뒈진 후작, 그리고…….
황태자 프리츠.
니엘라는 나이락의 침실로 들어서다 멈칫 굳었다.
캐노피가 반쯤 내려진 침대맡의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금발이 어두침침하고 스산한 내부에 미약한 빛을 뿜었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파묻혀 앉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황태자?’
황후가 아니라?
카티샤가 그녀에게 내렸던 지령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후는 후작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분명 한 번은 후작저를 몰래 방문할 거야. 빚더미에 나앉게 생긴 동생이 걱정되기도 할 테고. 직접 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람은 보내겠지. 너는 그때 황후의 옆에 붙으면 돼. 할 수 있지?”
황실의 사람이 오리란 건 예상했지만 황태자라니, 의외다.
“전하, 이 시간에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지.”
깊은 숨을 뱉은 청년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늘 말끔하고 단정하던 낯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외숙부님 병문안차 왔어. 온 김에 사촌 얼굴이나 볼까 하고 기다렸지.”
나를?
니엘라는 의아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짐짓 표정을 흐렸다.
“지금 시기에 전하께서 오르겐을 방문하시는 건 세간에 그리 긍정적으로 비치지 않을 겁니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아요.”
“말만이라도 고맙군.”
황태자가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니엘라가 아는 프리츠 베르누아는 성정이 유약했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나 곱게 자란 도련님의 치기 이상은 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부모의 성정을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심각하게 경계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 여겼으나, 카티샤는 이미 한차례 주의를 준 적이 있다.
“혹시 모르니까 프리츠 쪽도 예의주시해야 할 것 같아. 앞으로는 더더욱. 사람은 쉽게 변하는 법이니.”
그녀의 판단이 맞았다. 프리츠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하긴, 친밀하던 외조부가 자살하고 어머니는 온 제국민의 질타를 받는 중인 데다 황실의 위신은 대폭 추락한 상황인데. 평정을 유지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긴 하다.
한참이나 허공에 시선을 내던지던 프리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엘라. 너, 지난 4년 동안 조부님의 명령으로 아르템에서 지냈지? 조부님의 보좌관이 그러더군.”
“예, 전하.”
“막내 공녀의 전담 시녀로 일했다고.”
“예.”
“……너는 여전히 오르겐의 사람인가?”
“송구하오나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부님은 돌아가셨지. 네가 충성했던 주인이 죽었으니, 새롭게 모실 주인을 선택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
“혹은, 이미 선택했다든가?”
어느 순간부터 프리츠는 니엘라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니엘라는 그의 시험대 위에 올라 있는 셈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순간 죽은 오르겐 후작을 대면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니엘라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지난 4년간 오르겐 후작에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짓 정보들을 전달하며 수도 없이 시험대에 올라 봤다. 후작에 비하면 프리츠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우스웠다.
“제 충의를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면 될지 말씀해 주세요, 전하.”
그녀의 차분한 대답에 프리츠가 설핏 웃었다.
“공녀와 만날 자리를 준비해. 내가 지정하는 장소로 그녀를 데려와.”
“전하께서 직접 만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블라스코의 다른 직계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공녀를 유인해 와. 딱 한 번이면 되니.”
“하지만 공녀님 곁에는 백의 교단의 파수꾼이 항상 붙어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요? 이클라스족의 신수 하프 말입니다.”
“알지. 그자가 파르세네를 뒤집어 놓았으니까. 카티샤가 꽤 오래 데리고 다닌 짐승이기도 하고.”
그걸 아는데 이런 명령을 내린다고? 니엘라가 미간을 좁힌 것과 거의 동시에 프리츠가 나직이 명령했다.
“하지만 틈이 없지는 않을 터. 신수가 자리를 비우게 하든, 공녀를 밖으로 끌어내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데려와.”
“하지만 전하, 제 능력 여하와 관계없이, 신수와 공녀 사이에는 빈틈 자체가 없을 텐데요…….”
“어째서? 하루 왼 종일 붙어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예. 아마도요.”
놀랍게도 그건 꾸며 낸 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 관심을 카티샤에게만 집착적으로 퍼붓는 놈이 아닌가?
“지난 4년간은 곁에 없었다며?”
“그러니 아마 더더욱 지금은…….”
프리츠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곧바로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니엘라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니엘라는 다급히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제가 알기로는, 성혼을 약속한 사이셔서요.”
“뭐?”
프리츠가 놀란 듯 굳었다.
니엘라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
‘빌어먹을. 내 입으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미 나간 말을 주워 담을 길이 없었다. 숙련된 연기력 덕분에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니엘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에 결정된 것이라……. 그놈은 정말이지 하루 종일 징그럽게 아가씨를 따라다니거든요. 수도까지 올라와서는 더더욱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겠지요. 신수의 눈을 피해 공녀를 유인해 오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정혼자란 말이지.”
“네…….”
니엘라가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이, 프리츠는 맥없이 정혼자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럴 것 같긴 했어. 그날, 파르세네에서 그 애 표정이…….”
그가 허탈하게 실소하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대강 납득한 듯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프리츠가 카티샤를 보아 온 시간은 그리 짧지 않았다. 아카데미 5년 내내 항상 눈으로 그녀의 뒤꽁무니를 좇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를 지켜보았음에도, 프리츠는 그날처럼 환희에 찬 카티샤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가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내가 너무 철없고 순진한 꿈을 꿨군.”
황실과 블라스코 사이의 균열을 안일하게 여겼다. 자신이 즉위하고 나면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기도 했다. 아스트로카 황실과 블라스코가 둘도 없는 친우이고 아군이었던 건국 초기처럼.
그러나 균열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깊었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던 조부가 죽었다. 자살이라고 공표되었지만 살해당한 것이다.
다음은 어머니일 테고, 그 다음은 아버지겠지. 아니, 어쩌면.
‘다음은 나일지도 몰라.’
파르세네에서 보았던 블라스코 공작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름다운 외피 구석구석 배어 있던 냉혹함. 싸늘한 비소.
프리츠는 차갑게 식은 손끝을 꽉 그러쥐었다.
“전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신수는 블라스코의 편이 아니라 카티샤의 편이라는 건가?”
“그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단 공녀의 명령을 우선으로 여기기는 할 겁니다.”
“그렇다면 공녀가 그를 따돌리고 약속 장소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해.”
“…….”
“지금껏 후작가로 보내온 보고를 열람하니 막내 공녀와 꽤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 아니면 네 포섭력이 그 정도까진 미치지 못하나? 시도조차 하기 전에 포기할 정도로?”
“…….”
“설사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내 신뢰를 사려면.”
니엘라를 노려보는 프리츠의 눈빛이 형형했다.
니엘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네.’
그녀 선에서는 이 자리에서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어차피 선택은 카티샤가 하는 것이니 별 상관없겠지. 자신이 할 일은 상대가 내민 조건에 상응할 만큼 가치 있는 대가를 얻어내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전하의 명령인걸요.”
니엘라는 신뢰감을 주는 침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대신 제가 아가씨를 유인하고 나면, 저와 아버지를 황성에 숨겨 주세요.”
“숨겨 달라?”
“아가씨를 속인 걸 들키면 블라스코에서 살아남기란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를 보호해 주세요.”
“건방지게.”
“제 사촌 오라버니 되시잖아요, 전하. 제 아버지는 당신의 외숙부고요.”
니엘라는 오르겐의 성조차 받지 못한 사생아였고,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프리츠는 그녀가 오르겐 후작가의 하녀로 일하던 시절부터 유달리 불쌍히 여겼다. 여기저기 주는 잔정이 많은 타입이다.
“……어머니가 동생마저 잃게 할 수는 없지.”
한참 만에 프리츠가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좋다. 카티샤를 불러오고 나면, 넌 숙부님을 모시고 내 궁으로 가 있어. 황후 폐하께서 맞아 주실 거다.”
“감사합니다, 전하.”
니엘라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프리츠와 남아 있던 수행원들이 돌아간 뒤, 그녀는 황급히 마석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괜히 성혼 이야기는 꺼내 가지고!’
그로부터 몇 분 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르템의 통신석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