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뭐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성혼이라는 거.”
나는 그렇게 묻는 아이칼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홍채 가장자리로 갈수록 푸른빛이 도는 보석 같은 은색 눈에 내가 담겨 있었다.
마차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옅은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이 튀어 나갔다.
“아키, 너 나 좋아해?”
“좋아해.”
아이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이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럼 너도 나를 갖고 싶어?”
“…….”
“나는 그래. 나만 너를 가졌으면 좋겠어.”
어쩌면 나는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감정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 감정이 이미 그 선을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온 대륙의 결혼 적령기 여자들이 아이칼에게 추근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넘어 분노가 솟구쳤다.
나를 볼 때만 희미하게 풀어지는 눈매도, 아주 가끔 소리 내어 웃는 웃음소리까지도 다 나만을 위한 것이다.
“세상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는 좋아. 너랑 하는 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맺었다. 지금까지 길게 돌아온 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고 명쾌한 결론이었다.
잠시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아이칼이 목 막힌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드디어 네가 나와 비슷한 걸 느끼는 것 같네.”
“무슨 뜻이야?”
“나도 나만 너를 갖고 싶어.”
분명 내가 내뱉은 것과 의미는 같을 텐데, 어쩐지 아이칼의 입을 타고 나온 말은 더 깊고 짙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 시절의 두루뭉술한 소유욕이 세월을 지나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된 것처럼.
“나한테는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어. 내가 너 말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잖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게 아니고?”
“물론 그 말도 맞고. 카티로만 채우기에도 부족한 세상인데 굳이.”
사실 알고 있다. 신수는 원래 혼자 사는 종족이고, 공생을 모른다. 나는 사라진 세계에서도 지금 다시 이어지는 이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그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이칼이 마뜩찮게 중얼거렸다.
“반면에 너는 수백 명의 친구를 만들고 다니고.”
“그건 조금 다른 얘긴데…….”
“뭐가 달라? 다르지 않아.”
“…….”
“내 세상에는 너랑 나 둘뿐인데, 네 세계에서 나는 네 수백 명의 친구들과 너를 나눠 갖고 있어.”
“네 지분이 엄청 커, 아키. 거의 90퍼센트가 넘어.”
“나머지 10은?”
“나머지는 가족들한테도 나눠 줘야…….”
“그러니까. 전부가 아니란 얘기잖아.”
아이칼의 낯에 부루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과 표정에 어린 작고 희미한 감정들이 또렷이 보였다.
“전부가 아니면 불공평해. 부족하고.”
“…….”
“그래서 너를 보고 있으면 갈증이 나, 카티.”
“…….”
“네가 나를 멀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딱딱해졌다.
아이칼이 다시금 내게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그가 이대로 나를 데리고 이렐 반도로 떠나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눈이었다.
“네가 좋아. 그래서 모자라.”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칼이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속으로 무언가를 삼켜내고 난 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자조와 체념이었다.
“항상 이랬으니 앞으로도 다를 거 없겠지.”
“아키.”
“네 세상에 굳이 끼어들어서, 네 옆자리를 기어코 차지하고, 네가 온갖 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목마른 채로.”
“…….”
“아. 겁먹고 초조해하기도 하겠구나, 이제.”
아이칼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눈에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했다.
“네가 나를 불완전하게 만들어.”
“……그래서 싫어?”
“아니.”
그가 작게 키득거리며 고개를 숙여 내게 이마를 콩 맞댔다.
“난 네 관심을 먹고 사는 것 같아. 설원에서 처음 만났을 땐 분명 이렇지 않았었는데.”
“…….”
“그래서 요즘은 좀 힘들어. 카티가 관심을 안 줘서.”
“그게 뭐야…….”
“그러니까 나 좀 신경 써 줘.”
태연한 목소리 끝에 투정이 섞였다. 책망하듯 가늘어진 시선이 답을 종용한다.
나는 한참 만에야 모기만 한 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앞으로…… 많이 줄게, 관심.”
“글쎄, 과연.”
“진짜야. 네가 달라는 대로 다 줄게.”
“피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이젠 안 그래. 약속해.”
“음.”
대답을 강요할 땐 언제고, 퍽 회의적인 신음만 낸 아이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른 그가 가장 가까이 있는 문을 열었다. 아르닌 언니가 손님을 맞을 때 사용하는 공방의 응접실이었다.
커튼을 걷은 창문으로 봄 햇살이 환하게 떨어져 내부를 물들였다. 며칠 전부터 물밀듯이 밀려드는 하자품들을 이곳에서 정리했던 것인지, 응접실은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나른한 햇빛 속에 반짝거리는 먼지가 부유했다.
아이칼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쌓인 쇳조각들을 마뜩찮게 둘러보았다.
결국 그는 소파 대신 창문 앞에 나를 내려 주었다. 내 드레스는 빗물 한 방울 진흙 한 점 튀지 않고 깨끗했다.
나는 찬찬히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뭐야?”
말을 뱉어 놓은 건 나인데 바짝 긴장한 것도 나였다. 나는, 그러니까 명확한 말로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은 것 같았다.
아이칼은 말을 아꼈다. 대답을 미루고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살피는 눈이 깊다.
“……네가 내게 친구 하자고 했지, 카티. 이 시간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어?”
“네가 나를 샀을 때 말이야.”
“아…… 응.”
이제는 아주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날이다. 분명 내가 먼저 아이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그냥 친구 하자.”
“친구?”
“외로울 때 곁에 있어 주고, 기쁠 때 함께 축하해 주고, 슬플 때 위로해 주는 게 친구야.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던 어린 소년이 이제는 훨씬 높은 곳에서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예전과 같은 것이라곤 신비로운 은푸른빛 눈동자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예전에는 없던 희미한 기대감을 엿보았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네가 바라는 우리 관계의 이름이 달라졌어?”
“…….”
“말로 하지 않으면 나는 확신 못 해. 그러니까 말해 봐. 나랑 뭐가 하고 싶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작은 태풍을 그는 모를 것이다.
그래, 이제는 아이칼의 말처럼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달라졌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파르세네에서 재회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문득문득 아이칼이 낯설게 여겨졌던 순간들에 나는 그를 친구가 아니라 남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나를 한차례 휩쌌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로써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만 남았다. 굳이 말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칼에게 입 맞췄다.
말랑한 입술의 감촉을 느끼자마자 내가 방금 벌인 짓이 실감이 났다. 심장이 덜컹거리더니 이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을 걸 알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욕심이 민망함을 이겼다. 처음 닿아 본 입술이 뺨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따듯하다는 걸 알아 버린 탓이다.
눈을 감은 탓에 촉각과 청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아이칼의 숨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 만큼 실제로도 긴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찰나에 불과했는지. 구두 굽이 천천히 바닥에 닿고 나서야 내가 입술을 뗐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 비슷하게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굳어 있던 아이칼이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긴 숨을 흘려보냈다.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게 하고 싶었구나, 카티.”
하릴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자꾸만 그의 입술로 내려갔다. 내가 방금 저기에 입 맞춘 게 맞을까?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한 번 더 해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살짝 벌어져 있던 모양 좋은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종잡을 수가 없네.”
“……뭐가?”
“달랑 손만 주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더니. 오늘은 뭐야?”
언제나 평연함을 기본으로 깔고 있던 아이칼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뜨고 있었다.
“그동안 잘 참았다고 상 주는 건가?”
뭘 참았다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더불어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넌 너무 느리다’며 나를 책망했던 말의 진짜 의미도.
“너도 이런 거 하고 싶었어?”
“이런 거, 저런 거 다.”
뒤늦게 밀려온 부끄러움에 고개를 뒤로 빼기가 무섭게, 아이칼이 도로 다가왔다.
“한 번 더 하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입술이 또 닿았다.
이번에는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났다. 그리고 또 한 번.
쪽쪽거리는 낯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상체가 조금씩 뒤로 젖혀졌다. 나는 손으로 뒤를 더듬어 간신히 창틀을 짚었다.
“이건 한 번이 아니…… 읍.”
말을 맺을 틈도 없이 다시 입술을 빼앗겼다. 조급하고 촘촘한 입맞춤 사이사이로 아이칼이 나를 불렀다.
“카티.”
“……응.”
“카티.”
“으응…….”
들뜬 숨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이 달았다. 정신없이 몇 번이고 이름만 되뇌는 모습에서 좋아 죽겠다는 티가 풀풀 났다.
나도 좋아, 이런 거.
안달이 난 목소리로 몇 번 더 나를 부르던 아이칼이 내 뺨을 손으로 감쌌다. 고개가 살짝 비틀리고, 입술이 조금 다른 각도로 닿았다.
그가 억눌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카티.”
“응……?”
“벌려 봐.”
다정한 말 속의 뜻을 해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뭘……?”
어리둥절한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아이칼이 내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물었다. 평소처럼 이로 잘근거리는 것이 아니라 머금은 것에 가까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