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방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접촉에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다.
그 순간, 지척의 은푸른빛 눈동자에 거짓말처럼 열기가 번졌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가 입술 사이의 좁은 틈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놀라 들이마신 숨이 입안에서 뭉그러졌다.
내가 충동에 몸을 맡기고 나서야 겨우 시도했던 입맞춤이 어린애 장난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지나치게 가깝고 뜨거웠다. 있는 줄도 몰랐던 온몸의 감각 세포가 일시에 깨어나는 듯 오싹하기까지 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 틈으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었다.
뒤로 물러나려다 발을 잘못 디뎌 휘청거리는 내 몸을 아이칼이 단숨에 들어 올렸다.
엉덩이가 창틀에 닿고 등이 차가운 유리에 눌렸다. 그 바람에 입술이 살짝 미끄러지며 틈이 생겼다.
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흡, 하아…….”
눈높이의 차이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그는 한 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칼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내 입술에서 옮겨 묻은 것이 틀림없는 옅은 분홍색 립글로스가 붉은 혀 안쪽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광경이 숨이 멎을 만큼 야릇했다.
가쁘게 숨을 고르는 내 입술에 시선을 잠시 고정하고 있던 아이칼이 싱글 눈매를 휘었다. 천진하면서도 오싹한 눈이었다.
“이런 것까지 할래?”
그는 첫 키스에 들뜬 소년 같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엔 첫 사냥을 앞두고 잔뜩 고양된 짐승처럼 보였다.
아이칼이 인간과 신수의 피가 반씩 섞인 하프라는 것을 이만큼 체감했던 적이 없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신을 산산이 흐트러뜨리고 몸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생경한 감각. 실은 그간 못내 궁금했던,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경험.
넘어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선 너머의 것들까지 저와 하고 싶으냐고, 그가 눈으로 묻고 있었다.
아이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그와 하고 싶은 것.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런 것까지 할래.”
지금 이렇게 열 오른 나의 모습은 내가 다른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는 나였다.
겨우 자각한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고 달아오른 나.
오직 아이칼만이 볼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나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것이기도 했다.
“너 줄게. 다 가져.”
작게 속삭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용케도 알아들은 아이칼이 목을 울려 만족스럽게 웃었다. 갈증을 해소하려는 짐승처럼 그가 다시금 내 입술을 삼켰다.
숨이 얽히고 나서야 벼락처럼 아찔한 깨달음이 덮쳐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에게 해 온 모든 일들이 앞으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아질 거라는 걸.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더 폭넓고 다채로운 감정의 바다로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열린 새로운 세계가 나를 벅차도록 설레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 * *
낮에 아르닌의 공방에 다녀온다던 카티샤가 타운 하우스로 귀가했다. 그것도 저녁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카티샤의 옆에는 바늘 따라가는 실처럼 아이칼이 따라붙었다. 죽고 못 살던 둘의 분위기가 요 몇 주간 싸늘해져 있던 터라 보는 이들은 절로 숨을 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티샤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그녀가 도망 다닐 때마다 신수 주위의 기온이 10도씩 뚝뚝 떨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복도 바닥이며 창틀이며 커튼까지도 쩍쩍 얼어붙는 바람에 그걸 하나하나 녹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마가렛이 아이칼에게 직접 주의를 주기도 했다. 이렇게 온 복도를 꽝꽝 얼려 버리면 아가씨가 미끄러져 뇌진탕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반 협박한 뒤에야 아이칼은 저택을 얼리는 걸 멈췄다.
그러나 곁을 지나치기만 해도 칼바람에 뺨을 얻어맞을 지경이니, 사용인들 모두 슬슬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저택에 돌아온 카티샤의 표정은 밝았다. 그냥 밝은 정도가 아니라 양 뺨이 옅은 흥분으로 잔뜩 상기해 있었다.
“아기씨,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응. 아키랑 화해했어.”
“어머나, 잘되었네요!”
마가렛이 호호 웃으며 손뼉을 쳤다. 분명 제가 오늘 아침 카티샤의 입술에 발라 주었던 옅은 분홍색 글로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은 일단 외면해 보았다.
“바로 식사하러 내려가실 거죠?”
“응, 아버지가 기다리실 거야.”
마가렛은 솜씨 좋게 카티샤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카락을 다시 빗어 준 뒤, 입술에 글로스를 다시 발라 주었다.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한 카티샤가 도도도 방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키, 내려가자.”
상대는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가렛은 슬쩍 문 너머로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가, 그 짧은 사이에 카티샤의 립글로스가 또다시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이고야…….’
문밖으로 머리만 내민 마가렛을 발견한 카티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서 뭐 해, 마기?”
모르는 척 시침 떼셔도 소용없어요, 아기씨.
마가렛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아련하게 손만 흔들었다.
“으음, 아무것도요. 어서 내려가셔요. 배고프실 텐데.”
“응!”
아이칼의 손을 꼭 잡은 카티샤가 그를 끌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왕년에 이 집안의 총괄 시녀장으로 한가락 했던 마가렛은 계단 아래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몇 계단 내려갔다가 멈추고, 또 잠깐 움직였다가 멈추고……. 아, 이번에는 멈춰 있는 시간이 길다.
“아휴, 참…….”
마가렛은 즐거운 탄식을 흘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키가 요만하셨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제미언을 따라 쭈뼛쭈뼛 아르템의 저택에 들어서던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어느새 사랑을 알 만큼 커 버렸다.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 곳곳에 머리털 한 올 보이지 않게끔 숨어 있던 사용인들이 저마다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난 우리 아기씨 시집 못 보낸다…….”
“막내 아기씨가 기척 읽는 데엔 장인이신데, 우릴 전혀 눈치 못 채셨어……. 쿨쩍.”
“원래 사랑에 눈을 뜨면 다른 건 안 보인대…….”
천장의 대들보 사이와 화병 속에 숨어 있던 영령들도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멋쩍은 표정의 헤르젠이 괘종시계 밖으로 날아올랐다.
영령들이 횃대에 앉은 닭들처럼 계단의 난간 위에 조로록 앉았다.
저 아래로 보이는 1층의 중앙 계단 한가운데 주황색과 하얀색 머리카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계단을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뛰어내려 가던 카티샤가 휘청거리자, 아이칼이 익숙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지탱했다.
개구쟁이들처럼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아이칼이 카티샤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거리가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카티샤는 분명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웃고 있을 터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지.]헤르젠이 나직하게 읊조리는 사이, 둘은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티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아이칼의 손을 놓았다. 그러곤 남은 계단을 나는 듯이 내려가 곧장 루테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영령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보기 좋은지고. 저 애들은 계속 저렇게 웃어야지.] [아무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내들인데.] [블라스코의 비극은 이번 대에서 끝나야만 해. 그리고 영령의 사명 역시도.] [저 애들에게 이런 짐을 지워 주어선 안 되니까.] [이 지긋지긋한 사명은 우리 대에서 끊고 가자고. 우리 귀귀를 동반자 삼아 떠나면 심심하진 않겠어.]헤르젠이 영령들에게 아이칼과의 대화를 그대로 전한 이후, 영령 전원의 의견은 하나로 모였다.
24대 가주 유제니가 우아한 몸짓으로 날아와 헤르젠의 곁에 섰다.
[황실을 본격적으로 상대하는 건 내일부터라고 했지?] [예. 정확히는 새벽부터지요. 카티가 황태자를 만나러 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래. 점차 종장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기분이구나.]종장.
헤르젠의 시선이 계단 아래에 오래 머물렀다.
어느새 설표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이칼의 위로 루테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손을 내밀자 눈표범이 아주 못마땅하게 앞발을 내놓는다. 파르세네에서 입은 상처가 있는 쪽 발이었다.
인상을 쓴 루테가 눈표범에게 뭐라 잔소리를 했다. 카티샤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는 헤르젠을 그와 같은 눈으로 지켜보던 유제니가 따스하게 물었다.
[너는 아쉽겠어, 헤르젠. 영령의 기준으론 갓 태어난 셈이라.] [허허, 전 일흔에 죽었습니다. 살 만큼 살았는걸요. 이제 와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그저?] [부디 모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길,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어지기를. 더 욕심을 내자면 카티 성년식 정도는 보고 갈 수 있길. 그 정도뿐입니다.] [그리될 거란다.]유제니가 담담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카티의 성년식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거든. 그때까지 귀귀가 얌전히 굴어 주기를 기도하자꾸나.] [그래야지요.]헤르젠에게 다정히 웃어 준 그녀가 짝짝 손뼉을 치며 영령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러 갑시다. 가엾은 마법사 열두 명을 갈아 가며 펠라임까지 온 보람은 있어야 하니. 이미 가이우스 님께서는 새로운 봉인진 구축에 들어가셨답니다.] [그래. 젊은것들이 분투할 동안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영령들이 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날아올랐다.
헤르젠은 마지막으로 다이닝 룸을 향해 사라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뒤, 앞서간 선조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평화로운 저녁이 막을 내리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새벽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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