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아이칼은 마지못해 손을 떼기는 했지만,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다. 잠옷 위로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죄다 입술을 꾹꾹 내리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뺨부터 시작해서 목, 소매 아래의 팔뚝, 손등과 손가락. 쪽쪽거리는 소리가 낯 뜨거우면서도 좋았다.
“카티.”
“응?”
“네 가문의 일들이 다 끝나고 나면, 반도로 가자.”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반도라 함은 백의 교단이 위치한 이렐 반도를 뜻했다.
“거기서 너와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을 많이 했어.”
“…….”
“네가 내 땅에 있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어.”
“……그래.”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곳에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곳, 그리고 아이칼이 평생을 살아온 곳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슬그머니 덧붙였다.
“그런데 거기서 계속 살자는 건 아니지……? 나 추운 거 싫어.”
“그러자고 해도 안 들을 거면서 뭐 하러 물어봐?”
“……너 정말 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이구나.”
“가자고 하면 갈 거야?”
“네가 원한다면 몇 달 정도는 살고 올 의향은 있어. 물론 평생은 안 되고…….”
“오.”
그것만으로도 놀랍다는 듯 아이칼이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곤 즐겁게 내게 뺨을 비볐다.
“그럼 그동안은 내가 오롯이 너를 독차지할 수 있겠네.”
“대신 아빠 허락은 네가 받아 와. 알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아빠는 은근히 내게 물러.”
“……어떻게 알았지? 통찰력이 장난 아니구나, 아키.”
“원래 그랬어. 자, 이제 눈 감아, 카티. 새벽에 깨워 줄게.”
벌써 11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나는 얼른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슬쩍 고개를 들고 아이칼을 째려보았다.
“있지, 그런 말은 좀, 입술부터 떼고 말해 줄래? 자는 동안엔 건드리는 거 아니야. 약속해.”
“으음.”
저 묘하게 찜찜한 답은 뭘까. 저렇게 멋대로 굴어도 밉지 않은 이유는 또 뭐고.
나는 입맞춤 대신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는 간지러운 손길을 느끼다, 스르륵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프리츠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펠라임 북쪽, 사설 검투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유흥가의 외곽이었다. 은밀한 접선 장소로는 제격이다.
나는 향수에 젖어 검투장 인근의 밤거리를 둘러보았다.
“여기 오는 건 9년 만이네. 기억 나?”
머리 위에서 아이칼이 낮게 키득거렸다. 그는 검은 로브로 몸을 칭칭 감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기억 나. 2000골드. 그 금액, 네가 이미 다 환급받았다는 것도 알고.”
이 눈치 백 단 같으니라고.
불리할 때마다 2000골드를 외쳐 댔던 나는 본전도 못 건졌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마지막 코너를 돌자, 약속 장소인 붉은 지붕의 낡은 2층집이 나타났다.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이가 나를 보고 반색했다.
“아가씨! ……와 아이칼 님.”
후드를 벗어젖히고 달려오던 니엘라가 끼긱 멈춰 섰다.
아이칼을 아래위로 훑어본 그녀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아이칼이 니엘라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로 곱지 않았다.
“이게 누구세요? 일이 틀어지면 일단 무식하게 다 때려 부수기부터 하는 파수꾼 님 아니세요?”
“그러는 너는. 인생이 거짓으로 점철된 사기꾼.”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꼬박 4년 만에 재회하는 것일 텐데 어째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 없다.
“싸우지 마. 둘 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 상황에 또 서로 물어뜯을까, 나는 급하게 먼저 선수를 쳤다.
막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려던 아이칼과 니엘라가 동시에 입을 딱 다물었다. 그 와중에 둘 다 말은 참 잘 들어서 다행이랄지…….
나는 아예 몸으로 아이칼을 가리고 서서 니엘라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니니, 넌 바로 황성으로 가는 거야?”
니엘라가 길거리 저편에 멈춰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조건이었으니까요. 나이락 오르겐이 있으니 곧바로 황후궁으로 안내받을 거예요. 우선 황후 곁에 붙어 있으면서, 마법 관리국의 마력 제어 장치를 끌 방법을 모색해 볼게요.”
“마법 관리국 쪽에 접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황후를 감시하는 걸 최우선으로 해. 황제가 언제 황후를 대피시킬지 모르니까. 통신석은?”
“몸수색에서 걸릴까 봐 나이락의 셔츠 속에 걸어 놨어요. 어차피 지금도 술에 절어 있어서 몸도 못 가누거든요. 취해 있지 않으면 억지로 먹이려고 보드카까지 준비해 뒀는데, 제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이미 꽐라가 되어 있어서.”
니엘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가히 패륜적인 그녀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하기야 그녀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정이 티끌만큼도 없으니. 게다가 그게 내가 니엘라를 신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좋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통신석으로 연락해야 해.”
“걱정 마세요.”
니엘라가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중에 봬요, 아가씨. 조심 또 조심하시고요.”
“조심해, 니니.”
니엘라가 마차에 오르자, 곧 문이 닫혔다. 니엘라와 나이락을 태운 마차가 황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섰다.
아이칼이 문을 열었다. 깊은 심연처럼 어둑한 복도에 그가 띄운 빛나는 얼음 조각이 빛을 드리웠다.
그에게 존재감을 감추는 홍옥석을 줄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호위 하나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프리츠가 편하게 마음을 열지 아니면 좋은 기회라며 입맛을 다실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 대신, 아이칼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오러를 말끔히 갈무리해 평범한 호위처럼 위장했다. 그가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프리츠는 2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창가에 선 그의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이쪽을 등지고 서 있던 프리츠가 인기척에 돌아보았다.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매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안녕, 카티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말 편하게 해. 아카데미에서처럼.”
그럴 수가 있나?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고, 우린 같은 학년의 동기로 만난 게 아닌데.
나는 천천히 방 한가운데로 다가갔다.
프리츠는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다. 그가 내 뒤에 선 아이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별다른 의심 없이 눈을 돌렸다.
곧 프리츠가 테이블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아니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데.”
프리츠와 한가하게 안부 인사나 주고받을 틈도 없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다.
내가 단호하게 나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프리츠가 힘없이 웃었다. 체념한 빛이 짙었다.
“좋아. 너도 짐작했겠지만, 어머니에 관한 일이야.”
“말씀하세요.”
“……동요하지도 않는구나.”
프리츠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도 한참 망설이던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블라스코에 못 할 짓을 했다는 사실은 알아. 최근에 알게 되었지.”
“…….”
“블라스코의 복수는 정당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입장을 바꿔 보면 나도 분명 화가 났을 거야.”
화가 나?
프리츠의 어휘 선택에 어이가 없어 침묵하는 사이,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래,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떨군 고개 아래에서 괴로운 혼잣말이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그래도 내게는 부모야. 나는 그분들의 편에 서서 생각할 수밖에 없어.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머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을 때가 있잖아. 가령 우리 어머니처럼. 사랑이 가끔은 비이성적인 결론을 도출하기도 하지.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해.”
“…….”
“게다가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블라스코에 해악을 끼친 적도 없어. 죄가 있다면 아버지와 이미 돌아가신 조부님께 있을 거야. 그러니…….”
프리츠가 횡설수설 말을 길게 늘였다.
나는 침묵했다. 미동도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를 쳐다봤다.
프리츠가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참이나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고서야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머니만은 살려 줄 수 없겠어?”
“…….”
“숨만 붙여 둘 생각은?”
더는 조용히 들어 주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 프리츠와의 만남에서 긍정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 * *
“어머니만은 살려 줄 수 없겠어? 숨만 붙여 둘 생각은?”
프리츠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티샤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동정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이 조용히 상황을 관전하는 아이칼의 눈에도 보였다.
“화가 난 걸 이해한다고요……?”
잠시 그 말을 반복해 되뇌던 카티샤가 기가 차다는 듯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나 사랑에 눈이 멀면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 한 번은 눈감아 달라고?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카티샤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떴다.
“짝사랑에 미치면 남편에게 살인 청부도 할 수 있고 그런가 보죠? 그게 황실의 법도인가?”
“……어머니는 평생 후작가와 황성에서만 사셨어. 정치에도 참여하지 않으시니 평생 새장 속에 갇혀 사셨지. 그래서 그랬던 거야. 본인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서.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라…….”
“그렇게 순수한 분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넷이나 죽음으로 몰아갔나 봐요. 죽을 뻔한, 아니지. 죽어 봤던 사람으로서 용납이 잘 안 되는데.”
아이칼조차 그녀가 이렇게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상대를 벌레 보듯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루테와 꼭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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