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
19화
눈을 감은 베르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기야…… 넌 입양됐다고 했지? 입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네에, 뭐…….”
“마음고생했겠네, 꼬맹이가.”
베르너 역시 더 묻지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우리는 엇비슷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할아버지에겐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이 불쑥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냥…… 막 하루하루가 행복하진 않고 그랬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대신 제 분에 넘치게 훌륭하신 분을 만났으니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많이 말할걸.
나를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은 너무너무 훌륭한 분이시고, 내 인생의 롤 모델이고, 내가 아주 많이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솔직히 할아버지가 아니면 나 같은 앨 누가 키워 줬겠어……? 부모도 버린 갓난애를.’
길지 않은 두 번의 인생을 합쳐도 내가 엄마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쯤 되면 내게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냥 박복한 운명으로 태어난 걸지도…….’
“아닐걸.”
그렇게 심란한 상념에 잠겨 있는데, 베르너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네가 착하게 살았으니 귀인을 만난 거지.”
이번에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마음이 찌르르 떨려 온 탓이었다.
“세상엔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고, 자격 없는 자에게 관대할 만큼 삶은 무르지 않아. 자신감을 가져, 꼬맹이.”
누워 눈을 반쯤 내리깐 채로, 베르너가 힐끗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곤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말고 마가렛에게 가서 맛있는 저녁 달라고 해. 누가 뭐래도 네 엄마잖아?”
불쑥 다가온 베르너의 엄지와 검지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나는 손을 거두고 도로 눈을 슥 감는 베르너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오해는 깊어져만 가는가…….
“보고하느라 고생했으니까 거기 샌드위치 먹고, 엄마한테 가.”
“……네에.”
연이은 대련이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소리가 낮고 일정해졌다.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
경계의 빛이라곤 하나 없이 잠든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베르너를 공략하려고 다짐하고 왔는데 어쩐지 역으로 내가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형제가 있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문득 하녀 행세를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문제의 상속녀라는 걸 알게 되면, 베르너와는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 이런 순간은 다시는 안 오겠지.
나는 일부러 샌드위치를 아주 조금씩 아껴 먹었다. 그리고 아르닌에게 주고 남은 약초 상자를 몰래 그의 망토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혹시 모를 다음을 위해, 베르너의 몫까지 400개를 만들어 둬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 *
“그 애가 오러의 흐름을 읽는다고?”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던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블라스코의 수석 시녀장, 마가렛이 공손하게 답했다.
“예, 각하. 공자님과 공녀님이 내뿜는 검기가 눈에 보이시는 듯했습니다. 살기도 몸으로 느끼시는 듯하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공작이 눈썹을 비딱하게 치켜세웠다.
오러는 인간의 신체에 깃든 고유의 생명 에너지였다. 그것을 검에 담아 시각적, 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기운이 검기다.
검사 본인이 일부러 드러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러는 일반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소 5년 이상 검과 하나가 되어 수련해도 보일까 말까 하는 게 오러인데.
“걔가 올해 몇 살이랬지? 일곱 살?”
“열 살이십니다.”
“아무리 봐도 일곱 살이던데.”
“열 살이세요, 각하.”
“아버지가 이것저것 많이도 가르치면서 키우신 것 같은데, 왜 키랑 덩치는 겨우 그것밖에 안 큰 거야?”
마가렛은 주인의 기준치가 너무 높다는 것을 지적할까 말까 하다가 조용히 접었다.
공작이 보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열 살에 검기를 읽는다라…….”
약초를 잘 다루길래 치료사로서의 재능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뜻밖이다. 열 살이면 처음 베르너가 오러를 감지하기 시작한 시기보다 1년이나 앞선 나이였다.
“검이라곤 살면서 과도밖에 못 쥐어 봤다고 하던데. 근력은 아예 없고, 싸돌아다니는 걸 보면 체력만 좀 있는 수준이고.”
“하지만 아기씨는 몸이 날래고 기척도 작습니다. 공자님과 공녀님이 크게 인지하지 못하실 만큼 존재감을 숨길 줄도 아시고요. 몸에 밴 습관이신 듯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답은 각하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요.”
공작의 미간에 팬 골이 깊어졌다.
그는 현존하는 대륙의 모든 검사들 중 수십 년 동안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은 천상계의 실력자였다. 그러니 본인이 던진 물음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이도 스스로뿐이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진검은커녕 목검도 만져 본 적 없는 열 살짜리가 기척을 얼추 감출 줄 알고 오러의 흐름을 읽기까지 한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딱 하나뿐이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오러를 눈으로 읽어 낸 케이스는 공작이 살아온 서른여덟 해 남짓 동안 단 한 명이었다. 바로 그 자신이다.
공작의 입가에 비딱한 호선이 걸렸다.
“재능이라 이건가.”
보통 그런 천재성은 핏줄을 따라간다. 대체 어디서 물려받은 재능이길래?
공작은 카티샤 아인슬리의 부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능력치가 보통이 아닌데. 정말 스파이일 수도.’
아스트로카 황실과 오르겐 후작가에서 블라스코를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한 이후로 벌써 11년 가까이 흘렀다. 그들의 수는 점차 치졸해지고 있었다.
이틀 전에도 마구간 하인으로 위장 잠입을 시도했던 첩자 하나를 베르너가 포획해 왔다. 이미 지지난달부터 달에 한 번씩은 있었던 시도라 놀랄 것도 없었다.
작년에는 열세 살짜리 어린 하녀가 발각된 적도 있었다.
열 살이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 아무리 선대께서 직접 들여보낸 아이라고는 하지만…….
“아침 같이 먹어 주시면 안 돼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떠오르자 비딱하게 뻗어 나가던 생각의 줄기가 멈칫했다.
스파이…… 는 역시 좀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스파이가 의도적으로 투입한 아이인가?’
공작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능성이 있다.
“특별히 귀엽고 살가운 애를 골라서 침투시킨 거지. 너무 깜찍해서 의심을 가질 틈도 주지 않도록 말이야. 그럴듯하지 않나?”
“예에…….”
마가렛이 아주 시원찮게 말꼬리를 늘였다.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은 모양이다.
공작은 대놓고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이미 말려들었군, 마가렛. 젬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아르닌과 베르너와도 나쁘지 않게 지낸다고 하고…….”
“그리고 각하께서는 벌써 닷새째 아기씨와 함께 조찬을 들고 계시고요.”
“…….”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오렌지, 파괴력과 침투력이 굉장했다. 물론 서재를 허락한 건 자신이지만.
그러나 그뿐이다. 오래전 허무하게 형제와 연인을 잃은 뒤로, 공작은 누구도 쉽사리 믿지 않았다.
상대가 호기심과 순수함이 반짝이는 눈을 가진 어린아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봐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공작은 억지로 머릿속에서 주황색 꼬마를 털어 냈다.
“곧 그 애의 처우도 결정이 나겠군. 게스파 숙부님을 맞이할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
“예, 각하. 모자람 없도록 완벽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경 써. 본가를 방문하시는 건 11년 만이니까.”
베르너와 아르닌이 선두로 도착했고, 블라스코 방계를 이끄는 가문의 어른들도 이틀 내로 도착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블라스코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이면 11년 만에 가문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바로 헤르젠 블라스코의 유산 상속에 관련한 사항들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그 요주의 상속녀, 카티샤 아인슬리는 필참이다.
‘베르너와 아르닌은 잘 설득하는 중인가?’
물론 그 둘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더라도 상속 시험은 치르게 해 줄 테지만. 그가 가진 가주의 권한으로.
‘하지만 그래도, 가문 회의의 중압감을 버티기는 어려울 텐데.’
평범한 열 살 아이라면 회의장에서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할 게 없다.
정말 울어 버리면 조금 곤란하다. 내려가서 달래 주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만한 담력도 없다면 어차피 블라스코에서 오래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블라스코와 얽힌 이상, 이 모든 상황은 오로지 그 아이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걸 아는데 이상하게 속이 불편해져 왔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녹색 눈이 오래전에 그의 곁을 떠난 누군가를 연상시키기 때문일까?
‘……쓸데없는 감상.’
공작은 혀를 차며 이만 생각을 접었다. 서재에는 새벽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