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아이칼은 짧은 순간, 그가 알고 있는 블라스코의 비극을 샅샅이 떠올렸다.
‘방금 그 비기, 분명 원래는 초대 황제가 초대 공작을 위해 만들었던 치료술이라고…….’
오러가 충돌하며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파가 내부를 덮쳤다.
아이칼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가 펄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반짝거리는 흰 머리칼을 눈에 담은 프리츠가 이를 뿌득 갈았다.
역시 저자였다. 교단의 파수꾼.
‘신수가 있다면 마법을 못 써. 그렇다면…….’
그 역시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프리츠는 곧장 두 번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발밑보다 더 깊은 지하로부터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 기이잉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의 마법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카티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마법진은 없었다. 지하에 묻어 놓은 마법진은 몇 차례에 걸친 사전 조사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벗어나고자 했으나 이미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발이 묶였다. 지하에서 타고 올라온 마나가 공간을 통제하고 있었다.
손끝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수식을 그려 나가며, 프리츠가 기이하게 고양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처음부터 내 역할은 이 정도야, 카티샤. 아버지께서 널 보자 하시니 따라야지. ……그러게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랬어?”
그 맥락 없는 뇌까림을 아이칼은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이 공간 전체에 이동 마법진을 걸어 놓은 것이다.
펠라임에서는 이동 마법이 금지되어 있으나, 당연하게도 황실이 직접 손을 쓰는 경우는 다르다.
황제가 카티샤를 보고자 한다는 맥락으로 보건대 이동진의 좌표는 황성이다. 그녀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카티샤가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황성으로 끌고 가려는 거군요.”
“충고 하나 하자면, 아버지께는 내게 하듯 건방지게 굴면 안 될 거야. 그분은 자비가 없으시거든.”
“정말 최악이시네요, 전하.”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아이칼은 점차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마나의 회오리를 민감하게 파악하면서도 힐끗 카티샤를 일별했다.
어째 목소리가 좀, 위기감을 느낀다기보다는, 묘하게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대로 끌려가서 황실의 인질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깨자.’
아직 수식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이라면 마법진을 무효화할 수 있었다. 공간을 통째로 날려 버리면 된다.
아이칼이 막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카티샤의 작은 손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가 눈짓으로 그를 저지했다.
아이칼이 눈매를 사정없이 찡그렸다.
하지 말라고?
카티샤는 다른 손으로 제 목에 길게 늘어진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반짝 이채가 돌았다.
‘로켓……?’
그 순간, 이동진이 완성되며 공간이 뒤집혔다. 승차감이 엄청나게 좋지 않은 마차를 타는 것처럼 몸이 들썩거리다가 앞으로 훅 쏠렸다.
그 순간, 카티샤가 엄지로 조개 모양 로켓의 뚜껑을 튕겨 올렸다.
로켓이 활짝 벌어졌다.
“……!”
붉은 빛이 사방으로 튀어나오며 이동 마법 위를 뒤덮었다. 이 세계의 시공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강력한 마나로 짜인 아공간이 선행한 마법진보다 먼저 그들을 집어삼켰다.
귓가에서 거칠게 왱왱거리던 바람 소리가 뚝 멈췄다. 분명 방금까지는 서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 좁고 어두운 곳에 처박혀 있었다.
“……휴. 괜찮아, 아키?”
상황을 먼저 파악한 쪽은 카티샤였다. 그녀가 낡은 궤짝에서 아등바등 몸을 일으켰다.
“건물 전체에 이동진을 걸다니. 황실의 마법사들이 상당히 많이 갈려 나갔겠는걸…….”
“왜 막았어? 그 이동진, 완전히 발동하기 전에 깰 수 있었는데.”
아이칼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묻자, 카티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면 그냥 순순히 당해 주진 않았을 테지만, 좌표가 황성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어떻게?”
“직접 황성에 잠입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잖아. 이왕 납치할 거면 황성으로 끌고 가라고 내심 바랐거든.”
이렇게 직접 초대해 줬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며, 카티샤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짓궂게 웃었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아이칼은 그녀의 코를 톡 두드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대담해졌어?”
“난 원래 이랬어. 이래 봬도 열 살에 사바나도 횡단했던 사람이야, 내가.”
“그럼 여기로는 왜 들어온 거고?”
“황성에서 몰래 뛰어다니려면 이런 채로 갈 수는 없잖아. 드레스는 불편해. 그리고 아티팩트 같은 것도 챙겨야 하고…….”
위기감이라곤 전혀 없이 키득거린 카티샤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보다 못한 아이칼이 그녀를 제 위에서 쑥 들어 올려 궤짝 밖으로 내보냈다.
“고마워. 왜 들어오는 통로를 이런 작은 궤짝으로 해 놓았을까?”
카티샤가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바로 섰다.
아이칼은 천천히 궤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들어온 공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카티샤 몰래 들어와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녀의 로켓 안은 4년 전과는 판이했다.
작은 창고는 거의 비상용 벙커처럼 변해 있었다. 책장 위 칸에는 그녀가 직접 배합한 약초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고, 그 밑에는 마법 아티팩트들을 잔뜩 구비해 두었다.
그 밑에는 두꺼운 서적들 십수 권이 주르륵 꽂혀 있고, 빈 종이와 펜, 문진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못 보던 옷장도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갈아입을 옷이며 덮을 담요까지 야무지게도 채워 놓았다.
그리고 옷장 바닥에 그것이 있었다. 검신을 감싼 천 밖으로도 마기를 풀풀 뿜어내는 마검, 귀어스트.
잠시 망설이던 카티샤가 흘끗 아이칼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손은 슬금슬금 공단을 젖히고 있었다.
“이게 이래 봬도 성능은 확실해, 아키. 만에 하나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내 몸 지킬 무기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
“딱 이번까지만 쓰고 다신 안 만질게.”
그러나 아이칼의 관심은 그쪽에 있지 않았다.
그는 창고를 둘러보다 발견한 책상 위의 물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낡은 타자기였다. 그 위의 허공에 반투명한 스크린이 떠올라 있다.
그가 기억하는 ‘기록’의 모습은 수백 개의 두루마리였다. 아마 로켓을 연 이가 카티라 그녀에 맞게 공간이 구성된 모양이었다. 아마 카티샤가 줄곧 보아 온 ‘기록’은 저런 모습인 것이리라.
“챙길 것만 챙겨서 나가자. 좌표가 황성인 건 틀림없는데, 황성의 어디일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뭔 짓을 해 놨을지도 모르고. 그럼 홍옥석을 미리 목에 걸고 있어야겠네. 네가 목걸이를 걸고, 내가 검을 챙기면 되겠다. 언니가 홍옥석 반쪽 박아 줬던 거…… 그게 어디 있더라……?”
카티샤가 쉴 새 없이 중얼대며 작은 벙커를 빙글빙글 돌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드레스는 불편하니까.”
카티샤가 옷장을 뒤지는 사이, 아이칼은 천천히 책상 앞으로 가 상체를 숙였다.
반투명한 막을 검지로 툭 건드리자,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고개를 슥 빼고 이쪽을 본 카티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4년 전에 외전까지 나온 뒤론 딱히 더 해금된 거 없었어. 아마 이제 더는 나올 게 없기 때문이겠지만.”
“…….”
“나 옷 갈아입을게. 돌아보면 안 돼!”
“……응.”
아이칼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카티샤의 말과는 달리, 백지처럼 밝아진 막 위에 뭔가가 떠올라 있었다.
“……?”
지난번 카티샤 몰래 마검을 가지고 나가려 들어왔을 때엔 없었던 변화였다.
아이칼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검지로 [예]를 툭 건드렸다. 곧 새하얀 백지가 반투명한 막을 가득 채웠다. 백지의 우상단에 가늘고 짧은 ⎮ 모양의 기호 하나가 깜빡거렸다.
‘뭐지, 저게?’
눈을 가늘게 뜬 아이칼이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반투명한 막에 좀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타닥, 아래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타다닥……. 타자기가 저절로 눌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백지 위에서 깜빡거리던 막대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며, 글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녕?]“……?”
[참 늦게도 온다. 언젠가 네가 이쪽을 봐 주길 기다렸는데, 통 오질 않더군. 기다린 시간이 얼마인지…….]뭐야, 이건?
아이칼은 저절로 움직이는 타자기를 슥 들어 보았다.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자기가 쉼 없이 눌렸다.
[나는 네가 없앤 세계다. ‘사라진 세계’이고, 곧 소멸할 세계이기도 하지. 네가 남기라 명령했던 ‘기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습게도 마지막 한 장이 해금되지 못해 여태 남아 있지만 말이야.]‘기록 따위가 말도 하나……?’
아이칼은 힐끗 카티샤를 돌아보았다가, 그녀가 능숙하게 드레스 단추를 풀어 내리는 걸 보고 흠칫해서 도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런 밀폐된 곳에서는 좀. 어차피 저만 고통받을 게 뻔해서…….
그 와중에도 백지는 득의양양한 글자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자, 열어라, 이클라스의 아들이여. 네가 파괴하였던 세계에서, 너의 여신이 사라져 가는 세계와 그 중심에 선 너를 바라보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화면 속에서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갔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이 기시감.
백지에 굵은 글씨의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클라스의 아들아.>“……!”
아이칼은 새롭게 떠오른 문구를 보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