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그가 듣지 못했던 여신의 말이 사라진 세계를 기록하는 기록물에 고스란히 넘어와 있었다. 아니, 이것은 힐라이야가 의도적으로 그에게 남긴 전언이다.
아무리 신수라고 해도 세계 밖의 여신에게 먼저 손을 뻗을 방법은 없었다. 여신이 먼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이상은.
해서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다시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힐라이야는 그녀의 신수가 언젠가 다시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예상하고 있었을까?
아이칼은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노려보았다.
‘두렵지 않으냐고?’
아니. 이젠 아니야.
소리 내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서 카티샤가 듣고 있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다시금 글자가 나타났다.
[그럴 리가 없을 테지. 한때 나도 어리석은 선택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자행한 적이 있어 안다. 불안하고, 두려울 거야.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스럽겠지.>백지에 나타나는 글자가 성스러운 음성으로 치환되어 귓가에 메아리쳤다.
아이칼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으로 막힌 공간 너머로 씨실과 날실이 촘촘하게 엮인 무형의 그물이 드리워져 있었다.
공간 전체에 은은하게 감도는 힐라이야의 성력이 온화하게 살랑거렸다. 그러나 백지를 채우는 글자들의 조합은 그만큼 온건하지 못했다.
[네가 저지른 짓의 대가로 무엇을 빼앗기게 될지 알고 싶을 테고, 내가 네가 지키고자 한 인간을 벌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기도 할 것이다.그러나 명심해. 내 탓을 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네가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어그러뜨린 운명의 말로란 걸 말이다.>
꼭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들이었다. 실제로 이 전언은 벌써 거의 20년 전에 남겨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혼란에 휩싸일수록 더더욱 신수의 본분을 잊지 마라. 네 검이 본래 만들어진 이유를. 내가 그 검을 이클라스에게 내렸던 원초적인 이유를. 네가 여전히 그 검의 주인이라는 것이 뜻하는 바를.>문득 허리춤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이칼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허리에 맨 검집을 더듬었다.
[그것은 마귀를 베기 위한 검이다. 그러니 악한 것을 베어라. 마기에 물들어 타락하는 인간을 베어. 마귀에게 잡아먹힐 운명을 지닌 자를 베어, 그 영혼이 편안한 안식에 이를 수 있도록 해방하라.>아이칼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카티샤가 혼자서도 능숙하게 드레스를 벗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대충 발로 차 밀어내고 움직이기 편한 바지를 주섬주섬 찾았다.
얇은 슬립으로 감싸인 등허리 위로 은은한 마기가 감돌았다. 마검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서서히 마귀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카티샤의 주위를 맴돌다가 서서히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아이칼이 눈을 크게 떴다.
‘베라고……?’
베어서, 해방시키라고? 무엇을? 누구를?
아이칼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새로이 떠오른 글자들이 그를 비웃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되돌리기만 하면 끝일 줄 아는가? 온전히 구할 수 있다 여겼어? 그것조차 너의 오만이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네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이런 것일 텐데, 그럼에도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으니. 감당하는 것도 네 몫이겠지. 내가 그랬듯.>“…….”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칼은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막 상의를 끌어 올리고 있던 카티샤가 작게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애매하게 내린 옷가지를 허둥지둥 끌어 올리는 그녀의 뺨이 빨갛게 익었다.
“야아, 뒤돌지 말라니까…….”
아이칼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아슬아슬하게 가린 가슴께에 시선이 닿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카티샤의 손목을 잡아채 그녀의 오러를 끄집어냈다.
분명 지속적으로 정화되고 있던 주황색 오러가 잠깐 사이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미묘하게 오러의 흐름이 느려졌다. 생명 에너지인 오러는 피처럼 끊이지 않고 전신을 순환해야 한다.
오러의 움직임이 느려진다는 게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다. 죽음.
“아, 아키?”
카티샤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를 올려다보는 연녹색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이칼이 이를 뿌득 갈았다.
‘……안 돼.’
정화가 안 된다.
아이칼의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권능의 조각이 바람결에 쓸려 간 홀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앞이 암전된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한 달 정도는 남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카티샤의 몸속으로 오러를 흘려보내도 검은빛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살을 에는 냉기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왜 그래, 괜찮아?”
“…….”
낌새가 이상했던지, 카티샤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꼭 붙잡고 있던 상의가 밑으로 스르륵 떨어지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아이칼.”
아이칼은 조그만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폐부를 달짝지근한 체향으로 가득 채웠다.
“갑자기 왜 그래? 뭘 봤는데?”
카티샤가 까치발을 세워 그의 어깨 너머로 탁자 위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꺼진 뒤였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던 카티샤가 결국 조심스럽게 아이칼의 목을 끌어안았다.
“음…… 괜찮아. 어차피 네가 내 곁에 있는데 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동진의 좌표도 끽해 봐야 황성일 테고…….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어.”
“…….”
“우리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갈까? 여섯 시간까지는 쭉 있을 수 있는데. 어차피 여기 들어와 있는 동안엔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그래, 그게 좋겠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은빛 머리칼 사이사이로 들어와 그를 달래듯 흐트러뜨렸다.
그 다정한 손길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아이칼이 움직였다.
카티샤가 벽에 기대어 놓은 마검을 발로 차 멀찍이 밀어 버림과 동시에, 그는 고개를 내려 그녀에게 키스했다.
* * *
로켓 속에서의 여섯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시간이 가는 동안 아이칼이 마음대로 내게 키스하고 나를 만지도록 두었다. 이곳에 들어온 직후부터 아이칼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던 탓이다.
‘잠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까? 그럼 여섯 시간씩 더 벌 수 있으니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아이칼이 이 정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건 4년 만이었다. 니엘라와 처음 맞닥뜨리고 과거의 기억 일부를 되찾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그런데도 이유를 묻는 말에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좀 진정이 돼?”
나를 꼭 끌어안고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얘가 대체 왜 이럴까?’
프리츠를 상대하며 눈알이 뜨거워지도록 솟구쳤던 분노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그딴 헛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칼의 눈가에서 뚝뚝 떨어진 눈물이 목선을 타고 흘러 빗장뼈에 고였다.
목에 끼얹어지는 숨결과 자꾸만 속옷 틈새로 스며드는 눈물 때문에 나도 점차 곤란해지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 옷을 다 갈아입지도 못하고 아이칼에게 안기는 바람에 아직도 상체를 거의 헐벗다시피 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신경 쓰는 건 나뿐인 것 같지만…….’
아이칼이 내 옷차림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한동안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던 아이칼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후회 안 해.”
“뭘?”
“너를 데려온 거.”
그의 입술이 쇄골 부근에서 목을 타고 귓가로 올라왔다.
귓불을 깨무는 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튀어나오는 아이칼의 습관이다. 뺨을 비비고, 또 뺨에 키스를 퍼붓고. 뜬금없이 쏟아지는 애정 표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만 이번의 키스는 간밤처럼 성애의 의미기 짙지는 않았다. 단지 이 순간 내가 여기에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은 듯했다.
아이칼이 뭔가를 다짐하듯 뇌까렸다.
“내가 벌인 짓이니 수습도 내가 해.”
“…….”
“너는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게 해 줄게.”
“그래…….”
물기가 반들거리는 은푸른빛 눈에 번뜩이는 예기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이칼이 이렇게 홱 돌아간 눈을 할 때를 안다. 본인의 이성으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다.
그럴 때 그가 선택하곤 했던 방식은……. ‘사라진 세계’와 반파되었던 영령의 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틀리면 일단 때려 부수고 본다던 니엘라의 평가는 정확했다.
아이칼이 음산한 어조로 뇌까렸다.
“방법이 없진 않지.”
그러니까 그게 뭔지 심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아이칼의 머릿속에서 뻗어 나간 생각이 어느 결론에 당도했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아이칼이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하는 이유라면 역시 마검일 것이다.
나는 불시의 습격을 대비해 귀어스트를 허리에 차고 있으려던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극도로 불안해한다고? 갑자기?
아이칼이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한 자 한 자 짓씹었다.
“아무도 카티를 내게서 못 데려가. 그게 설령 힐라이야라고 해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