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
2화
‘백만장자가 뭐야, 천만장자는 될 것 같은데……?’
멍하니 눈만 부릅뜬 사이, 블라스코가의 세무사라는 제미언이 내 앞에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무척 상냥하고 친절하게 제안했다.
“아인슬리 양만 동의하시면 아르템에 있는 블라스코 본가를 방문해 영령을 뵙고 상속 절차를 밟고자 하는데, 괜찮으실는지요?”
“어…….”
“공작님께서도 무척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순간, 블라스코 공작을 따라다니는 온갖 소문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10년 넘게 대륙 검술 서열 1위를 차지했던 실력자이나, 실력과 외모의 발톱만큼도 못 따라가는 인성 파탄은 기본.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은 일단 썰고 보는 기분파에, 엄청난 독설가.
온갖 희귀한 육식 짐승과 식인 식물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심심하면 산 인간을 먹잇감으로 던져 준다는 잔혹한 살육자.
그 외의 별칭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블라스코 공작은 원작에서 양딸인 여주를 사람 취급도 안 해 주던 악역 무리의 수장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미쳤다고 따라가!
“저는 사양하겠……!”
“현금으로만 백만 골드.”
내 거부는 백만 골드에 뭉텅 잘렸다. 두루뭉술한 재산 목록보다 배는 직관적인 대사였다.
제미언이 눈을 찡끗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수익까지 합치면 매년 십만 골드씩 추가.”
기가 막혔다. 사람을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돈에 목숨을 파는 사람으로 보는 거야!
“……그리고요? 더 있나요?”
돈에 목숨 거는 속물 1호가 바로 여기 있었다.
전생에서 난 가난뱅이 중에서도 특히나 더 가난한 상거지였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얼마나 진창으로 처박힐 수 있는지, 얼마나 사무치게 서러울 수 있는지 잘 안다.
아이 러브 머니.
머니 이즈 베스트.
노 머니, 노 라이프…….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제미언이 엄숙하게 덧붙였다.
“정보 길드의 수익 배분율 5 대 5, 그리고 아르템의 본가를 포함, 수도에 있는 저택의 시세가 아마……”
“수도에 집이요?”
아니, 그 땅값 비싸다는 수도에 저택이?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아직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와중에 할아버지의 정체에 놀라고 유산의 규모에 까무러칠 지경인데도 그 말은 유독 가슴에 와닿았다.
‘전생에서도 못 이룬 내 집 마련의 꿈이…….’
반면 제미언은 짐짓 서글프게 눈썹을 축 내렸다.
“물론 카티샤 양이 계속해서 거절하시면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이 상속 포기 각서를 요청……”
“가겠습니다.”
아유, 이 아저씨. 성격 급하시기는!
“몸만 가면 돼요. 어차피 쌀 짐도 없거든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일단 가서 그 성격 파탄 패륜아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함이다.
절대로 수도에 집이 있다는 말에 넘어간 게 아냐. 절대로 내일부터 뭘 먹고 살지 궁해서가 아니라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재산 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수도의 저택에 융자는 없는지, 법적 상속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 * *
내가 블라스코 본가로 가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관은 화려한 공단과 꽃으로 치장한 운송 수레에 실렸다. 나는 옷가지와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물건 몇 개를 넣은 단출한 짐을 지고 마차에 올랐다.
블라스코 본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공작가의 세무사라는 제미언에게 놀랄 만한 사실을 듣게 되었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영혼이 아직 살아 있다고요?”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다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 보고 들을 수 있느냐로 따진다면 비슷합니다. 선대께서는 블라스코의 영령이 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제국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블라스코는 본래 명망 높은 검가였다.
수백 년 전 초대 가주가 대륙의 암흑기를 몰고 온 마귀들의 제왕을 검에 복속시킨 뒤로, 블라스코의 가주들은 대대로 마귀가 폭주하지 않도록 검을 지키는 임무를 이어받았다.
마검을 비호한다는 것은 곧 마귀와의 쌍방 귀속 계약을 뜻한다. 마귀가 가주에게 복종하는 대신, 가주는 마검이 소멸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인 인간의 영혼을 내주는 것이다.
블라스코의 역대 가주들은 죽은 뒤 영령, 즉 성스러운 영혼이 되어 검에 종속된다고 한다.
거기까지 들으니 뭔가 기억나는 게 있었다. 내가 빙의한 소설, [지금 우리, 마법처럼>에 등장하는 주요 설정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영령께서는 이미 본가에 있는 영령의 탑, 그러니까 마검이 잠들어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움직이기 적합한 형태를 갖추시려면 몇 달 걸리기는 할 테지만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면 할아버지를 다시 뵐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요.”
안도감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직 세상에 혼자 남은 건 아니구나.
‘다시는 그 잔소리를 듣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장례식에서 수분이란 수분은 쏙 뺀 줄 알았는데, 칠칠치 못하게 다시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어서 관을 가져오라며 노성을 지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할아버지답다 싶기도 했다.
‘블라스코 공작도 헤르젠 할아버지의 성격을 닮았을까?’
헤르젠 할아버지가 선대 공작이었다면 현 공작의 아버지란 소리가 아닌가?
할아버지는 종종 내게 당신의 자식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곤 했다.
“아들놈이 둘 있었는데, 한 놈은 일찍 갔다. 남은 놈은 영…….”
“왜요?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그래. 머리 좀 컸다고 대드는 꼴이 보기 싫어서 대판 싸우고 가출했다. 에잉, 그 고집불통을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구먼.”
그땐 보통 부모가 아니라 아들이 가출하지 않나?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이제야 명확해졌다.
‘공작위를 승계해 버리고 은퇴하셨다는 얘기였네.’
하기야, 나라도 아들이 망나니라면 속이 터지긴 하겠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가 재산을 아드님께, 그러니까 공작님께 안 물려주셨어요?”
“예. 두 분이 대판 싸우신 바로 다음 날, 가주직만 남기고 감쪽같이 튀셨거든요!”
제미언이 하도 활기차게 대답해서 나도 모르게 수긍해 버렸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렇게 되면 블라스코에서 내 위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가물가물한 원작을 다시 소환했다.
원작, [지금 우리, 마법처럼>은 마검과 공명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악당 가문 블라스코에 입양된 여주인공의 수난기였다.
블라스코에서 온갖 개고생은 다 하다가 극적으로 탈출, 남주와 손을 잡고 블라스코를 깨부수러 돌아오는 복수극……이 제대로 시작되기 직전에 연중되었지.
‘니엘라의 인생이 어땠더라?’
블라스코의 기생충 취급을 받는 니엘라가 살길이라곤 형제들과 아등바등 겨뤄 마검을 상속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니엘라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결국 블라스코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공작저를 탈출한다.
그리고 블라스코를 대적할 유일한 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게 바로 성검을 수호하는 백의 교단이다.
니엘라가 교단에서 파견한 최상위 환상종, 신수 혼혈 아이칼의 비호를 받으며 마검을 승계하기 위해 블라스코와 겨루는 내용이 소설의 큰 줄거리였다.
물론 남주 아이칼과의 로맨스 지분도 상당했다. 아이칼은 니엘라를 지키기 위해 그녀 대신 마검에 잠식되어 버리고 마는데, 그런 그를 구하려 니엘라가 진정한 마검의 후계자로 거듭나게 된다는…….
뭐 그런 성장 로맨스 스토리였던 것 같다. 이젠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그게 167 화였나? 주인공들이 함정에 빠졌다가 재회하기 직전에 끊겨서 엄청 눈물 났다는 것만 기억난다…….’
작가님 왜 안 돌아오시냐고 댓글 창에서 징징거리다가 웬 취객이 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었더랬지. 참 암울한 인생 1회 차의 최후였다.
나는 기억을 샅샅이 뒤져 목 막혀 죽을 것 같던 원작의 고구마 구간을 겨우 떠올려 냈다.
“오늘따라 저택에 지저분한 잔부스러기가 눈에 띄는군. 청소 하녀를 해고하도록.”
이건 공작이 양딸로 들어온 여주인공이 눈에 띌 때마다 하던 대사.
“이곳에 네 것은 단 한 개도 없어. 여기서 넌 숨 쉬는 것조차 허락받아야 해.”
이건 공녀가 생글거리며 날리던 폭언.
“내가 무슨 이득을 보자고 널 도와야 하지? 넌 블라스코의 기생충일 뿐인데.”
이건 블라스코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공자가 여주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절하며 내뱉는 대사…….
당시의 내 처지와 미묘하게 겹치는 듯한 대사에 괜히 찔려 더 열을 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입술이 절로 비죽여졌다.
‘아들만 문제가 아니라 손주들까지 싹 다 인성 파탄이었네. 천불 올라오실 만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불안해졌다.
이거, 유산에 홀려서 냉큼 따라나서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거 아냐?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공작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할 가능성은 제로에 달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블라스코의 피라곤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었다. 헤르젠 할아버지가 노년에 거둔 군식구에 불과하다.
그런 출신 미상의 어린애에게 선대 공작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이 다 넘어간 셈 아닌가?
‘현금만 백만 골드에, 매년 십만 골드씩 수입이 나온다며?’
평민이 1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뼈 빠지게 일해야 겨우 10골드나 모을까 말까 하니, 백만 골드의 가치란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관대하게 어림잡아 봐도 딱 1년 치면 삼대가 떵떵거리며 살 금액이었다.
‘심지어 현물 재산까지 다 합치면 전체의 3분의 2나 된다는데. 본가 사람들이 반길까?’
내가 등한시한 현실을 자각한 순간 싸한 한기가 밀려왔다.
가문에 가진 지분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여주도 기생충이라며 그렇게 박대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면부지의 상속녀를 온화하게 대해 줄 확률은?
제로다, 제로야.
나라도 안 반기겠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빼앗고 내쫓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나를 어디 으슥한 뒷산에 파묻어 버리고, 내 이름으로 남겨진 유산을 다시 가문에 귀속해 버릴지도 모른다.
굉장히 설득력 있군.
“제, 제미언 님, 헤르젠 할아버지는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이제 막 육신을 떠나신 터라 영령체가 안정되려면 최소 두 달, 길면 석 달까지 걸린답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할아버지가 되살아나기 전에 내가 의문사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단 얘기잖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