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
20화
* * *
“가문 회의가 열려요?”
나는 사과를 돌려 깎다 말고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가렛이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
“블라스코에 직계 혈족 외에도 방계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아기씨? 족보를 통틀어 가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요 인사들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예요. 이 정도 규모로 소집한 건 10년 만이랍니다.”
“어…… 언제 시작하는데요?”
“게스파 어르신이 마지막으로 도착하시면 곧바로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아기씨.”
게스파 어르신은 헤르젠 할아버지의 남동생이시라고 했다. 블라스코 방계가 잡고 있는 해외 유통업을 총괄하시는 분이신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시라고 마가렛이 덧붙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가문 회의가 이렇게 빠르게 열린다고?’
아직 베르너는 제대로 공략해 보지도 못했는데!
정신적인 충격과는 별개로, 내 손은 과도를 쥐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배 껍질이 일정하게 허공으로 슉슉 솟구쳤다가 껍질 통으로 떨어졌다.
오늘은 베르너에게 가기 전에 주방에 잠시 놀러 왔다. 내게 손 조심하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던 호미 아저씨는 이제 내 칼솜씨를 경이롭기까지 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백조 모양으로 깎아 볼까요?”
헤르젠 할아버지는 까다로운 심미안을 가지고 계셨다. 사는 집이건 먹는 음식이건 입는 옷이건 본인의 엄격한 기준에 맞지 않으면 만족할 때까지 ‘다시 해 와’를 반복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과일 한 조각까지 그냥 넘기는 법이 없으셨다.
냉정하게 몇 번 돌려보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그렇게 연마한 잡기만 몇 개더라?
“얍, 백조!”
“아기씨는 정말 검에 특출한 재능이 있으신 것 같네요!”
“헤, 저 장미 모양으로도 깎을 줄 알아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탄에 흥분해 과도를 공중에 던져 가며 신나게 사과 깎기 퍼포먼스를 펼쳐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주방 사람들이 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하지만 이런 잡기는 이 집에서 살아남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 식사하는 내내 공작은 불길한 대사만 연신 던져 댔다.
“맛있냐?”
“네!”
“많이 먹어 둬라.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니까.”
이상하게 찜찜하다 싶더라니, 가문 회의가 열린다는 이야기는 쏙 뺀 거 아닌가! 치사한 사람.
이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베르너에게 사실을 밝혀야만 한다. 이러다 가문 회의에서 들통나기라도 하면, 그 배신감을 대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는 과도를 바투 쥐며 어렵게 큰마음을 먹었다.
‘좋아. 오늘은 꼭 자수하자!’
* * *
나는 현란하게 깎은 과일 친구들을 접시에 담아, 베르너의 전용 서재로 찾아갔다. 오늘도 역시 장장 반나절에 달하는 훈련을 소화한 그는 오후 일정을 위해 서재에 틀어박혔다.
베르너는 햇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바르게 앉은 자세와 고서적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서 귀족적인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몸 쓰는 미남도 옳지만, 책과 펜을 잡은 미남은 더 옳다.
아르닌 언니를 보고 베르너를 보니 남매의 닮은 점이 눈에 띄었다.
‘콧대가 완전 똑같네. 스키 점프해도 되겠다.’
헤벌레 그렇게 생각하는데, 인기척을 느낀 베르너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다가가 과일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네가 깎았어?”
“네. 도련님 드리려고요!”
안녕? 난 너의 과일 깎기 요정이야.
방실방실 웃어 주자 베르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청소 하녀인 줄 알았더니 주방일도 하나? 교육이 너무 혹독한 것 같은데.”
“아니요. 전 교육 같은 거 안 받아서 괜찮아요.”
“그럼 됐고. 마가렛에게 수당 더 쳐 달라고 해. 블라스코는 일한 만큼 준다.”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도 베르너는 여전히 핀트를 잡지 못했다. 참 어지간한 철옹성이다.
베르너가 맞은편 자리를 고갯짓했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 끝나고 보고해.”
“네…….”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익숙한 제목의 서적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르너는 이번 상속 문제로 아카데미에 장기 결석계를 제출하고 왔다고 했다. 밀린 과제를 해치우려는 모양이었다.
‘검술 천재라도 학교 숙제는 해야 하는구나.’
새삼 베르너가 아직 열일곱 살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한국에서 열일곱이면 한창 즐거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을 나이다.
어쩐지 난 베르너가 조금 부러워졌다.
나는 전생에 공부를 못 했다. 잘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공부를 하지 못했다.
술과 클럽을 좋아했던 친엄마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려 6번이나 전학을 다녔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 다니지 말고 가게 일이나 도우라는 새아빠의 명령 아닌 명령에도 부득불 출석 도장을 찍긴 했지만, 공부에 매진할 겨를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내심 그게 억울하게 남았던지, 환생해 얻은 2회 차의 삶에서 나는 꽤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할아버지네 집에는 약초도 많았지만 책도 많았다.
그리고 헤르젠 할아버지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책을 읽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곧장 할아버지께 달려갔다. 할아버지가 답을 망설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 정말 많은 걸 배웠구나.’
다 지금 같은 때 써먹으라는 할아버지의 큰 그림이셨을까?
“후…….”
베르너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흘끔 보니 그의 과제는 아스트로카 제국 정치사에 관한 내용인 모양이었다.
7귀족회의 창립 과정에서 있었던 분쟁에 관해 정리하고 있는 듯했는데,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지 서적을 뒤적거리는 베르너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저건 옆 나라 사례를 참고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슬쩍 보니 책 더미 맨 밑에 [대륙 정치사학 개괄>이 깔려 있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그것을 빼냈다. 그리고 베르너가 참고할 만한 이웃 왕국 페테로의 귀족회의 창립 챕터를 펼쳐 베르너 쪽으로 슥 밀었다.
내가 내민 책을 흘끗 본 베르너가 중얼거렸다.
“어, 여기 있군. 고맙다. 젠장, 욕 나오게 복잡하……”
“감사는 괜찮아요.”
그제야 베르너는 제 앞에 있는 게 바로 나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베르너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혀져 있었다.
“……너, 뭔가 수상한데. 이 책을 읽었어?”
“네. 작년 이맘때쯤이요.”
“작년……? 아홉 살에?”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사실 저는 이 집 하녀가 아니라……”
막 실토하려던 순간이었다. 서고의 문이 활짝 열렸다.
“헛, 죄송합니다, 도련님. 두 분 다 여기에 함께 계셨군요!”
마가렛이었다.
어, 어라?
당혹감에 눈만 끔뻑이는 사이, 마가렛이 부리나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아기씨.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 어디 계시나 했더니, 아직도 여기 계셨어요?”
“아기씨?”
베르너가 눈매를 왈칵 찡그렸다.
마가렛과 나를 번갈아 본 그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블라스코에 아기가 어디 있어? 아르닌이 열다섯인데…….”
“네? 바로 도련님 앞에 계시는걸요.”
“뭐?”
적잖이 놀랐는지, 베르너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가 홱 소리가 나도록 내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쟤?”
“네, 도련님. 아차차, 정식으로 소개해 드릴 시간이 없었지요.”
마가렛이 싱긋 미소 지으며 손날로 나를 가리켰다.
“선대 공작 각하가 남기신 유언장의 주인공이신 카티샤 아인슬리 양이랍니다. 일주일 전에 저택에 도착하셨어요. 이미 아시겠지만요.”
아니,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르너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게…… 너야?”
서고에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기만 하던 베르너가 마침내 왈칵 성을 냈다.
“그런데 왜 하녀인 척을 해!”
“헤헤, 그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럼 청소랑 심부름은 왜 했어!”
“일단 시키시니까 하긴 했는데. 어, 타이밍을 놓쳐서…….”
“그래서 나를 이 며칠간 가지고 놀았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호, 혹시 사실대로 말하면 정말 썰어 버리실까 봐…….”
또다시 살기가 날아올까 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힐끔힐끔 베르너를 훔쳐보니 어제처럼 푸르른 오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화가 났다기보단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더 우세한 것 같았다.
잠시간 허, 하, 허허, 그런 소리만 내던 베르너가 마가렛을 홱 돌아보았다.
“이거 농담이지?”
당연히 마가렛은 그의 기대를 충족해 주지 못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마가렛뿐만 아니라 저택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베르너와 원만한 관계를 쌓아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결국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베르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너, 너……. 내가 너한테…….”
내게 마구 삿대질을 하며 말을 더듬는 게, 정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던 듯했다. 의도치 않게 진짜로 사기꾼이 되어 버린 나는 조용히 일어나 배꼽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의도치 않게 정체를 숨기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요. 기만할 생각도 없었고요. 하지만 그래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베르너를 속였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하녀인 척 접근해 약점을 자극했다고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해. 나는 베르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제 말은 이제 듣기도 싫으시겠지만, 그렇지만 도련님. 제 사정을 한 번쯤은 들어 주시면……”
“아니…… 잠깐만.”
“저 진짜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데요, 도련님.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조용히 해, 좀! 그, 그…… 그놈의…….”
두통이 오는지, 베르너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주변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오러가 심상치 않았다. 귀가 빨간 건 필시 분노 때문이리라.
베르너가 손가락 사이로 흘끔 나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바짝 얼어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것까지 본 베르너가 결국 왈칵 분기를 터뜨렸다.
“말끝마다 도련님! 왜 도련님이라고 해? 헷갈리게!”
어?
뜻밖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