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 * *
내가 아빠를 따라 레바토 후작저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블라스코의 쿠데타 선언문을 작성할 것이다.
황제가 황성을 봉쇄해 버린 지도 벌써 닷새가 넘었다. 솔직히 그쪽에서 한 번이라도 공격을 해 오면 정당방위라는 명목으로 곧바로 블라스코 쪽에서도 사병을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지지부진한 대치는 장장 5일간이나 이어졌다.
뭐, 우리 쪽에도 필요한 시간이기는 했다. 닷새 동안 사바나를 관리하던 12인의 마법사들이 타운 하우스의 뒤편에 대형 이동진을 두 개씩 구축해 놓았다.
하나는 아르템에서 타운 하우스를 잇는 텔레포트 진, 다른 하나는 타운 하우스의 밖으로 이동하는 텔레포트 진이다. 그러니 포위 상황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시간을 끌어 봐야 우리 쪽에 유리할 게 없었다. 닫힌 황성 안에서 황제가 무슨 모략을 짜고 있는지 모르니까.
‘게다가 닷새면 세상에 블라스코가 황실로부터 이렇게 핍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고.’
원래 국가의 수뇌부만 정확하게 들이받는 쿠데타에 필요한 시간은 길어야 반나절이다. 오래 끌어 봤자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만 더 줄 뿐이었다.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끝낸다.’
그게 아버지와 오빠, 언니, 그리고 내가 내린 결단이다.
그 첫 시작은 눈앞의 이 귀족들을 이 쿠데타에 동참하게끔 끌어오는 것.
지금 이 자리, 아스트로카를 움직이는 또 다른 핵심 세력, 7귀족회의 이름으로 선언문이 발표될 것이다.
나는 응접실에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총 열다섯 명이었다. 그중 7귀족회의 일원인 대귀족이 넷이나 된다. 그중 가장 든든한 우방은 역시 레바토다.
흰 수염이 성성한 레바토 후작은 오르겐 후작의 사기극에 휘말린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아르닌 언니가 레바토 후작가에서 보내온 물건들은 특별히 공들여 고쳤지.’
그 인연으로 후작은 하자품을 기사회생시켜 준 언니에게 아낌없는 뇌물 공세를 펼치는 한편, 오르겐 후작가로부터 거의 3만 골드에 달하는 거래 대금을 돌려받기 위해 아직까지도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최근엔 황후에게 배상을 받아 내려다 황제에게 가로막혔고.
레바토 후작뿐만이 아니라, 금전적인 피해를 입고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귀족들이 지금 이 자리에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니 설득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 이미 다 와 있었다.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이, 레바토 후작이 진지하게 운을 뗐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함은, 본격적으로 황실과 맞서겠다는 뜻입니까, 공작?”
“맞습니다.”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 또한.”
아빠의 입가에 반듯한 호선이 걸렸다.
“정확하군요.”
허어,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이들이 반, 아무리 그래도 반역이라니 하며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이 또 반이었다.
레바토 후작이 엄중히 지적했다.
“까딱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블라스코의 위상에 비할 바 아니기는 하겠으나, 황실의 병력도 만만치 않아요. 길면 몇 달이나 이어질지 모르는 내전을 감수하고서라도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겁니까?”
“무의미한 유혈 사태를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도 아스트로카의 심장부에서. 안 그래도 망신살이 대륙 서부까지 뻗쳤는데 집안에서까지 개싸움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일은 황성 안에서 일어납니다. 황제, 황태자, 황실 기사단장 및 제국군 총사령관. 이렇게 넷만 잡을 겁니다.”
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는 부연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기서부터는 내 몫이었다. 조목조목 따지는 거.
나는 활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중추만 바꿔 끼운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중추만……?”
“네. 아스트로카의 체제를 완전히 바꿔 놓을 생각은 아니거든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 초대 가주님께서 목숨 바쳐 건국하신 나라니까요.”
“…….”
“블라스코는 지난 500년 동안이나 영령의 사명을 다해 오며 마귀의 봉인을 지켰는걸요. 단명할 운명까지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틈새로 블라스코 영업도 좀 했다.
솔직히 맞는 말이지. 아스트로카의 일등 충신을 꼽으라면 당연히 블라스코 아닌가? 이 대륙의 인간들이 지금 누구 덕분에 마물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건데.
그에 비해 아스트로카 황실은 어떤가?
“하지만 지금의 황실은 몇 대째 블라스코를 견제하기만 할 뿐, 초대 황제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고 보기 어렵죠. 나라를 이 꼴로 이끌어 가라고 블라스코의 초대 가주 라몬 님께서 키겔 루베니오에게 황위를 주고 대신 희생하신 건 아닐 겁니다. 그것도 후손들의 삶을 줄줄이 저당 잡으면서까지요.”
“그거야 분명 아닐 테지만…….”
“개국 공신 가문이자 마귀의 봉인을 지키는 가문으로서 황권에 개입할 명분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물론 잘못된 것만 시정하자는 것이니,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지도자만 바뀔 뿐이죠.”
“건전하게 말로 풀어 나갈 생각은 없습니까?”
“대화의 기회조차 차단한 쪽은 황제 폐하이신걸요. 저희가 뭘 했다고 대뜸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으시고…….”
짐짓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리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때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여야 한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 계속 입속으로 연습해 왔던 말들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리고 막말로 저희도 호구는 아니라서요. 사실 참을 만큼 참았죠. 황제 폐하께서 제 백부님과 백모님이신 루티어드 블라스코와 이엘 블라스코, 그리고 제 어머니이신 세레이나 아이옐나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때부터 장장 19년 동안이나.”
“……잠시, 공녀. 혹 블라스코의 비극을 말하는 겁니까?”
“네. 설마 블라스코의 비극에 대해 황실이 정말 결백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20년 전에 터진 블라스코의 비극은 불화의 시작이 아니었다. 결과다.
이미 선대 때부터 쌓여 온 반목이 기폭제에 의해 제대로 발화한 사건이었다. 물증이 없었다 뿐이지 심증은 충분했으리라.
황제와 만찬을 들고 나온 블라스코의 직계가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돌연사했다.
블라스코는 몇 년 동안이나 황실에 죽은 이와 황성에서 접촉한 모든 이를 직접 조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으나, 모조리 기각되었다. 사인인 오러 폭주가 오러 유저들에게는 꽤 흔한 증상이라는 황실의 주장 때문이었다.
강한 부정은 오히려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물론…… 당시 분위기를 기억하는 이들 중 한 번도 의심을 품어 보지 않았던 이는 없을 것입니다만……. 그보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비센티오 백작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공녀께서 방금 하신 말씀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조금 다른데.”
“어디가 다른가요?”
“‘루티어드’ 블라스코에 관한 내용 말입니다.”
백작이 흘끔 아빠를 곁눈질했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내 발언에서 위화감을 잡아내지 못할 이들이 아니었다.
“방금 공녀의 백부이자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가 루티어드 블라스코라고 하셨습니다. 루티어드 블라스코는 지금 공녀의 바로 옆에 앉아 계신 공작의 이름이지요. 아무리 양딸이라고는 해도 아버지의 이름을 혼동할 리는 없을 텐데요.”
주위에서 동의한다는 듯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백작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몇 가지 설명을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말씀하시지요.”
“일단 첫째로……, 저는 입양아가 아닙니다.”
이쪽을 향한 시선들에 놀라움이 섞였다.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내가 아카데미 수석 입학과 함께 블라스코에 이름을 올리던 때 그 사실이 제국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으니까. 블라스코를 아는 이들 중 10년 전에 입양된 막내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묘한 고양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둘째로, 제 발언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렸어요.”
“그럼 공녀께서는 고인이 된 루테 블라스코의 딸이라는……, 아니. 애초에 죽은 이가 루테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최초로 의문을 제기했던 비센티오 백작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대체 뭐라는, 사람이 뒤바뀌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자네 말일세.”
레바토 후작이 비센티오 백작의 질문을 가로챘다. 존칭과 존대를 쓰지 않는 것을 보니 무언가 직감한 듯했다.
그가 아빠를 깊은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이름이 뭔가?”
“…….”
“자네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군.”
아빠는 한동안 후작의 시선을 받기만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는데도 아빠는 머뭇거렸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은연중에 진짜 아빠의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본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얼른 아빠의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눈에 팍 힘을 주고 이쪽을 수상쩍게 보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받아쳤다.
‘우리가 하는 말들 의심하기만 해 봐. 내가 다 물어뜯어 버릴 거야!’
아르르 짖을 준비가 된 내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손이 머리에 푹 얹혔다.
고맙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은 아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짐작하시는 바가 맞을 겁니다. 루테 블라스코, 그게 내 진짜 이름이니까.”
담담하지만 힘 있는 선언이었다. 테이블 위에 소리 없는 파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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