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아키 걱정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뜬금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황성 안에서 아키가 움직이고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아직까지 성체가 된 아이칼이 제대로 마음먹고 힘을 폭발시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계 하나쯤 가뿐히 깨뜨리는 건 일도 아닐 테고, 그 틈에 우리는 그가 보내온 좌표로 황성 안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계획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그러나 레바토 후작은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은 듯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소. 쿠데타가 성공하고 나면, 황실은 어찌할 셈이지?”
“왕조를 갈아 치울 겁니다. 베르누아 왕조는 이만 막을 내릴 때가 된 듯해서요.”
“아스트로카에는 황태자 전하가 계시네.”
“과연 황태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신 뒤 블라스코에 반감을 가지는 일이 없으실지 모르겠군요.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진 않은데.”
“…….”
“전하께는 송구스러운 일이나, 블라스코는 더는 황실과 반목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의사는 확고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음을 안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차기 황제는 방계 쪽에서 찾을 셈인가?”
“그래야겠지요. 아스트로카가 혼맥을 맺었던 동맹국들 중에서 찾아볼 생각입니다.”
“왜 직접 황제가 되려 하지는 않지? 블라스코라면…… 막말로 국호를 바꾸어 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아아.”
아빠가 심드렁한 감탄사를 흘렸다. 고개를 슥 기울이고 뭔가를 잠깐 생각하시더니, 곧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취향이 아닙니다.”
예상을 비껴간 답에 귀족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상했다.
“저는 사실 머리보다 주먹을 쓰는 걸 더 선호해서요. 정치는 성미에 안 맞습니다.”
“…….”
“이 일도 사실은 우리 꼬맹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느라 아주 고역이었……”
“블라스코가 원체!”
나는 재빠르게 아빠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다 몇 년간 철저하게 준비해 온 큰 그림이었다는 걸 고스란히 밝혀서 좋을 게 없다.
“원체……! 권력욕이 없는 청렴한 성정을 타고나서요. 으하하.”
“예. 그다지 황제 감투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히 아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와 말을 맞춰 주셨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첫째 아이에게 공작 작위를 넘겨 버리고, 막내와 오지 탐사나 하러 다니고 싶거든요. 제 꿈입니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오지라고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아빠.
“고작 그깟 걸 못 했죠. 소박하기 그지없는 꿈인데.”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의 평화로운 일상을 상상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서, 나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그래, 장소가 무슨 상관이랴. 아빠가 가고 싶어 하시는 곳이라면 나 역시 세상 어디든 좋았다.
레바토 후작이 깊은 눈으로 아버질 들여다보았다. 이어질 말이 그의 마지막 질문이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손에 쥐고 주무를 수 있는 황제를 원하나?”
“아니요.”
이번에도 대답은 부정이었다.
후작이 내민 손을 잡으며, 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그저 도덕과 상식을 갖추고 사람을 사람답게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자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 * *
예정대로 그날 밤 깊은 시각, 블라스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운 하우스의 후문 쪽 정원을 완전히 갈아엎고 그 자리에 구축해 놓은 텔레포트 진이 가동했다. 이 마법진을 타고, 오늘을 대비해 아빠와 오빠가 몇 년이나 특별한 선별 과정을 거쳐 발탁한 고급 인력들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블라스코 내에서 이름을 날리는 실력자들의 집단이다.
100여 명의 대인원이 아르템에서 이곳 수도의 저택으로,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다시 두 번째 텔레포트 진을 타고 황성 앞으로 이동했다. 아르템의 기사단장 헤겔 경과 부단장 키스 경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보는 키스 경이 나를 발견하곤 아이고, 소리를 냈다.
“우리 아기씨도 저 안까지 함께 가신단 말입니까?”
“저택에 카티를 혼자 두는 게 더 위험하니까.”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빠야 당연하고, 베르너와 아르닌 역시 이번만큼은 물러나 있으려 하지 않았다.
오르겐 후작과 황후의 단죄까지는 놓칠 수 있다 쳐도 이번 상대는 황제였다. 순순히 집만 지키고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과 내일 새벽은 아스트로카의 황제가 무너지는 날이다.
역사에 남을 장면이고, 블라스코가 근 20년을 바라 온 장면인데 빠지고 싶을 리가.
게다가 내 사랑하는 아이칼마저도 저 안에 있었다. 멀쩡할 것을 안다지만 그래도 떨어진 시간이 닷새였다. 당장 달려가 안기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했다.
아르닌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우리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돼.”
차출한 인력 중에는 사바나를 관리하던 마법사들도 당연히 끼어 있었다.
“언젠가는 저희를 적재적소에 쓰실 줄 알았습니다.”
블라스코 소속 마법사들 중 대장급인 마법사, 레오 아저씨가 허허롭게 웃었다.
“마도학술원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을 거액을 주고서 빼돌려 놓고 반려동물들이나 관리하라는 임무만 던져 주진 않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설마 반란에 가담시키려는 의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하긴, 울창한 산지에 마법만으로 인공 초원을 구현하는 실력자들인데. 사바나에서 썩을 인재들이 아니기는 했다.
“난 굉장한 중책을 맡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피식거리며 레오 아저씨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력을 보여 줄 때야, 레오.”
“으음, 그 사바나의 ‘아가’들 두엇만 데려다 황성에 풀어놓아도 저희들보다 배는 더 위협적일 테지만요…….”
“말도 못 하는 애들을 데리고 뭘 해?”
“말만 못 하지 다른 건 다 너무 과격하게 잘해서 문제입니다만.”
나는 얼마 전에 크루어드에게 물려 팔이 잘릴 뻔했다는 레오 아저씨의 한탄 아닌 한탄을 흘려들으며, 저 먼 성벽을 바라보았다.
황성 위를 뒤덮은 결계는 아마 황실이 위기 상황마다 사용해 오던 비기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은 아이칼이 먼저 연락을 취해 오지 않는 한 내 쪽에서 결계 안쪽에 있는 그에게 직접 연락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왔다는 신호를 줘야 했다.
“그럼, 일단은 황성의 결계부터 해제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각하.”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자, 열두 명의 마법사들이 작은 원을 그리며 섰다.
한 명이 하나씩 열두 개의 마법을 쏘아 보내는 것보다 열두 명이 하나의 커다란 마법을 구현하는 것이 훨씬 위력이 강했다.
마법사들이 택한 방식은 원소 마법, 그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불이었다.
완성한 마법진에서 황성 위의 돔을 향해 일직선의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쏘아져 나가는 광선에 도중부터 불이 붙었다. 수십 개의 불화살이 일제히 결계 표면에 박혔다. 지축이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결계가 흔들린다.”
베르너가 얼른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혀를 씹지 않기 위해 입을 앙다물었다.
쿵, 쿵, 쿠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뒤흔들렸고, 굉음이 터질 때마다 고막이 얼얼했다.
나는 결계의 표면을 활활 태우는 불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와, 아키.’
이제 부숴. 부수고 나와. 우리가 곧바로 들어갈 수 있게.
시간이 흐를수록 등줄기가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사실 줄곧 드는 의문이 있었다.
아이칼이 결계를 깨고 빠져나오지 못할 리가 없는데, 나오려면 충분히 박차고 나올 수 있는데도 그는 왜 닷새나 황성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누구와 뭘 하면서? 왜?’
쩌엉-!
마법사들이 마지막으로 온 힘을 실어 쏜 불화살이 결계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성문에서 한참 떨어진 우리가 있는 곳까지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결계는 부서지지 않았다. 최고 수준의 마법사 열두 명의 합공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걸 보니 과연 아스트로카 최후의 보루라 할 만했다.
‘나와.’
나는 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네가 잘하는 거, 이번에야말로 하란 말이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낸 외침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이칼, 나와!”
그 순간, 내 사나운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살을 에는 혹한에 뒤흔들리는 땅의 진동마저도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결계 위에서 이글거리던 거대한 불길이 마치 촛불처럼 휙 간단히 꺼져 버렸다.
결계 안쪽에 불투명한 살얼음이 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 환희가 터졌다.
쩍, 쩍 저 위에서 결계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안쪽에서 폭발하듯 밀어내는 오러를 견디지 못한 결계가 마침내 귀청을 찢을 만큼 높은 파열음을 내며 깨져 나갔다.
채앵-!
“뚫렸다……!”
기진맥진해 루시스 경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레오 아저씨가 서둘러 다시 마나를 엮었다.
이번에는 황성 안쪽으로 연결되는 이동진이다. 그가 좌표를 그려 넣자마자 마법진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
강렬한 마나의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땐,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