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아이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확언했다.
“잘못되지 않아.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고.”
“아키.”
“난 네가 영령 따위가 되도록 두고 볼 생각은 없어.”
아이칼이 핏기가 빠져나갔을 게 분명한 내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가 일부러 오러를 순환시키며 끌어올린 열기가 뺨을 통해 몸속으로 따스하게 퍼져 나갔다.
“카티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네게만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준다고 했잖아. 내가 바로 옆에 있을 거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볼 거야.”
나는 지척의 은푸른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힘겹게 물었다.
“꼭 오늘이어야 하는 거야?”
“지금도 늦었어.”
아이칼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허공을 노려보는 시선에서 그가 상당히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탑이 무너지기 전에 해야 해. 반드시 그 장소여야만 한다고 했으니까.”
“무너진다니?”
“여긴 얼마 못 버텨, 카티샤.”
반드시 그럴 거라는 듯 그의 어조가 단호했다.
오싹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아이칼은 과장도 비약도 거짓도 없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한다.
“네 가족이 황제를 죽이면 이곳은 어떤 식으로든 붕괴할 거야. 그런 마법이야. 정확한 원리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지.”
황성이 무너질 예정이라니.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미친놈이 떠올릴 수 있는 방법에는 상식도 한계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할 일이 다 끝나면 바로 빠져나가라고 한 거야?”
“그래.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해.”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또다시 요란하게 고동쳤다. 생각의 방향이 자꾸만 귀어스트에게로 향했다.
‘역시 마검을 꺼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걸 지금 내게서 떼어 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만 같았다.
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꼭, 귀어스트가 로켓 속에서 나를 부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뇌를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칼을 거부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입을 연 순간, 그가 고개를 숙여 내게 키스했다. 내 반항을 아예 차단하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머금었다가 깊숙이 파고드는 그가 익숙하고 또 생생했다.
나는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이며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귀어스트와 로켓, 황제, 복수, 심지어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마저도 잠시 밀어 두고 그 자리를 아이칼로 가득 채웠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풍랑 속 돛단배처럼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차차 진정했다.
‘아, 또…….’
그제야 섬찟한 위기감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지금 나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아이칼의 말대로 정말 시간이 없는 거라면, 더 이상 귀어스트와 함께하면 안 되겠다. 이러다 내가 정말로 로켓을 열고 검을 잡아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아이칼은 내가 숨을 고르게 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이마에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정리한 뒤 고개를 들어 저를 보게 했다.
“나를 믿어, 카티.”
“…….”
“내가 널 위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 놈인지 생각해.”
“……알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이미 나를 한 번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돌아오게끔 한 존재다. 그러니 내가 믿을 구석도 오로지 아이칼밖에는 없었다.
나는 다시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무언의 허락을 받아들인 아이칼이 나를 다시 안아 올렸다.
나는 몸이 다시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잘될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만들어 줄 이를 두 팔로 더 세게 붙잡아 안았다.
* * *
“카티는 괜찮을까요, 아버지?”
“……아키가 옆에 있으니까.”
신수가 막내를 데리고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 블라스코 일행은 공작의 명령에 따라 다시 움직였다.
그들은 본성 바로 앞에 다다라 있었다. 혹여 입구에 설치된 트랩이 없을지 마법사들이 먼저 확인 작업을 거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그 파수꾼을 너무 믿는 것 같아요.”
마뜩잖은 눈으로 카티샤가 사라진 쪽을 흘끔거리던 아르닌이 볼멘소리를 했다.
“신수의 특성을 아시면서. 그들은 변덕이 심하잖아요. 정착을 모르고요…….”
“같은 종족이라도 열을 놓고 보면 열 명 다 제각각이지. 너와 나, 베르너, 카티샤가 다 같은 블라스코라도 성격은 조금씩 다른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루테의 얼굴에도 근심이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불길한 상념을 털어 냈다.
“섣불리 일반화하는 건 그리 현명한 사고방식은 아니다, 아르닌.”
“……그렇기는 하지만.”
“그 아이는 카티를 다치게 하지 않아. 제가 대신하면 했지. 그 정도의 신뢰는 내게 주었다.”
물론 카티샤에게 정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놈일지는 더 두고 볼 셈이지만.
아이칼이 주위에 누가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딸에게 입 맞추던 광경을 떠올려 버린 루테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세니, 우리 딸이 열아홉에 벌써 첫 키스를 했어…….’
심지어 자신이 세레이나와 처음으로 키스한 나이도 스물셋이었는데 말이다. 그게 인생 첫 키스였는데.
물론 아이칼이 카티샤의 안전이야 평생 장담해 주겠지만, 그놈이 과연 신수의 본성과도 같은 독점욕을 누르고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잖아도 카티샤는 특히나 사람을 좋아하고 정을 퍼 주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아이이기도 하니 신수를 다루는 법도 잘 알겠지. 야무진 건 세레이나를 쏙 빼닮았으니 망아지 건사하는 법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테다.
그렇게 한시름 놓고 나니, 생각이 저절로 세레이나에게로 흘러갔다.
이제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루테의 가슴 한중간에 살고 있었다.
“결혼반지는 어떤 걸로 줄 생각이에요, 도련님?”
“그 도련님 소리 좀 하지 말아 줄래? 반지야 네가 원하는 보석을 말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 가서 캐 올 수도 있어.”
“그럼 우리 신혼여행으로 다이아몬드나 캐러 갈까요? 대륙 남동부에 유명한 광산이 있대요……. 당신 건 내가 캐 줄게요. 엄청 큰 걸로.”
루테가 남몰래 미소 짓는 사이 마법사들이 점검을 끝냈다.
그는 본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500년의 세월이 깃든 장엄한 복도를 걷고 샹들리에 빛이 오색찬란하게 드리운 계단을 올랐다.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늘상 지나갔던 길을 되짚으면서도 루테는 세레이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해요. 내가 머나먼 이 제국까지 기어코 따라오게 만든 당신을.”
마침내 알현실 앞에 다다랐을 때에도. 검을 뽑아 들며 기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면서도.
“아주 많이요, 루테.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헤겔 경과 키스 경이 각각 알현실의 문짝을 하나씩 당겨 열었다.
내부에 가득 들어찬 어둠이 복도로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알현실 중앙을 가로지르는 붉은 카펫. 다섯 개의 계단을 굽이굽이 덮고 올라간 카펫의 끝에 황제를 상징하는 주홍빛 공단과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왕좌가 있었다.
황제는 바로 거기, 마땅한 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알현실의 끝과 끝에서 두 사내의 시선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처럼 선 루테를 향해 페르테스가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와, 루테.”
나의 숙적.
20년이라는 세월을 돌고 돌아 결국에는 내게서 로사를 갈취해 간 약탈자.
페르테스의 핏발 선 두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히 기다리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
공기에 바늘이라도 돋은 듯 드러난 살갗이 따끔거렸다.
루테의 등 뒤에 선 모든 이들이 전신은 물론이고 호흡마저도 바짝 긴장했다. 마법사들은 이미 입속으로 수식을 중얼중얼 외며 공작의 주위에 보호 결계를 이중 삼중으로 걸고 있었다.
잠시의 틈을 두고, 황제에게서 질문이 날아왔다.
“로사리아는 어디 있지?”
의례상 붙이는 인사말조차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이었다.
역시 그것부터 물을 줄 알았다. 제국의 가신이 칼을 빼 들고 황성에 무단 침입했는데 한다는 첫마디가 아내의 행방이나 묻는 말이라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태에 루테가 짧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 여자가 그리 좋습니까? 폐하께는 흔한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여자가.”
“그래서 그 흔한 시선을 양껏 받은 그대는 좀 행복했나?”
“물론 최악이었지요.”
“…….”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혀가 아니라 눈을 도려냈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검은 가죽 부츠가 새빨간 융단 위를 디뎠다. 루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큰 보폭으로 왕좌를 향해 걸었다.
페르테스가 손등에 핏줄이 돋도록 왕좌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는 모습이 그의 눈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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