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루테가 왕좌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들였을 때, 허공에서 날카로운 스파크가 터졌다.
아래를 겨눈 루테의 검 끝에서 흘러나간 새파란 검기가 황제의 결계와 힘겨루기 하듯 팽팽히 맞섰다. 이제는 둘의 거리도 고작 다섯 계단만큼이었다.
페르테스가 눈빛으로 그를 찢어발기고 싶은 것처럼 루테를 노려보았다.
“그녀를 어찌했어, 공작?”
“글쎄, 어찌했을까.”
“죽였으리라 여기진 않아. 로사리아는 활용 가치가 크지. 그녀를 빌미로 나를 협박해야 할 것 아닌가. 왕관을 내놓고 네 발아래 엎드리라고. 아니야?”
“하?”
루테가 눈을 크게 떴다. 페르테스가 지껄이는 말들이 하나같이 그의 예상을 비껴간 탓이다.
그가 허탈함마저 깃든 조소를 흘렸다.
“폐하께서도 그렇고 그 여자도 그렇고 참, 나를 왜들 그렇게 관대하게 보는지 모르겠군요.”
“관대하다?”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마음씨 넓고 고운 선인이 아닙니다. 그런 놈은 진작 죽었지.”
루티어드와 이엘이 숨을 거둔 날, 루테의 이름을 포함한 그의 일부가 함께 땅에 묻혔다. 세레이나의 관 앞에 섰던 날엔 그를 살아 있는 인간답게 만들어 주었던 사랑이 강제로 과거에 봉인당했다.
루테는 건조한 눈으로 살인자를 응시했다.
“네가 죽였잖아, 페르테스.”
“그래서 로사도 똑같은 꼴로 만들었다고……?”
이미 병자처럼 창백하던 페르테스의 얼굴에서 남은 생기마저도 빠져나갔다. 그의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성을 잃은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혀를 잘라 간 것으로 부족했나! 그걸 내게 보내고도! 감히 황후의 몸에 손을 대고도 모자라서……!”
막 계단을 오르려던 루테의 발끝에 새로운 방해막이 채었다.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를 펜대처럼 가볍게 휘둘러 고쳐 쥐며, 그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로사리아 오르겐이 혀를 잘린 게 괴로운가, 페르테스?”
루테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벼린 검날에 스며 있던 검기가 폭발적으로 튀어나와 황금빛 결계를 산산이 깨부쉈다.
페르테스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작 다섯 계단을 오르는 동안 살기등등한 마법이 몇 개씩 중첩되어 날아왔으나 사방으로 번개처럼 튀는 푸른 검기에 전부 잡아먹혔다.
단숨에 왕좌까지 다다른 루테가 페르테스에게 손을 뻗었다.
마지막 방어 결계를 맨손으로 거칠게 뚫어 버린 그가 황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억눌린 음성이 잇새로 튀어 나갔다.
“고작 혀야.”
숙적을 노려보는 루테의 새파란 두 눈에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불길이 넘실거렸다.
결계에 베이고 쓸린 손에서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루테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속삭였다.
“고작 혀라고.”
“커흡.”
“그 여자가 고작 혓바닥 하나 놀리지 못하게 된 게 그렇게 괴롭고 아파?”
입술을 비집고 메마른 웃음이 튀어 나갔다.
정말이지, 많고 많은 신체 부위 중 고작 혀였다. 그 어떠한 형태의 죽음에 비견해 보아도 값싼 대가 아닌가?
내 세레이나는 네게 혀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했는데.
“실은 네 눈앞에서 그 여자의 일부를 하나씩 잘라 낼까도 생각해 봤어. 악마의 유혹 같더군. 달콤해서 뿌리치기가 힘든 유혹. 사람이고 짐승이고 산 것을 도륙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렇게 끌리더란 말이야.”
“이 무도한…….”
“내게서 세니를 빼앗았던 것처럼 네게서 로사리아 오르겐을 빼앗으면 최고의 복수가 될지 않을까 싶었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너는 애초에 네 아낼 가진 적도 없더군.”
“…….”
“가엾은 자 같으니.”
루테는 냉담하게 황제를 비웃었다.
보답받지도 못할 사랑에 제 인간성마저 말살해 버린 사내가 섬뜩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로사리아를 죽이면 너도 좋은 끝을 보게 되진 않을 거다, 루테.”
“그 전에 네 목이 먼저 날아갈 것 같지는 않고?”
“그리고 나를 죽여도, 역시 좋은 꼴이 나진 않을걸.”
페르테스의 만면에 심중을 알 수 없는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날 죽이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죽을 거야.”
“망상에서 이제 그만 깨어나지. 제국군 열이 달려들어도 블라스코의 검사 한 명을 당해 내지 못할 텐데.”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멍청한 블라스코.”
루테가 혀를 차자, 페르테스가 득의양양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는 건 블라스코뿐만이 아니라고. 여기엔 너희들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루테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머리가 천천히 방금 들은 말의 진짜 뜻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모두라 하면, 범위가 어디까지라는 말이지?
“물론 그대는 괜찮을 거다, 공작. 난 네가 강하다는 걸 알아. 블라스코의 기사들도, 마법사들도 하나같이 쟁쟁하지. 그러니 버텨 낼 수 있을 거야, 틀림없이 그렇겠지…….”
“…….”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어떨까?”
페르테스가 잔악하게 속삭인 순간,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범위는 이 황성 전체다.
루테의 머릿속에 닷새간 이곳에 묶여 오도 가도 못했다던 수백 명의 황실 공무원들이 스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족을 모시는 시녀와 시종, 하녀와 하인들, 마구간지기, 황실 직속 기사단과 이 황성 어딘가에 주둔하고 있을 수천 명의 제국군 병사들까지.
수를 짐작하는 루테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페르테스가 친히 손을 내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 이곳에 발이 묶여 덜덜 떠는 이들이 족히 만 명은 될 것이다, 공작. 네가 여기서 나를 죽이면,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만 명의 오러가 동시에 역류할 테지. 왜, 거짓말 같은가?”
“오러, 역류?”
“한번 시험해 보지 그래?”
페르테스가 무서운 속도로 루테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바닥을 베었다. 갈라진 살갗 틈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이 툭 추락한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보이지 않는 마나가 그 한 방울의 피에 반응했다.
공지가 지잉 울렸다. 순식간에 허공에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떠오르며 루테를 비롯한 블라스코의 기사들을 덮쳤다.
여러 겹으로 덧씌워 놓은 결계 덕분에 마법에 당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커헉 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터졌다.
“……!”
급하게 안으로 들이닥친 헤겔과 키스가 커튼 뒤에서 어린 시종 한 명을 끌어냈다. 허리를 구부린 시종의 사지가 돌처럼 굳어진 채 마구 경련했다. 눈과 코, 입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증상의 이름이 스쳤다. 블라스코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오러 폭주……!’
도무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경악이 알현실을 휩쓸었다.
황태자가 했던 말들이 이제야 명쾌해졌다. 인간의 몸속에 흐르는 오러를 꼬아 놓는 비기의 공간 범위를 이 황성 전체로 확장하고, 그 위에 결계를 씌워 마법이 와해되지 않도록 마나를 묶어 놓은 것이다.
그 비기가 작동하도록 하는 기폭제를 자신의 피로 설정해 둔 게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아스트로카 역대 황제들이 축적해 놓은 비기술의 총집합체였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마법의 규모와 그 잔혹성에 블라스코의 마법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황제의 피 한 방울에 대체 몇 명의 목숨이 달린 것인가?
하, 짧은 헛숨을 터뜨린 루테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너는 정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했구나, 페르테스.”
“새삼스럽게. 나는 이미 선택한 지 오래야.”
여전히 그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페르테스가 태연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차피 인간으로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쥘 수 없다면, 차라리 타락한 마귀나 다름없어지더라도 내 욕망을 채우리라고.”
“허어…….”
“이제는 네가 선택할 차례다, 루테. 그대에게 이렇게 선택지까지 마련해 주다니, 참 자비로운 주군 아닌가?”
“지랄도 유분수구나.”
“그럼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잘 생각해 봐, 없을걸.”
“…….”
“너 역시 나를 죽이고, 이 성의 모든 죄 없는 인간들을 다 죽이고, 나와 같이 인간도 못 되는 금수가 되어 봐. 그것이 네 복수의 지저분한 말로야.”
루테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닥쳐.”
“20년 동안이나 형제의 이름 뒤에 숨어 걸어온 길 끝에서 네가 찾은 것이 고작 그런 것뿐인 거야, 공작. 그렇게 되고 싶어?”
듣다 못한 아르닌이 왕좌 앞으로 뛰어올랐다. 검을 빼 들고 황제의 목을 겨눈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야, 이런 개잡놈의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뚫린 입으로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버지께 헛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이러고도 황제야?”
“나는 아주 효율적이고 현명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반란군과 대치 중인데, 문제 있나? 여기서 피를 흘리는 건 나뿐이잖아.”
페르테스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바닥에는 여전히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피에 반응한 마나가 거칠게 휘돌며 알현실의 창문이 덜컥덜컥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결계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역류하는 오러에 죽음의 강을 넘나들고 있을 것이다.
상처가 난 손을 보란 듯 꽉 움켜쥐며, 페르테스가 음산하게 속살거렸다.
“루테, 잘 생각해 봐……. 지금이라도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다. 너는 내게 로사리아를 돌려주고, 너의 인간성을 지키며, 조카들과 소중한 딸, 네게 충성하는 기사들 모두와 함께 무사히 네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
“그러니 로사리아를 내놓고, 내 성에서 나가.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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