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호칭? 호칭이 문제였다는 건가?
“도…… 도련님은 싫으세요? 그러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내가 되레 물어보니 베르너가 멈칫했다. 역공에 당황하는 티가 역력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기회다!’
이때 달라붙어야 해! 충격적인 사실에 혼란스러워할 때!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베…… 베르너.”
베르너는 이런 직구에 면역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얼결에 제 이름을 내뱉었다가, 그게 꽤 괜찮은 호칭이라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못 박았다.
“그래, 베르너라고 불러라.”
“네? 이름을요?”
약간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 뭐. 야자 타임, 좋지.
“응, 베르너.”
“아니야! 존칭은 해!”
베르너가 버럭 나를 저지했다. 그는 제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나를 떼어 내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이를 갈았다.
“내가 몇 살 위인데, 이 천방지축 사기꾼 같은 게…….”
덩달아 아노미에 빠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 어쩌라는 거야?’
나는 짧은 순간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고민한 끝에 적당한 타협안을 선택했다.
“알겠어요, 오빠.”
뭐라 사납게 중얼거리던 베르너가 동작을 뚝 멈췄다. 그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쐐기를 박아 보았다.
“오빠 정도면 괜찮죠?”
아르닌이 언니면 베르너도 오빠지.
공작님은 아저씨.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호칭 정리는 곧 관계의 시작이었다.
“저는 카티샤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카티, 키샤, 뭐 아무거나 괜찮……”
나는 최대한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잇다가, 베르너에게 덜렁 잡혀 버렸다.
* * *
바둥바둥.
“으앙, 죄송해요. 저 진짜 사기꾼 아니에요. 저 헤르젠 할아버지랑 10년이나 같이 살았단 말이에요.”
“시끄러워, 이 맹랑한 거짓말쟁이.”
베르너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꼬마를 옆구리에 끼고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양 갈래로 야무지게 땋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카티샤 아인슬리라는 이름의 어린이 사기꾼이 애절하게 외쳤다.
“바로 말 못 한 건 진짜진짜 죄송해요! 오빠! 잘생긴 오라버니! 저 아직 야산에 묻힐 준비가 안 됐어요……!”
“조용히 안 해? 입 막아 버린다.”
오빠라니. 기가 막힌 호칭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한 느낌이 목을 치고 올라왔다.
오빠라니. 아카데미 후배들은 물론이고 친누이인 아르닌에게서조차 최근 몇 년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말이다. 게다가 하마터면 어제 이 맹랑한 꼬마에게 그의 비밀을 불어 버릴 뻔했다.
미친. 아버지에 관련한 얘기도 했었나?
베르너는 천만다행으로 거기까지 지껄이진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이미 간담이 서늘해졌다. 창피함에 목덜미며 귓불까지 다 화끈거렸다.
‘그런 은밀하고 사적인 속마음을, 왜 하필 이 꼬맹이한테……!’
베르너는 이상한 기분을 누를 셈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웬 누더기를 입고 있으니 못 알아보지. 넌 체면이라는 것도 모르나?”
사실 그가 무척이나 눈치 없다는 점을 참작해도 충분히 시녀의 딸로 착각할 만했다. 명색이 블라스코의 상속녀 자격으로 들어왔으면 그에 걸맞은 차림새는 하고 다녀야 할 것 아닌가!
베르너는 곧장 아래층에 있는 공작의 서재로 내려갔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활짝 열어젖히자, 언제나와 같이 서류 더미에 점령당한 서재의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공작의 모습은 서류의 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심드렁한 목소리만 날아왔다.
“남의 방에 들어올 땐 노크를 해라, 베르너.”
“노크가 중요한 게 아니죠. 왜 미리 언질 안 주셨습니까?”
베르너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카티샤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의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떴다.
베르너가 왈칵 솟아오르는 울분과 함께 외쳤다.
“애를 이렇게 입혀 놓으니 제가 못 알아보지요! 꼴이 대체 이게 뭡니까?”
“뭐?”
카우치에 비스듬히 누워 업무를 보던 공작이 그제야 그들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베르너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카티샤가 울먹울먹한 와중에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뭘 어떻게 입혔다고?”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그는 다른 이들이 뭘 걸치고 있건 알궁둥이를 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딱히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아이는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꽤 해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빨간 프릴을 단 블라우스였고 스커트는 노란색이었다. 거기에 존재감이 확실한 주황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슈즈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집합이다. 저 정도면 거의 인간 무지개였다.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넌 왜 아직도 그런 거지꼴을 하고 있냐? 마가렛이 옷장 안 채워 주던?”
“아, 옷장은 빵빵해요. 아무 문제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
답지 않게 망설이던 카티샤가 무어라 작게 웅얼거렸다.
“할아버지가 사 주신 거라서…….”
“아?”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옷인데…….”
카티샤가 조금 침울하게 웅얼거렸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내 공작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난 원색 엄청 좋아한다.”
베르너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공작은 깔끔히 무시했다.
성의 있게 카티샤의 빨갛고 노란 상하의와 초록색 신발을 관찰한 그가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름지기 옷이란 컬러풀해야지. 상하의의 조화가 아주 독특하고 창의적이군. 역시 아버지의 안목이란.”
“지금 그거 진심……”
“왜 그런 걸로 애 기를 죽이고 그러냐, 베르너.”
외려 타박을 받은 베르너의 낯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180도의 태도 변화에 아무리 둔한 베르너라도 모른 척하기는 불가능했다.
흘끔 내려다보니 아이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하도 빨빨거리며 온 저택을 들쑤시고 다니니 잠시 잊었던 사실인데, 카티샤 아인슬리는 이제 겨우 열 살이었다. 그것도 귀족가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란 평민 어린아이다.
‘반년 넘게 간호하다 임종까지 지켰다고 했나?’
순간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내겐 과분하게 훌륭하신 분을 만나서 괜찮았다’라고 말하던 카티샤의 표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훌륭하신 분은 조부님을 가리켰던 게 틀림없다.
‘어린아이가 무슨 그런 생각까지 하나 싶었는데…….’
이상하게 철이 들었다 했다.
게다가 차분하게 되짚어 보니, 결국 카티샤는 하나뿐이던 가족을 잃고 갑자기 타지로 옮겨 온 상황이었다.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게 둘러싸인 아이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제길, 이러면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잖아……!’
선수를 뺏겼다.
베르너는 재빨리 시류에 탑승했다.
“우리 할아버지 취향이 좀 해괴, 아니, 음. 감각적이시군.”
카티샤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거지 같다면서요.”
“왕은 비렁뱅이의 옷을 걸치고 있어도 빛이 나는 법이지. 할아버님이 너의 비범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으셨나 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요……?”
“너 같은 꼬맹이가 [대륙 정치사학 개괄>을 꿰고 있는데, 당연히 비범하지. 그럼. 역시 우리 할아버님이셔.”
“그게 뭐가 대단한 거예요? 모르면 무식하단 소리 듣는 상식 모음집이라고 하셨는데…….”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들의 공방을 관전하던 블라스코 공작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호오, 정규 교육까지 시켰다?’
[대륙 정치사학 개괄>은 아카데미 중고등 과정에서 다루는 교과서였다. 고작 열 살 꼬마가 이해하기에는 난이도가 심히 높았다.‘대체 뭘 데려다 어떻게 키우신 거지?’
우연찮게 집 앞에 버려진 갓난아이가 알고 보니 검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데다, 약초 배합도 하고 심지어 암기력과 이해도까지 좋아? 그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다 일러야지. 베르너 오빠가 내 옷 가지고 트집 잡았다고.”
“야, 엄밀히 따지면 거지꼴이라곤 각하께서 먼저…….”
심지어 카티샤 아인슬리는 독보적인 친화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공작은 베르너에게 으르렁거리는 카티샤를 잠깐 바라보다, 그들의 한심한 말다툼을 종식했다.
“그래도 좀 얌전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필요는 있겠다, 오렌지.”
“네?”
“마침 게스파 숙부님이 도착하신 모양이니까.”
카티샤의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용인들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게스파 블라스코. 블라스코의 최고령 터줏대감이 조금 전 아르템령을 넘었다.
11년 만의 가문 회의가 열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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