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꼿꼿이 펼쳐져 있던 귀어스트의 양 날개가 밑으로 서서히 처졌다.
[사라……졌어…….]“……뭐가 사라졌는데?”
[나비…….]나비.
블라스코의 문양에도 들어가 있는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한 나비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지혜, 영혼, 변화, 새로운 생명, 잠…….
숱한 의미들 중 귀어스트가 ‘사라졌다’, 즉 이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곁에 없다고 표현할 법한 것이라면.
“……영령.”
영령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공중을 포르르 날아다니는 영령들이 검에 갇힌 마귀의 눈에는 꼭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귀어스트는 지금 영령들과 함께 지냈던 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인가?’
내 짐작이 맞는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라도 한 듯, 마귀가 발을 쿵쿵 굴렀다. 생기가 하나도 없이 푸르딩딩한 인간의 발이라 등골이 다 섬찟했다.
[모……두……. 사라……졌……어.]“…….”
[너……밖에…….]남지 않았어-!
귀어스트의 뒷말은 엄청난 강풍과 함께 불어닥쳤다. 나는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마귀가 어쩔 줄 모르고 마구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것이 우우 울부짖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했다. 꼭 어미 잃은 짐승이 목 놓아 우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나는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겨우 내뱉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이야?
“일단 진정해 봐. 아직 나 여기 있잖아……! 착하지. 착하지!”
내가 뭔 소릴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이번에도 효과가 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귀어스트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잘……했어…….”
나는 그것이 다시금 진정했음을 확인한 뒤,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귀어스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는 여전히 걸쭉한 타르처럼 짙고 끈적끈적하게 전신에 달라붙었지만, 당장 나를 끝장내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였다.
어차피 내 죽음이 코앞이라면, 지금 당장 나를 삼켜 버리고 영령이 된 나를 검에 묶어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왜 아무런 위협도 하지 않는 거지?’
문득 마귀가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다던 영령들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귓전을 스쳤다. 그 때문일까? 나를 내려다보는 마귀의 커다란 붉은 눈이 정처 없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라몬은…… 내게…… 약속……했……어……!]“라몬께서?”
라몬. 블라스코의 초대 가주다. 마귀를 마검에 복속하고 후손들에게 영령의 사명을 맡긴 그분 말이다.
[옆에…… 계……속……, 있어…… 줄…… 거라……고…….]라몬의 유언.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귀어스트를 이어받겠다며 영령들 앞에서 멋모르고 당당히 선언하던 어린애 시절이었다. 나를 앞에 두고 그분들께서 흥분에 차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귀어스트와 영혼 깊숙이 공명할 수만 있다면, 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라몬께서 남기셨다는 유언은 오로지 귀어스트만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소, 가이우스? 우리는 전부 실패했지. 어쩌면 저 애가 마귀를 영원히 잠재우는 법을 알아낼지도 몰라.]분명 그랬다. 라몬이 남긴 유언, 마귀를 영원히 잠재우고, 영령이 진 사명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담긴 그 유언은 오로지 마귀만이 들었다고.
마귀가 쉭쉭거렸다.
……귀어스트는 틀림없이 나를 잡아먹을 악귀가 맞다.
[약속했잖아……!]그러나 어느새 두려움은 저 멀리로 떠밀려 있었다. 이 괴수는, 엄밀히 따지면 나를 위협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 차라리 징징 떼를 쓰는 것에 가까웠다. 아이가 어른을 붙잡고 보채듯이.
영령이 떠나면 제 생존도 위협당하리란 사실에 분노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싫은 거야.’
머릿속에 번쩍 깨달음이 스쳤다.
집이나 다름없었던 탑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늘 곁을 날아다니던 ‘나비들’도 사라진 마당에, 제 유일한 주인인 나마저 저와의 계약을 끊어 버릴까 봐.
혼자 남는 게 싫은 거야.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라몬이 약속했다면서 우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를 짓눌렀던 절망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껏 세웠던 가설들이 완전히 뒤집혔다.
되짚어 보면, 귀어스트가 본격적으로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던 건 영령의 탑이 무너지고 영령들이 탑 밖으로 밀려난 이후부터였다.
그 뒤로부터는 나 혼자 귀어스트를 지켰다. 봉인이 점차 약해질수록 귀어스트도 불안해했다.
불안감. 불완전한 미완의 존재들만이 느끼는 두려움.
“……넌 뭐가 두려운 거야?”
나는 똑바로 눈을 들어 마귀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확인해야 했다. 검에 봉인된 500년 동안 귀어스트가 정말로 바라온 게 무엇인지.
“다시 천천히 말해 봐, 귀귀. 라몬과 했다는 그 약조,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어?”
* * *
로켓 밖의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흐르지 않는 시간. 정지한 세계. 산 자들의 호흡은 물론이고 뒤틀리던 마나의 흐름조차 멈춘 공간에는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균열이 일어났다.
쩌억 하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시간이 멈춘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치에 하얀 성에가 끼었다. 곧 그를 중심으로 얇지만 견고한 살얼음이 돌바닥을 뒤덮고,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탑이 얼어붙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아르템에 세워진 쌍둥이 탑과 같은 모습으로.
탑이 외벽과 내벽 할 것 없이 수정처럼 매끄러운 얼음으로 뒤덮였다.
허공에 입김처럼 터지는 하얀 오러가 눈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모든 변화의 한가운데 선 신수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 손이 손등에 핏줄이 돋을 만큼 꽉 움켜쥐어진 순간, 그의 시간이 정지 상태에서 깨어났다.
아이칼이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로켓이 카티샤를 빨아들인 지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은푸른빛 시선이 휘릭 움직여 텅 빈 품 안을 확인한 뒤 곧바로 바닥에 널브러진 로켓으로 향했다.
아이칼의 낯에서 표정이 모조리 날아갔다.
허리에 찬 검을 뽑아낸 그가 검을 횡으로 휘둘러 허공을 베어 냈다. 검기에 깃든 여신의 권능이 세차게 뻗어 나가며 정지한 세계를 깨웠다.
로켓과 연관된 자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바깥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로켓은 그저 ‘사라진 세계’에서 그가 부수어 버린 영령의 탑의 일부를 긁어모아 만든 아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깥 세계의 시간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정지할 수가 있나? 누군가, 이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하지 않고서야.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 아이칼이 성검을 휘둘러 멈춘 시간을 깨뜨린 순간, 그 누군가의 정체는 이미 까발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막이 완전히 날아갔다. 물속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하기까지 하던 고요가 부서지고 백색 소음이 쳐들어왔다.
“어?”
초점이 없던 프리츠의 눈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시간이 잠시 멈추었던 사이의 간극을 눈치채지 못한 그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공녀는 어디로 갔, 악!”
프리츠의 뒷덜미가 억센 손아귀에 잡혀 번쩍 위로 들렸다.
그가 놀라 버둥거리거나 말거나, 신수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프리츠를 질질 끌어 빛을 발하는 마법진 위에 세웠다.
“하, 하라고? 마저? 하지만 아무도 없는데…….”
마기를 몰아낼 대상이 없는데 마법을 발동하면 뭐 한다고?
그러나 프리츠는 저를 꿰뚫어 버릴 듯 응시하는 한 쌍의 형형한 안광에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알겠어. 하면 되잖아.”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카티샤는 어디로 간 것이며, 저 신수는 또 왜 저렇게 싸늘해진 것인가?
심지어 탑 내부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매끄러운 얼음으로 뒤덮인 탑의 내벽이 창문으로 들이치는 달빛을 반사해 눈이 아플 만큼 번쩍거렸다. 어둠마저 물리친 얼음벽이 어찌나 투명한지 꼭 사방이 거울로 뒤덮인 듯했다.
프리츠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제기랄, 하라면 해야지 뭐 어떡하겠는가? 제가 믿을 거라곤 이 마법뿐인데.
절반쯤 완성된 마법진 위로 다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완성되는 동안, 아이칼이 활짝 펼쳐진 조개 모양의 로켓을 주워 들었다. 그것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든지 연신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는 벌어진 로켓을 툭 건드려 닫았다.
로켓을 다시 열기 전에, 아이칼은 흘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 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신은 이곳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는 무표정한 그대로 입술만 달싹였다.
베라고 했지.
잘 봐.
아이칼이 엄지를 튕겨 로켓을 열었다.
로켓이 다시금 활짝 벌어진 순간, 그 속에서 붉은 광선과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로켓을 연 자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힘보다 안에 갇혀 있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힘이 훨씬 강했다. 무언가가 로켓 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인영이 마법진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마기가 빠르게 그 주위를 휘돌았다. 언뜻 긴 주황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광경이 보였다.
마기가 새하얀 오러와 힘겨루기를 하며 맞섰다. 휘도는 마기의 빈틈을 파고 들어간 신수의 오러가 폭죽이 터지듯 증식한 순간, 마기에 둘러싸여 있던 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신음과 함께였다.
“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던 그녀의 주황색 머리칼이 길게 풀어 헤쳐져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