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 * *
본성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고작 10여 분이 지나는 동안 알현실 안의 모두가 위화감을 느꼈다. 시간은 고작 5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표정을 굳힌 베르너가 제 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바닥이 얼고 있다…….’
매끈한 얼음이 점차 알현실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위로 희미하게 흐르는 것은 분명한 마기였다.
쩌적거리며 바닥이 얼어붙는 소리가 루테의 귀에도 닿았다. 그는 왕좌를 향해 다가오는 살얼음을 힐끗 일별했다가, 문득 마나의 흐름이 기묘하게 잠잠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나의 반응이 느려졌다. 황제의 마법에 어딘가 빈틈이 생긴 것이다. 페르테스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얼굴에서 여유가 한 점씩 날아가고 있었다.
아이칼과 카티샤가 밖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기회였다.
루테는 사방에서 이쪽을 포위한 마법사들의 기척을 읽었다.
준비는 끝났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알현실 한가운데 떠 있는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이동진은 곧 루시스 경과 로브로 온몸을 감싼 누군가가 모습을 뱉어 냈다.
루테가 루시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황후 폐하를 이리 모셔라.”
후드를 푹 뒤집어쓴 여자가 비틀거리며 루시스 경에게 이끌려 다가왔다. 후드 아래로 한 가닥 흘러나온 붉은 머리카락과 익숙한 체구를 확인한 페르테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떠올랐다.
“검을 치워! 로사리아를 내게 보내는 것이 먼저다.”
루테가 아르닌에게 눈짓했다.
칫 소리를 낸 아르닌이 황제의 목을 겨누던 검을 검집에 꽂고 계단 아래로 물러섰다.
로사리아와 기사가 가까워질수록 황실의 병사들이 한 발씩 앞으로 나오며 공작을 압박했다.
“모셔왔습니다, 각하.”
루시스로부터 여자를 인도받은 루테가 페르테스에게서 검을 치우는 동시에, 대신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일련의 동작에 정중함이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휘청거리는 여자의 어깨를 억세게 틀어쥔 루테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 모질게 굴진 않았습니다. 보면 알겠지만.”
후드 아래로 시체처럼 창백한 로사리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색이 나쁘다는 것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전혀 없었다.
틀림없는 제 아내임을 확인한 페르테스가 왈칵 인상을 구겼다. 그가 그녀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이리 와, 로사.”
“…….”
“이제 다 괜찮아.”
남편을 본 로사리아가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울음을 내뱉느라 벌어진 그녀의 입술 안쪽이 이상하리만큼 휑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그저 검기만 했다.
페르테스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그가 직접 그녀를 끌어당기기 위해 황좌에서 한 발짝 움직인 순간이었다. 페르테스의 관심이 완전히 눈앞의 아내에게로 쏠린 그 찰나. 뒤쪽에서 기민하게 타이밍을 재던 베르너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내가 미안해, 로사. 당신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하나, 둘.
“어디 봐. 다른 다친 곳은…….”
셋.
베르너의 오른손이 허공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알현실 문 앞과 양옆의 창문 뒤, 위쪽의 난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쏘았다.
“…….!”
로사리아의 팔뚝을 잡아 옆으로 홱 밀쳐 낸 루테가 간발의 차로 화살처럼 날아오는 구속 마법을 피했다.
다섯 개에 달하는 마법이 오로지 황제를 향해 쇄도했다. 페르테스가 조치를 취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큭!”
황금빛 사슬이 황제의 양 손목과 발목을 휘감아 그를 무릎 꿇렸다. 사지만 결박한 것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사슬이 그의 입술 사이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렸다.
페르테스가 짐승처럼 몸을 비틀며 고개를 휘저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황실의 기사들이 막 왕좌 위의 공작에게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더 다가오지 마라.”
공작의 서슬 퍼런 일갈이 그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저를 포위한 기사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너희를 인질 삼아 저열하게 협박한 자다. 그런 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은가?”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루테의 싸늘한 시선이 가장 선두에 선 기사단장에게 향했다.
“레히트 경.”
이름을 불린 기사단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공작에게서는 황실 기사들을 향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살기가 향하는 곳은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내게 검을 겨누기 전에 잘 생각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
당연히 아니다. 스무 명, 서른 명이 떼로 달려든다 해도 검의 최정상에 선 오러 유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니 공작은 지금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셈이었다.
황실 기사들의 머리 위로 동요가 스쳤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기사이기는 하나, 검을 쓰는 자라면 눈앞의 사내를 선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닥 남은 충심이 발목을 묶었다. 황제 직속 기사는 일반 사병과는 달랐다. 황제가 직접 발탁해 기사 서임을 하고 측근으로 임명한 자들이다.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기로 신 앞에 맹세한 이들이었다.
갈등하는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공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부로 황제의 지위를 박탈당한 자를 위해 목을 내놓고 싶어?”
“……각하.”
“이런 자를 위해 아까운 충심과 명예를 낭비하지 마라, 레히트 경. 덤으로 목숨도. 로드리고 경이 어떤 꼴이 났는지 알지 않나.”
에펠 로드리고.
오르겐 후작의 지원을 받아 파르세네 검술제에 참가했다가 신수에게 얻어터진 전대 기사단장이었다.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아직도 팔다리에 딱딱한 석고를 달고 있는 자다.
루테가 검을 고쳐 잡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황실 기사단에 그 이상의 인적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글쎄. 이렇게 나를 가로막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피 보기를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건조하게 말을 맺은 그가 검 끝으로 페르테스의 머리에서 황제의 관을 벗겨 냈다.
지존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왕관이 초라하게 카펫을 굴렀다. 아스트로카의 치욕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으나, 아무도 공작을 저지하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황실 기사단 중 누군가가 검을 놓고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시작으로 기사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놓기 시작했다.
“……오늘 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사단장 레히트 경이 검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하!”
제 기사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빠짐없이 목도한 페르테스가 재갈 물린 입으로 쇳소리를 냈다.
그가 핏발이 성성하게 돋은 붉은 눈으로 루테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페르테스의 입꼬리가 순간 비쭉 솟았다. 그가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네 뜻대로 될 줄 알고?
“……아직도 입이 살았구나.”
루테가 마른 실소를 흘리며 페르테스의 턱을 손으로 치켜들었다.
엄지로 그의 입술을 툭툭 치며, 루테가 냉담히 뇌까렸다.
“이 입으로 꼭 들어야 하는 말이 있는데.”
“으흐흐, 흐흐…….”
“안타깝게도 내 형제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본 이가 너라, 페르테스. 그날 네가 대면했던 루티어드의 눈빛, 표정, 말 한마디까지 전부 다 알아야겠거든, 나는.”
“…….”
“그러니 기억을 제대로 더듬어 봐야 할 거야. 아무리 왕좌에서 내쫓겼대도 아내가 네 앞에서 목이 잘리는 걸 보고 싶진 않을 것 아닌가?”
페르테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작게 킬킬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숨이 넘어갈 듯 광소를 터뜨렸다.
더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루테가 혀를 차며 명령했다.
“황성의 마법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는, 귀한 옥체에 흠집 하나 나지 않도록 잘 모셔라. 끝까지 최악이군.”
“흐흐흐…….”
“황제의 처분은 7귀족회를 통해 결정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지하 감옥에 묶어 놔.”
루테는 자꾸만 검자루로 향하려는 손을 필사의 노력으로 인내했다. 당장 저자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눈앞이 벌게질 지경이었으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루테는 턱을 단단히 당긴 채 제 앞에 무릎 꿇은 사내를 발로 퍽 찼다.
“어느 쪽이든 곱게 죽을 생각을 하진 않는 게 좋을 거다, 페르테스.”
“흐흐. 크흐흐.”
페르테스가 연신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두 눈에 안광이 아직 식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벙싯거렸다.
나만 죽진 않지.
루테는 더 보고 있기도 싫다는 듯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또다시 마나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황성의 어딘가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작동을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눈길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밑…… 지하?’
그 깨달음에 확신을 더하기라도 하듯, 본성의 밑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불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지 거대한 기운끼리의 충돌이 아니었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각하, 건물이……”
헤겔 경이 긴박하게 입을 연 순간,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알현실 벽에 금이 갔다.
루테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네가 물러가고 나면, 어차피 이 성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게 이런 뜻이라고?
마침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루테가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사람들을 대피시켜. 지금 당장!”
황성이 붕괴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