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니까 나를 믿어, 아이칼. 난 절대로 귀어스트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을 거고, 그에게 내 일부를 빼앗기지도 않을 거고, 귀귀를 힐라이야의 품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을 거야. 어쩌면 이미 다 나와 있는지도 몰라. 라몬의 유언을 다시, 제대로 듣고 보기만 하면…….”
“…….”
“그러니까 딱 사흘만 뒤로 미루자. 사흘이면 돼.”
네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절대로 나 스스로를 위험 속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결국 네가 너를 버리게 만드는 짓이란 걸 아니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칼도 충분히 이해할 거라 믿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절대 다치지 않고, 다칠 수 있는 짓을 감행하지도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내가 빈말을 한 게 아니듯 그 역시 그럴 것이다.
왈칵 눈물이 났다.
사실은, 내가 아이칼이라도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미친 짓처럼 보이겠지. 아까 마귀에게 홀릴 뻔한 모습까지 죄 보여 줘 놓고, 몇 시간도 안 돼서 위험을 자초하겠다고 나섰으니…….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내 확신을 믿어 주면 안 될까.
결국 내 음성에도 물기가 돌기 시작했다.
“풀어 줘.”
“…….”
“나 아파, 아키. 손목 아파…….”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영원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초, 아니, 몇 분이 지났을까.
손목과 팔다리가 서서히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포박했던 얼음 줄기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해방감과 함께 두 팔이 먼저 자유를 찾았다.
그다음은 다리였다. 불꽃놀이처럼 탁 퍼진 새하얀 오러가 발밑에서 돌아가던 마법진에 떨어지며 마나를 할퀴었다. 내 심장께까지 물러났던 마기가 도로 훅 무거워지며 발끝까지 가라앉았다.
마법이 멈췄다. 그가 결국에는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 져 준 것이다.
나는 속박에서 풀려나자마자 아이칼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 나갔다.
“사랑해.”
“……아닌 것 같아.”
끝 음이 무참히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카티는 나를 사랑 안 해.”
“아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이런 선택을 하게 둘 리가 없어. 네가 이렇게 애원하면 내가…….”
“…….”
“내가, 절대 외면하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가 여전히 나를 안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칼의 음성은 여전히 축축했지만 설움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 순간, 그가 나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손길이 묘하게 매몰찼다.
드디어 올려다볼 수 있게 된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칼의 눈 밑에 드리워 있던 붉은 기가 서서히 날아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말이 튀어 나갔다.
“아키, 키스해 줘.”
나를 물끄러미 보던 아이칼이 고개 숙여 입술을 맞댔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키스는 아니었다. 짧게 입술을 붙이기만 하고 떨어지는 동작에는 열기도 뭣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칼의 화는 아직 꺼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속을 다스리던 아이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손에 내 목숨까지 달렸다는 걸 명심해, 카티.”
“어…….”
“너야 일이 잘못돼도 영령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뻔해. 그렇게 되는 날엔, 넌 두 번 다신 내 얼굴을 못 보게 될 줄 알아.”
“…….”
“난 죽어 영령이 되는 재주는 없으니까.”
고저 없이 내뱉는 목소리가 북풍한설이 따로 없었다. 등골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되면 저도 따라 죽겠단 소리다.
“아…… 알았어. 알고 있어…….”
알지, 그럼.
내가 파랗게 질려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위협적인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대체 오늘만 지진이 몇 번째인지 이제 헤아릴 수도 없었다.
나는 황급히 눈을 굴려 밖으로 뚫린 창문을 찾았다. 작은 조각창 너머로 보이는 황성의 전경에는 이미 흙먼지가 자욱했다. 본성 쪽은 이미 먼지구름으로 뒤덮여 형체마저도 흐릿했다.
또 마법이라니. 이번에는 대단위 파괴 마법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황제의 짓인가?
아주 산 넘어 산이다.
‘최후의 발악을 뭐 이따위로 해!’
가족들과 블라스코의 기사들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본성에서도 황제를 제압하고도 남았을 테니, 성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에 이동진을 타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급한 대로 아이칼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아키. 나가서 다시 이야기해.”
“그냥 있어.”
“응?”
그제야 나는 아이칼의 오러가 허공에 끊임없이 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온몸으로 전해지던 불길한 진동이 서서히 멎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크게 돌려보았다. 뿌리째 뽑힐 듯 거칠게 흔들리던 탑이 거짓말처럼 다시 고요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금까지의 모든 일을 잠깐 잊고 입을 허 벌렸다.
황성의 붕괴가 멈췄다.
“어떻게 한 거야? ……아.”
때마침 불어닥친 설풍에 이곳저곳에서 매캐하게 피어오르던 모래먼지가 훅 쓸려 나갔다.
이윽고 창밖으로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석영 조각 같은 성이 반짝이는 빛무리를 흩뿌렸다. 본성뿐만이 아니었다. 동쪽으로 보이는 마법 관리국을 비롯한 황실 공관들도, 서쪽 저 멀리 있는 황후궁과 황태자궁도, 심지어는 드넓은 미로 정원이 있는 중앙 후원마저도 불투명한 얼음에 갇혀 있었다.
쩍쩍 갈라진 땅의 균열 속에서도 얼음이 차오르며 지진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눈앞에 보이는 온 세상을 뒤덮은 얼음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꼭 크리스털로 만든 세계 같았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표현하기에 기적이라는 말보다 더 걸맞은 단어는 없었다.
나는 넋 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가 겨우 아이칼을 돌아보았다.
“넌, 진짜…….”
“진짜, 뭐?”
돌아온 대답이 한없이 싸늘했다.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대, 대단하다고.”
“…….”
“멋지다. 응…….”
아이칼은 내 어색한 칭찬을 그대로 묵살해 버렸다.
그가 내게서 휙 등을 돌렸다. 눈 깜짝할 새 그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어, 어디 가? 아키!”
다급히 불렀지만 대답 같은 건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창문으로 목을 내밀어 밖을 살폈다. 어느 순간에 저기까지 간 건지, 커다란 설표가 저 멀리의 첨탑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화났다…….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화가 났다. 내게 져 준다는 게 내 선택을 납득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나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목 뒤로 삼켰다.
이제 내 선택이 무모하지 않았다는 걸 결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뒤돌았다.
귀어스트는 두 발과 두 손으로 첨탑 외벽을 꼭 붙든 채 석상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내가 손짓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마귀가 날개를 펼쳐 이쪽으로 내려왔다.
나는 검을 횡으로 들고 귀어스트를 향해 내밀었다.
“너도 이제 다시 검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귀귀. 약속했지?”
평범한 인간들은 마기에 닿기만 해도 잠식된다. 가족들이 마귀가 검 밖으로 튀어나온 이 경악할 광경을 목격하기 전에 얼른 이 애를 수습해야 했다.
씨이, 얘 때문에 아키랑 또 싸웠어…….
나는 괜히 눈을 세모꼴로 뜨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까처럼 나 홀리지 마. 그런 식으로 날 독차지하려고 들면 네가 좋아하는 나비들, 단 한 분도 보여 주지 않을 거야. 알겠어?”
우리의 계약이 다시 돈독해진 것을 느꼈는지, 귀어스트가 거대한 머리를 얌전히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곧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귀의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오래지 않아 그것의 형체가 짓눌린 토마토처럼 팍 터져 나갔다.
시커먼 마기 덩어리가 내가 든 검자루로 흘러들어 왔다.
온몸이 다시 무겁게 늘어졌다. 그러나 반절 정도라도 초대의 비기가 작용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전보다 훨씬 버틸 만하다.
나는 팔다리가 제대로 잘 움직이는지 확인한 뒤 곧장 계단을 향해 뛰었다.
일단 나가자. 밖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 했다.
막 계단을 달려 내려가려는데, 탑 안쪽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공녀……. 카티샤……?”
미끌미끌한 빙판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인 금발 머리. 프리츠였다.
맞다, 쟤도 있었지…….
나는 오늘 밤 내내 나와 아이칼에게 번갈아 시달리며 초췌해진 프리츠에게 애잔한 눈빛을 던졌다.
“거기 잠시 계세요, 전하. 곧 사람을 보낼 테니까.”
“사, 살려 줄 거지?”
“일단은요…….”
무려 초대의 비기를 이만큼이나 구현해 낸 공이 있으니 당장 어찌할 수도 없고.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은 본성으로 가자. 아빠가 황제를 어찌 처리했는지 그 전말을 확인해야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