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 * *
계절에 전혀 맞지 않는 입김이 허옇게 이지러졌다.
황성의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아스트로카의 심장이 언제부터 이렇게 서리 낀 얼음 궁전이었던가. 생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온 사방이 눈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이칼이 정말 작정하고 힘을 쓰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심지어 그다지 힘든 기색도 아니었잖아…….
나는 본성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나를 알아본 블라스코의 기사들이 소리쳤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엄청 괜찮아요!”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아키…… 아니, 그 신수는 어디에 두셨고요?”
“곧 와요……!”
아마도.
내게서 당연히 아이칼을 찾는 이들을 보니 울고 싶은 기분이다.
본성을 향해 가는 길 양옆에 황성의 주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투명한 얼음 속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실금이 잔뜩 간 외벽이 비쳐 보였다. 저대로 붕괴했다면 저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황성 공무원들은 그대로 압사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곳은 없었다. 이따금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이 기사들에게 업혀 나오곤 했는데, 아마도 황제의 비기에 당한 이들인 듯 보였다.
대부분이 사무를 보는 일반 공무원들이었다. 아마 평소 체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오러 역류를 정통으로 당한 모양이다.
마법사들이 그들의 오러를 정상적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회복 마법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미친놈, 정말…….”
나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본성으로 뛰어들었다.
빙판으로 변한 바닥에 자잘한 얼음 알갱이들이 잔뜩 굴러다녔다. 덕분에 대차게 미끄러지는 것은 면했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알현실, 알현실이 어디……?”
그러나 낯선 성안을 헤집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방문객을 처음으로 맞아들이는 본성의 중앙 홀. 나는 그곳에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섰다.
까마득한 높이에 걸린 샹들리에 빛이 비추는 홀의 정중앙에 높다란 게양대가 서 있었다. 게양대의 가장 위에는 아스트로카의 국기가, 그 밑에는 현왕조인 베르누아 왕조의 깃발이,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개국 공신 가문인 블라스코의 깃발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그중 베르누아 왕조의 깃발이 밑으로 끌어 내려지는 중이었다.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던 이가 내 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카티샤?”
아빠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울컥 치미는 감정의 덩어리를 삼키며 다시 걸음을 떼었다. 아빠는 혼자가 아니었다. 베르너와 아르닌 역시 그곳에 함께 있었다.
“카티, 괜찮은 거야?”
베르너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황제는요?”
“과정이 좀 번거롭기는 했는데, 일단 본성 지하에 임시로 구금해 뒀어. 차후에 황제의 처분을 귀족회 안건으로 올릴 예정이고.”
“우리 쪽의 부상자는?”
“아무도. 다 무사해.”
“다행이다…….”
그제야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이제 막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당초 예상했던 시간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지막 지진은 뭐였어요?”
“페르테스 베르누아가 최후의 수단으로 걸어 놓은 마법. 블라스코에게 장악당하느니 차라리 다 부숴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나 본데, 결국 뜻대로 되진 않았지. 급하게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긴 했는데…….”
본성 밖을 살피는 오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건 분명히 아이칼이 개입한 거지? 맞지?”
“응…….”
“갑자기 마기의 농도가 너무 짙어져서 걱정했어. 초대의 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지?”
“아무……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나는 겨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였다.
미심쩍게 내 면면을 뜯어본 베르너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오빠의 손을 잡고 아빠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땠어요, 아빠?”
“글쎄.”
아빠가 모호한 미소를 띠며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빠도 나와 별다를 것 없어 보였다. 지금 입에 담기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예감한 것이다. 나 역시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그냥 웃어 보였다.
우리는 결국 서로가 무사하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사이 베르누아 왕조의 상징 문양이 그려진 깃발은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헤겔 경이 깃발을 낚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각하.”
그가 아빠에게 성냥을 건넸다. 아빠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곧 성냥에 치익 불이 붙었다. 아빠가 불붙은 성냥을 깃발 위로 툭 떨어뜨렸다.
주홍색 깃발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불씨에 잡아먹힌 왕가의 문장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깃발이 전소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아빠의 몸에서 훅 피어오른 새파란 오러가 불길을 꺼뜨렸다. 깃발이 있던 자리에는 검은 재 가루만이 수북이 쌓였다.
이제 높은 게양대에 걸린 깃발은 아스트로카, 그리고 블라스코의 상징뿐이었다.
“…….”
누구도 지금 느끼는 심정을 쉽사리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희열, 오래 앓아 썩다 못해 곪아 들어간 이를 뺀 것만 같은 후련함, 수십 년을 염원해 온 목표를 드디어 이루어 냈다는 고양감.
정적을 깬 사람은 바로 나였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게양대 앞에 모인 이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죠?”
아르닌 언니가 홱 나를 돌아보았다. 언니의 만면에 눈이 부신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눈꼬리에 작은 눈물방울을 매단 채, 언니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다음으론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환호성이 따라왔다. 언니의 비명 같은 환호가 홀 안의 기사들에게로, 그리고 본성 바깥에서 대기하는 이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이 밤에 벌어진 모든 일의 성공을 알리는 기꺼운 환호성이었다.
“카티, 우리 이쁜이!”
내 쪽으로 다가온 언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는 내 양 뺨에 마구 키스하곤 곧바로 아빠에게 옮겨가 똑같이 안겼다.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
“……너야말로, 아르닌.”
잠시 굳어 있던 아빠가 이내 아르닌 언니를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었다.
“네 아버지도 너를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물론 어머니도.”
“정말 그럴까요?”
“그래. 왕관은 네가 가져가라. 묘비 앞에 놓아 드려.”
아르닌 언니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다음으로 언니가 향한 이는 베르너였다. 휘날리는 블라스코의 깃발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오빠의 등을 언니가 퍽 쳤다.
“오빠 너도! 너도……!”
“……아르닌.”
“진짜, 너무, 너무 길었……”
언니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베르너가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언니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평소 같았으면 징그럽게 안긴 왜 안느냐며 질색을 했을 언니도 이번만큼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빠가 헤겔 경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7귀족회의 일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성안으로 들여. 지금 이 시간부로 베르누아 왕조의 패망을 공인하며, 7귀족회에 의한 일시적인 공화정 체제로 전환한다.”
“예, 각하!”
누군가 블라스코를 외치며 선창을 시작하자, 여럿의 목소리들이 더해졌다. 블라스코의 이름이 온 황성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함성까지 듣고 나서야 나도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진짠가 봐…….”
끝났다.
블라스코의 복수가 마침내 정상을 디뎠다.
모두가 기쁘게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등을 두드리는 사이에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선 사람은 둘뿐이었다. 나와 아빠.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아빠의 곁에 섰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빠가 천천히 물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지, 카티?”
“그럼요. 처음부터 단 한 번도요.”
“……네 엄만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제가 장담하는데 단 한 번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을 끊었다.
“엄만 단 한 번도, 아빠를 원망한 적은 없었을 거예요.”
예전에는 엄마의 사랑을 그저 관념적으로만 이해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그분이 숨을 거두실 때 어떤 심정이셨을지, 여전히 다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이해한다. 사랑이란 게 얼마나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인지 아는 나이가 되어서야.
아이칼이 기어이 내게서 귀어스트를 떼어 내고 마귀의 부활을 앞당겼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 그를 원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까.
그러니까 엄마도 분명히 아셨을 거야.
“……그래.”
아빠가 고르지 못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으로 빗어 준 뒤, 이마에 입을 맞춰 주셨다.
나는 힘겹게 명랑한 목소리를 짜냈다.
“이제요, 아빠.”
“…….”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거예요. 아빠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만 잔뜩 하면서요. 나랑 같이!”
귀찮고 성미에도 맞지 않는 작위 같은 건 언니 오빠에게 주고, 나랑 오지 탐사도 하러 가고, 엄마의 고향에도 가 보고, 블라스코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들은 뒤에서 손도 좀 봐 주면서. 지난 20년 동안 포기해야만 했던 삶을 다시 살아가는 거다.
그렇게 내가 한참을 흥분에 차 주절주절 늘어놓은 뒤에야, 아빠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기특하다는 듯 검지로 내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아빠가 장난스럽게 마주 속삭였다.
“카티, 이미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어.”
“네?”
“아버지가 너를 내게 보내 주신 그날부터. 어쩌면 네가 나를 알아봤던 그 순간부터.”
“…….”
“네가 내게 이름을 돌려준 그때 이미 나는 내 삶을 돌려받았던 거야. 네가 내 삶과 사랑의 증명이나 다름없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