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목을 더듬어 로켓을 끄집어냈다. 조개껍데기에 쩍 금이 간 로켓은 대충 보기에도 무척 불안정했다. 아공간이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얼른 들어가 봐야 한다.
그러나 낮게 혀를 찬 헤르젠 할아버지가 나를 저지했다.
[너희는 아무래도 문제를 같이 해결할 필요가 있겠다. 자꾸 한쪽이 독박을 쓰려 하니 양보가 안 되나 보구나.]“같이, 어떻게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귀귀의 기억, 둘이 같이 보고 와.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좀 가져 보렴.]하지만, 아이칼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영문을 모르고 젖은 눈만 깜빡였다. 할아버지가 괜찮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먼저 들어가 있거라. 우리가 책임지고 아키도 끌어다 넣어 주마.]* * *
영령들은 옹기종기 모여 카티샤를 삼킨 로켓을 들여다보았다. 한숨이 연달아 터졌다.
[하여튼 고집은 둘 다……. 천생연분이 아니었다면 철천지원수가 됐겠어.]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서는 노인네들 찾아와 투정 부리는 것까지 판박이야.]카티샤가 아공간으로 들어간 뒤에도 바깥의 시간은 아무런 문제없이 흘러갔다. 아마 저 계단 뒤에 버티고 있는 놈 덕분일 것이다. 아이칼과 그 주변은 이제 더는 로켓이 지배하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헤르젠이 반원을 그리며 계단 밑으로 날아갔다.
[먼저 온 고집쟁이, 이제 좀 나오지 그러니?]긴 다리를 대충 뻗어 놓고 벽에 기대앉아 있던 아이칼이 피로한 기색으로 눈을 들었다.
“고집을 부리는 건 방금 그 로켓에 들어간 애 아닌가?”
[너를 많이 사랑해서 무섭다잖느냐. 네가 지난번에 내게 했던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그건 이유가 안 돼. 방금 카티가 한 말로 내가 확신한 게 있다면, 우린 이 문제로 평생 싸울 거란 점이야.”
아이칼의 말투는 냉담했지만, 그를 아우르던 살이 에일 듯한 한기는 한 꺼풀 걷혀 있었다.
헤르젠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그래서 여기 앉아서 몰래 엿듣고 있었느냐?]“여기 먼저 와 있었던 건 난데.”
[그래, 네 편 들어 달라고 왔지. 그래서 그렇게 했잖느냐.]아이칼이 영령들이 모여 있는 이 산장을 찾은 건 서너 시간 전이었다.
눈보라를 휘날리며 들이닥친 신수는 구석에 틀어박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육아의 달인인 영령들이 살살 어르고 달랜 뒤에야 싸늘한 투정을 내놓았다.
“싸웠어.”
[그건 거꾸로 날아가면서 봐도 알겠다. 그러니까 왜 싸웠느냐고.]“나보다 그 자식이 더 좋대.”
[으이? 그럴 리가 없는데? 카티는 아키뿐일 텐데?]“그럴 리가 있던데. 아공간에서 그 못생긴 거랑 무슨 얘기를 정답게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으러 가겠단 소릴 길게도 하더라.”
[못생…….]“딱 사흘만 달래. 3분도 싫은 마당에 사흘이라? 기도 안 차서 무시했더니 울었어. 그럼 내가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어?”
[네 마음이야 잘 알겠다만, 어쨌든 탑은 무너지지 않았다면서? 카티 몸 상태도 점검할 겸, 사흘 정도는…….]“걔한테 지금 제일 위험한 게 시간이 계속 흐르는 거라고. 왜 이런 식으로 나와? 나랑 서로 돕기로 했잖아. 설마 영감도 마귀를 안타깝게 여겨?”
[아이구, 그럴 리가. 실언했다. 카티가 아주 나빴네!]대충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와중에 카티샤가 아이칼과 똑같은 기세로 들이닥쳤다.
카티샤의 기척을 느낀 즉시 눈표범은 홱 꼬리를 물고 계단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정말 카티샤의 얼굴 한 번 훔쳐보지 않았다.
대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얼마나 크게 다투었길래.
헤르젠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아직 네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면야. 그럼 이건 필요 없다는 게지?]카티샤가 들어간 조개 모양 로켓이 아이칼의 눈앞에서 보란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의 은푸른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로켓을 따라 움직였다. 아닌 척해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헤르젠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카티랑 귀귀랑 틀림없이 또 비밀 이야기를 잔뜩 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 흠흠.]비밀이라는 말에 아이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지어 꿈속에선 귀어스트가 인간 모습이라던데…….]“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우리 손녀, 나랑 지 애비 보고 자라서 눈이 한없이 높은 건 알지? 그런데 귀귀가 마음에 들었다니. 마귀가 왕년엔 꽤 미남이었던 모양이야.]“…….”
[어쩐다. 미인계에 빠지면 답도 없는데. 안 그러냐, 아키?]아이칼이 대답 대신 로켓을 휙 낚아챘다.
헤르젠은 순식간에 로켓을 열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호쾌하게 웃었다. 둘 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다.
너희가 싸워 봤자지. 헤르젠은 로켓을 다시 소중히 들어 올리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 * *
아이칼은 탐탁지 않게 저를 감싼 공간을 둘러보았다.
로켓 내부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아공간의 마법이 서서히 효력을 다해, 이곳은 이제 더는 로켓을 연 자에게 가장 친숙한 공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이 공간에 그런 마법을 건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걸 보면 여신께서도 카티샤에게 참 관대하시다.
카티가 로켓에 들어갈 때마다 알아서 시간도 멈춰 주시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신경도 써 주시고. 그녀에게 마귀를 투영해 보기라도 하는가?
“세기의 사랑 나셨군.”
아이칼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구잡이로 어질러진 창고 벽에 카티샤가 기대앉아 있었다. 눈을 고요히 감은 채다.
“카티.”
마른 어깨를 흔들자 카티샤가 그의 품으로 스르륵 무너졌다. 아마 카티샤의 의식은 이미 마귀가 보여 주는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호흡도 고르고 표정은 편안했다.
잠깐 가라앉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도로 불쾌해졌다.
이 고집불통. 한 다섯 번쯤 죽었다 깨어나도 제 마음 같은 건 몰라줄 멍청이 같으니라고.
카티샤가 제 오러를 읽을 수 없도록 존재감마저 감추고 있기는 했으나, 아이칼은 그녀가 영령들과 나누던 대화를 모조리 다 들었다.
듣고 나니 그녀가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지 알겠다. 카티샤는 그를 믿지 못해 불안한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완전하지 않아서.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압도적인 우위로 마귀를 찍어 누르지 못할까 봐.
그걸 쓸데없는 기우라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인간들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는 제약이 걸리면 아무래도 쉽게 끝내기는 어려웠을 터다.
그걸 알아서 더 속이 뒤틀렸다.
어려워? 능력이 그만큼 미치지 못해? 내가?
그래서 카티가 나를 못 믿는다고?
“빌어먹을…….”
미련 없이 놓아 버렸던 권능이 아까워질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티샤는 정말이지 날이 가면 갈수록 그에게 더 많은 감정의 이름들을 알려주었다.
자괴감, 무력감. 비참함. 심지어는 아주 일차원적인 질투까지.
지금은 또 나 몰래 누구랑 무슨 꿈을 꾸는 건데.
아이칼은 머리 위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마귀를 노려보았다. 아이칼을 알아본 그것이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쉭쉭거렸다.
역시 아무리 봐도 못생겼다. 미인계는 무슨.
이대로 카티샤를 억지로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아이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벽에 기대앉은 뒤 카티샤를 안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머리 위를 불안하게 맴도는 마귀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봐.”
크르르르……. 마귀가 적대적으로 아이칼을 쏘아보았다.
“내게도 보여 줘. 네 기억. 카티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과 똑같은 걸로.”
[…….]“지금 당장.”
마귀와 신수의 쌍방 적대적인 눈빛이 첨예하게 맞물렸다.
승자는 아이칼이었다.
훅 피어오른 마기가 그의 눈앞을 덮었다. 아이칼은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삼켰다.
그의 오러와는 섞이려야 섞일 수 없는 마기에 거부감이 해일처럼 들고 일어난 순간, 아이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눈을 떴다.
품에 안겨 있던 카티샤도 주위를 휩쓸던 마기도 깨끗이 사라졌다. 그는 복작거리는 길거리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낯선 거리에서 예스러운 향취가 풍겼다.
“어?”
등 뒤에서 괴상한 탄성이 들려왔다. 아이칼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찾는 이를 발견했다.
양팔에 빵을 가득 담은 뚱뚱한 바구니를 끌어안은 카티샤가 눈을 토끼처럼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아키?”
그녀는 과일 가게 앞에 서 있었는데, 키가 호리호리하게 큰 검은 머리칼의 낯선 사내와 함께였다. 사내는 가게를 향해 몸을 돌린 채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왔네……. 이렇게 금방……?”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검은 장발의 사내가 카티샤를 돌아보았다. 큰 키와 강인한 체격과는 반대로 부드럽고 섬세한 옆선을 가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카티, 아는 사람이 있나요?”
“아, 저기, 네에. 잠시만요, 귀어스트 씨.”
뭐라고?
아이칼은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지금 쟤가 저놈을 뭐라고 부른 거야?
검은 머리에게 빵 바구니를 넘긴 카티샤가 허둥지둥 아이칼에게 달려왔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도, 입고 있는 옷도 방금까지 그가 로켓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카티의 전생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가 아는 카티샤라는 건데.
환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아이칼은 이제 조금씩 혼란스러워졌다.
마귀가 되기 이전의 귀어스트.
인간.
그것도 잘생긴 인간.
아이칼은 그가 아는 미형의 인간들을 죄다 떠올려 보았다. 그중 제일은 루테 블라스코였으니 자연히 기준점도 그가 되었다. ‘귀어스트 씨’라는 괴상망측한 호칭으로 불린 사내는 결코 루테 블라스코에 뒤지는 외모가 아니었다.
‘아니지. 저건 인간이 아니니까.’
기준점은 자신으로 두어야 마땅하다.
아이칼은 무심코 자신을 저자와 견주어 보려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달려온 카티샤가 그의 목에 매달리듯 안긴 탓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