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오렌지색 머리칼이 시야에 나풀거렸다. 품 안에서 상큼한 과즙이 팡 터지는 듯했다.
“어디 있었어? 안 올 줄 알았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금까지 하던 잡생각들이 솜사탕처럼 사르륵 녹았다.
아이칼은 무의식적으로 보들보들한 머리 타래를 만지려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떨어져. 나 화 아직 안 풀렸어.”
“아, 응. 나도 모르게.”
그러자 카티샤가 화들짝 놀라 얼른 팔을 풀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떨어지면…….
그러나 아이칼이 말을 번복할 틈도 없이, 심호흡을 한 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있잖아. 내가 고집부리고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맹세컨대 널 상처 주려던 의도는 없었어. 그래도 이왕 여기 들어온 거 나랑 조금만 같이 있어 주라. 그러면 너도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거야…….”
카티샤의 얼굴엔 죽어도 또 싸우기는 싫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 간절한 눈빛에 대고 날카롭게 쏘아붙일 말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데?”
“아, 그게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긴 귀귀의 기억 속이야.”
카티샤가 들뜬 어조로 얼른 설명했다.
“대충 시기가 어떻게 되냐면, 아직 아스트로카가 건국되기 한참 전이니까 제국력으로는 셈할 수 없고…… 대륙의 암흑기가 닥치기도 전이니까, 한 700년 전쯤이라고 보면 돼.”
대륙의 암흑기는 아스트로카 건국 직전까지 약 200년간 이어진 마물들의 시대를 뜻했다. 암흑기 이전, 현 시점으로부터 700년 전이라면 마왕 귀어스트가 출현하기 직전이었다.
아이칼은 눈만 돌려 여전히 과일가게 앞에서 이쪽을 등지고 선 남자를 확인했다.
“그럼 저 인간은?”
“네가 짐작하는 그자가 맞을 거야.”
“인간 귀어스트?”
“응. 인사라도 해 볼래?”
“됐고. 하나는 확실히 해, 카티. 저게 네 눈으로 보기에도 잘났어?”
카티샤의 표정이 순간 어벙해졌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뭐라고?”
“잘생겼냐고. 나보다 더.”
“무슨 소리야?”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카티샤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이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조금도 웃을 생각이 없었다.
“저런 게 네 취향이야? 그래서 신경 쓰여?”
“아키, 난 네 외형이 얼마나 완벽한지에 대해 책 한 권은 거뜬히 쓸 수 있어. 누구와 견준다는 게 말이 안 돼.”
카티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딱 잘라 일축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짐없이 다 내 취향이거든. 다른 데 홀릴 정신도 없어!”
그 자신감 넘치는 말에는 아이칼도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안도감이나 뿌듯함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어이가 없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아, 안 봐도 알아.”
“그래? 그럼 말해 봐. 네가 못 본 곳 중에서 내 어디가 그렇게 네 취향인지.”
카티샤가 이번에는 양옆으로 눈을 굴리며 쩔쩔맸다.
“그래, 으음. 뒷말은 취소할게. 못 본 건 알 수가 없지. 그러면…….”
횡설수설하는 게 답할 말이 궁한 것이 뻔히 보였고, 사실 아이칼 본인도 그녀에게서 대단한 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미 딴생각에 골몰하는 중이었다.
‘그럼 마귀의 잘난 껍데기에 현혹된 건 아닐 테고. 대체 왜, 뭘 봤길래.’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고 선명히 꽂혔다.
“키스해 줄까?”
“……뭐?”
잘못 들었나 하여 되묻자, 살며시 그의 눈치를 본 카티샤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일단 내가 지금까지 너랑 해 본 것 중에서는 그게 제일 좋던데.”
“…….”
“싫으면 말고…….”
뭐야. 이건 반칙 아냐?
아이칼은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초대의 탑에서부터 그러더니, 곤란한 상황에서는 대뜸 입부터 맞춰 보자는 건 새로운 도피 방법인가?
아니면 일부러 정신 못 차리게 하려고?
“자꾸 키스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말……”
그러나 카티샤가 발꿈치를 들고 입술을 맞대 온 순간, 단호하게 그녀를 밀어내려던 아이칼의 시도는 곧바로 물거품이 되었다.
카티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곤 그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쪽 빨았다. 그게 자신이 키스하는 방식과 무척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아이칼은 그녀의 양 뺨을 감싼 채 말캉한 입술 틈을 파고들고 있었다.
카티샤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열어 주었다. 하나처럼 뒤엉켜 나누는 숨결이 달고 뜨겁다. 줄어들지 않는 슈크림을 한입 가득 넣고 맛보는 기분이었다.
초대의 탑에서 카티가 키스해 달라고 말했을 때 참기를 잘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입술을 겹쳤다가 이라도 세웠으면 지금처럼 먼저 다가오지도 못했겠지.
입술이고 혀고 뭐고 다 찢어졌을 테니까. 인내의 보상으로 이 정도면…….
역시 부족하다.
“으응…….”
카티샤가 입술 사이로 흘린 가느다란 신음이 귓전을 스치자마자 음험한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갈까?’
귀어스트고 영령이고 뭐고 지겨워졌으니 다 때려치우고 나갈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 이 애를 가둬 놓고 제 흔적으로 뒤덮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몸을 뜨겁게 달궜다.
이대로 잡아먹어 버리고 싶다. 그러면 최소한 그를 아프게 하는 말은 못 할 텐데.
이깟 허구의 세계를 어그러뜨리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위험한 상상이 끝을 모르고 덩치를 불렸다.
당연히 카티가 순순히 따라오진 않을 테니, 이번에는 잠시 재워 두자.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 두는 건 썩 효과적이지 않다는 걸 초대의 탑에서 확인했으니까.
카티샤가 전혀 다른 곳에서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다 끝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오로지 둘만 남을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는 거야.
아이칼은 그녀의 입안 곳곳을 샅샅이 탐하고, 숨이 모자란 카티샤가 할딱거릴 때가 되어서야 틈을 벌렸다.
“카티. 역시 나는……”
양 뺨에 발갛게 열이 오른 그녀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그를 보았다. 물기가 반질거리는 연녹색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품고 있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라고? 흐, 잠깐 숨 좀…….”
“…….”
“방금 뭐라고 했어……?”
아이칼은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헛웃음을 지었다.
“미치겠네.”
상대가 머릿속으로 무슨 장면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표정이라니.
카티샤의 젖은 눈에는 그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들어 있었다. 믿으랄 건 안 믿고 왜…….
그러나 이렇게 순진한 모습조차 귀여워 죽겠다고 무심코 생각해 버린 순간, 아이칼은 이번에도 제가 졌음을 직감했다.
“……내가 너한테 너무 쉽다, 카티. 그치?”
화를 내도 반나절을 못 가고.
포옹 한 번에 서운함이 녹고 키스 한 번에 분노와 질투가 녹는다. 순진무구한 눈동자 아래 매달린 눈물 한 방울이면 가히 무장 해제였다.
카티샤는 그의 작은 태양이었다. 귀여운 촛불 같다가도 한순간에 커다란 횃불이 되어 빙벽을 허물어뜨렸다.
다음에 넌 대체 뭘 녹일래.
아이칼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끈한 맨살의 체온을 느끼며 아슬아슬한 수위까지 치솟았던 충동을 힘겹게 짓뭉갰다.
“……이러다 난 아무것도 안 남을 거야.”
“왜?”
“네가 다 녹이다 못해 말려 죽일 거니까.”
“아냐. 눈이 녹으면 물이 되잖아. 물은 불을 끄고.”
호흡을 고른 카티샤가 아이칼의 코끝에 제 것을 비볐다.
“나도 너한테 엄청 쉬워, 아이칼. 이걸로 내 화는 다 풀렸으니까, 다시 말할래.”
“……뭐를?”
“사랑해.”
“…….”
“이번엔 어떻게 들려?”
이것 봐. 결국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잖아.
아이칼은 마침내 허탈한 한숨을 터뜨렸다.
몇 시간 전에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긁어 놓고 가더니, 이제는 어떻게 봐도 사랑이 아닐 수가 없는 것만 자꾸 내민다.
이걸 뭘 어떻게 당해.
“그래. 지금은 확실히 그런 것 같네…….”
결국 예정되어 있던 완패였다.
* * *
대륙의 암흑기 이전의 세계.
지금 나와 아이칼이 걷고 있는 이곳은 귀어스트가 아직 마귀가 아니고 신들이 이 세계를 떠나기 전의 시대였다. 아직 마물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절이다.
나는 아이칼을 데리고 과일 가게 앞으로 돌아갔다. 입술이 따끔거려서 슬쩍 만져 보니 조금 부었다.
현실이 아니라 꿈속이라 다행이야…….
신중하게 사과를 고르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우리를 보곤 빙긋 웃었다.
“친구를 만났나요, 카티?”
“아뇨. 친구는 아니고, 약혼자예요.”
“세상에.”
사내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온화하게 접혔다.
“약혼자가 있었군요. 소중한 사람이겠어요.”
“네. 반만 사람이지만요.”
아이칼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곧이곧대로 불어 버려도 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그의 손을 톡톡 당겨 주었다.
꼭 진짜 같지만,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마귀 안에 잠재된 과거의 조각일 뿐이다. 마귀가 꾸는 꿈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 때문에 마귀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죄다 뭉뚱그려져 있었다. 가령, 저쪽 코너에서부터 뚝 끊겨 버린 길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당연히 귀어스트가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우리를 볼 수 있는 이도 인간 귀어스트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그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사내는 갑자기 제 앞에 뚝 떨어진 내 존재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제 용병단 기지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내게 이름을 물었을 뿐.
내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내가 이 길바닥에서 호밀 빵들로 저글링 쇼를 벌인다거나, 사실 나는 700년 뒤의 세계에서 왔고 지금 당신의 옛 기억을 훔쳐보고 있다고 고백해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기억이 미화되거나 깎여 나가며 아주 작은 변화들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실제가 아니므로 현실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노엘 귀어스트라고 합니다. 늪사자 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있어요. 약혼자분께서는 이름이?”
“……아이칼.”
“멋진 이름이네요.”
사내가 다정한 말씨로 칭찬했다. 마귀의 이름을 가진 사내에게서 멋지다는 말을 들은 아이칼의 표정은 이제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가 다시 내게 물었다.
“결혼식은 언제 올리나요?”
“음, 아마 돌아가서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우선 약혼식부터 제대로 올리게 될 것 같아요. 결혼은 아마 몇 년 뒤에……”
“아니, 바로.”
나는 화들짝 놀라 아이칼을 쳐다보았다. 순간 잘못 들었나 했지만 아니었다.
아이칼이 딱 잘라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성년식까지 치르면 곧바로.”
“하하, 그거 좋네요. 사랑하는 여인은 빨리 잡을수록 좋죠.”
사내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귓불이 뜨거워지나 싶더니 온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성년식은 고작 며칠밖에 안 남았잖아. 언제 나 몰래 그렇게 결정해 버렸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