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2)
22화
* * *
나는 얌전히 내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공작은 직접 따라 들어와 내 옷장을 살펴보더니 흰색과 연한 분홍색이 섞인 원피스를 골라 주곤 나가 버렸다.
‘결국 공자님께는 입도 뻥끗 못 했어…….’
돌아서는 뒷모습에 대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외쳐 보기라도 할걸…….
마가렛이 내게 양말과 검은 에나멜 로퍼를 신겨 주었다. 그리고 베르너에게 거꾸로 들려 가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다시 빗어 주었다.
울적한 표정의 나를 그녀가 열심히 달랬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기씨. 게스파 어르신은 선대 각하에 비하면 따끈따끈하시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시니까요.”
“비교 대상이 우리 할아버지라서 좀…….”
사실 헤르젠 할아버지의 꼬장꼬장하고 까탈스러운 성정에 비하면 블라스코 공작이나 베르너, 아르닌은 몰랑몰랑한 구름 젤리였다. 그러니 공작의 말마따나 겁대가리 없이 덤볐지.
하지만 헤르젠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이라면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
원래 겉으로 온화해 보이는 사람을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법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마가렛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가문 회의는 저택 본관의 꼭대기 층에 있는 ‘진실의 홀’에서 열렸다.
마가렛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격려했다.
“쫄지 마세요, 아기씨! 파이팅!”
어헝, 파이팅…….
나는 마가렛에게 애써 웃어 준 뒤 거대한 석조 문 앞에 섰다.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나는 석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기겁했다.
‘이건 회의라기보다는 청문회잖아!’
원탁회의 비슷하지 않을까 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층을 통째로 쓰는 회의실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작은 의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단차가 높은 계단이 사각으로 에워싼 구조였다.
계단 위의 좌석은 한 자리도 남김없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참석 인원도 고작해야 열댓 명 남짓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역시도 완전한 오판이었다.
‘대체 몇 명이야?’
어림잡아도 50여 명은 될 것 같다.
정면의 가장 높은 좌석에는 블라스코의 직계들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는 전부 방계였다.
가장 상석에 가주인 공작이, 그 아래 좌우로는 베르너와 아르닌이 자리했다. 격식 있는 자리라는 것을 드러내듯 셋 모두 정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두 남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꽂혔다.
“왔네.”
“……왔군.”
블라스코의 기사복을 입고 도도하게 다리를 꼰 아르닌의 미모에 눈이 부셨다.
흘끗 나를 본 아르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주었다.
‘긍정적인 신호……!’
나는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얻어 청문회장 한가운데 섰다.
준비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자, 수십 명의 날카로운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닥다닥 꽂혔다.
“초라하군.”
왼편에서 누군가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이곳저곳에서 비아냥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작고 말랐어.”
“저래서 검을 들 수나 있겠는가?”
“도망이나 갈 수 있으면 다행이겠군. 영령들께서 노하지나 않으시면 다행이겠어.”
“저 애가 지금 황제 폐하 다음가는 자산가라지? 심지어 후견인도 없다는데. 쯧쯔, 헤르젠이 말년에 노망이 나도 단단히 난 거야…….”
“내 10년 전에 헤르젠이 잠적했을 때부터 알아봤네. 아무리 둘째 잃은 슬픔이 커도 그렇지, 식솔들을 내버리고 웬 고아를 주워다 키워? 죽은 루테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네…….”
“그런데 헤르젠은 젊었을 때부터 좀 괴짜였어.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오촌 형제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그를 멀리했다네…….”
나는 예상보다 냉담한 반응들에 약간 의기소침해졌다가, 헤르젠 할아버지를 손가락질하는 소리에 발끈했다.
“왜 우리 할아버지만 욕하고 그러시지……?”
물론 나는 평범한 간 크기를 가진 일반인이라, 버럭 멋지게 사이다를 날리지는 못했다.
대신 눈을 최대한 세모꼴로 뜨고 꿍얼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유산이 그렇게 탐나고 마검이 중요하면 살아 계실 때 잘했어야지……. 편지 보냈는데도 아무도 안 왔으면서. 피차 마찬가지인데 뭘.”
“저 꼬마가 지금 뭐라는 거야? 들었소, 게스파?”
“살아 계실 땐 본체만체하다가 이제 와서 유산 타령이라니. 투명하다, 투명해. 완전 속물…….”
“저, 저 건방진 것 좀 보소!”
“이러니까 할아버지가 환멸이 나서 가출하셨지……. 얼마나 인물들이 없었으면 열 살 꼬맹이한테 억만금을 물려주셨을까? 흑, 할아버지 보고 싶다.”
누군가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른편에서 가장 위쪽에 앉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사내였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만 어째 관상이 딱, 재물을 탐하고 사람을 착취할 상이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어디서 어른 말에 꼬투리를 잡아? 건방지게 말대답하는 것도 선대께서 가르쳤나?”
“헤르젠 할아버지는 제게 호구처럼 당하고 살지는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귀족에게 감히 이렇게 말대답을 하면 안 되는데. 귀족 모독죄로 당장 처벌당해도 할 말 없는데……. 그러나 이미 내 입은 차갑게 나불거린 후였다.
‘……망했어.’
이미 망한 거, 오기로라도 눈을 더 크게 치떴다. 기죽은 모습을 보여 주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세상에는 어린애들을 등쳐 먹으려는 어른들이 많다. 당장 전생의 새아버지만 해도 나를 무급 노동력으로 마구 부려먹지 않으셨던가?
헤르젠 할아버지는 내게 날 부당하게 욕하거나, 위해를 끼치려는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만만히 보이지 않도록 정당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근자근 밟아 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절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약자를 자처해서는 안 된다고. 비굴해지는 순간 이미 승산 없이 패배한 거라고.
“할애비 믿고 깽판 쳐라, 카티!”
할아버지는 이미 내 곁에 안 계신데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때였다. 머리 위로 차가운 빈정거림이 날아왔다.
“저렇게 싹수 노랗고 건방진 애는 흠씬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거 완전 잠재적 아동 학대범 아니야?’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찐 악당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저 자갈처럼 생긴 아저씨의 이미지는 지하 500미터까지 추락했다. 나는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때, 공작의 서느런 음성이 날아들었다.
“앉으십시오, 첸 형님. 어르신들 앞에서 열을 내는 모습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첸? 심지어 저 사내는 마가렛이 특별히 주의하라며 알려 준 리스트 맨 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간이었다.
서부에 있는 마력석 광산들의 총책임자, 첸 블라스코.
“그리고 카티샤 아인슬리.”
공작이 엄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가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한 것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공작이 푸르른 청옥 같은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너도 정숙해라. 우리 피차 감정 소모나 하자고 이렇게 둘러앉은 건 아니지 않나.”
기분 탓인가? 첸 블라스코에게 일침을 가할 때보다 그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웠다.
“네. 자중하겠습니다.”
나는 고집스럽게 첸 블라스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첸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으나, 공작이 면박까지 준 마당에 더 소리를 높일 수 없었는지 홱 돌아섰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장내에 엄숙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제112회, 블라스코의 가문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주인 공작이 무미건조하게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헤르젠 페르난디트 블라스코의 적법한 상속인의 자격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안건과 벗어난 발언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애라고 봐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기죽지 않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청옥의 블라스코에 마검의 가호가 있기를. 카티샤 아인슬리가 가문과 공작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이번에는 곧바로 몸을 세워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다시 착석한 뒤, 정면에 자리한 이들을 차근차근 살폈다.
게스파 어르신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블라스코 공작의 바로 우측 아래, 산신령 같은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땋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헤르젠 할아버지보다는 풍채가 작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그분은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셨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그래, 네가 헤르젠 형님이 키웠다는 상속녀로구나, 아가.”
게스파 어르신 역시도 내 생김새가 예상과는 달라 놀란 듯했다. 대체 다들 뭘 상상하고 있었던 거람?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증거는 모두 확보했나, 루티어드?”
“예. 혐의점이 있었다면 제 선에서 바로 처리했을 겁니다.”
루티어드. 공작의 이름이었다.
원작에서 읽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부르는 것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선대의 집 앞에 버려진 이후로 저 아이는 단 한 번도 텔파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텔파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 외지인이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뭅니다. 조사해 본바, 저 아이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외부와의 접촉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황실에서 수를 쓴 건 아니라는 말이군.”
“예. 그건 확실합니다.”
내가 베르너와 아르닌의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을 동안 내 짧은 10년 인생을 먼지 한 톨까지 다 턴 모양이었다.
“일단은 유언장에 공증을 한두 개 받은 게 아니니, 그만큼 헤르젠 형님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이겠지. 저 아이에게 확신을 가졌다는 뜻이겠고.”
“직접 여쭙기 전까지 확실한 의중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겠지요.”
“가장 확실한 건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일 텐데. 헤르젠이 영령의 탑에서 부활하기까지는 두세 달이나 남았으니. 일이 애매해졌구나.”
고작 두세 달밖에 안 남은 거 아닌가?
나는 점차 불안해졌다.
게스파 어르신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발언했다.
“그렇다면 헤르젠이 정말 우리를 크게 엿 먹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저 소녀가 정말로 블라스코의 가주가 될 재목이라고 판단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