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그 애들 사랑싸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아쉽군. 성혼하고 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고.’
또 어떤 깜찍한 이유들로 허구한 날 다투려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싸워도 결국은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기 위해 쪼르르 달려오던 아이들을 떠올린 헤르젠이 킬킬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가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웠다.
‘이렇게 자꾸 궁금해하면 안 되지.’
이곳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했는데, 저도 모르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련을 커다랗게 부풀리고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헤르젠은 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
[어쨌거나 카티야 뭐, 제 짝에게 꽉 잡혀 살 게 걱정이기는 하다만. 오히려 잘되었어. 걔네야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문제지, 다른 곳에서 사고 치고 올 아이들은 아니니까. 애초에 그렇게 키우지도 않았고. 그러니 난 카티 걱정은 없다.]“물론 우리 카티는 똑똑하고 야무지니까요.”
[그래. 그러니 결론적으로 내 유일한 걱정거리는 너뿐이란 말이다, 루테.]“저 말입니까?”
루테가 뜻밖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헤르젠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둘째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앞으로 징징 울고 싶은 날엔 누굴 찾아갈래?]“제가 언제 징징 울었다고…….”
[누구한테 가서 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게야? 네가 의지할 구석이 없어지는 것 같아 그게 제일 걱정이다, 나는.]“그런 거라면 카티가 이미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글쎄, 네 딸은 좀 있으면 설원이든 어디로든 반납치당할 것 같다니까.
헤르젠이 오묘한 표정을 짓는 사이, 루테가 대수롭잖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베르너도 있고, 아르닌도 있습니다. 뭐, 제미언도 있고, 블라스코의 기사들도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블라스코가 저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할 겁니다. 그리고 뭘 새삼스레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아버지 없이도 10년간 괜찮게 잘 살았습니다.”
[……뒤끝은. 이 상황에서 옛날 일은 또 왜 꺼내냐?]“그러니 저는 전혀 문제없단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시는 걸음이 무거울까 그게 걱정이지.”
남겨지는 이만큼이나 떠나는 자의 마음도 납덩이 같을 것이다. 특히나 남겨두고 가는 이들이 많을수록 더.
[그래. 물론 그렇지. 하지만…….]헤르젠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루테나 카티샤를 앞에 두고는 미안해서 차마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말이 있었다.
[……아가.]“예.”
[네 탓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꼭 아까 페르테스 놈이 한 말 때문도 아니고, 그냥 너희들의 아버지로서 당연히 드는 생각인데 말이다.]“말씀하십시오.”
그러나 헤르젠은 또 한참을 망설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루테의 푸른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게.]하기야, 떠나는 마당에 솔직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 말로써 아이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루테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헤르젠은 수십 년간 입 밖으로 내어 본 적 없는 마음을 나직이 뇌까렸다.
[난 루티어드가 보고 싶다.]“아…….”
[가끔은, 당장이라도 그 아이 곁으로 가고 싶었어.]너무 이르게 그의 곁을 떠난 자식의 자리도 홀로 남은 아이가 차지하는 만큼이나 크고 깊었다. 죽은 아이를 마음에 묻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르템으로 돌아온 뒤로는 더더욱.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놈 얼굴이 떠오르더란 말이지. 그래서 아이칼에게서 영령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은 조금 설렜다.]“…….”
[인간은 죽고 나면 기나긴 순환의 고리로 빨려 들어간다지만, 축복받은 영혼은 신의 품으로 돌아간다고도 하잖니. 그렇다면 혹시 내가 가는 그곳에 그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거니 해서. 어쩌면 훨씬 더 오래전에 떠난 네 엄마도 있을 수도 있고.]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듯, 굳어 있던 루테가 차츰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헤르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파니는 너무 오래전에 떠났으니 아마 지금쯤 순환의 고리에 들었겠지. 하지만 어쩌면 루티어드는 아직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그 아이가 거기 없다고 해도, 힐라이야께 슬쩍 여쭈어볼 수는 있지 않겠어? 그 아이의 영혼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끝까지 편안했는지.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지. 혹시 새로운 삶을 얻었다면 나보다는 좀 더 괜찮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지…….]“아버지.”
[그런 걸 좀 물어보고 싶다. 당신께 무려 마귀를 인도해 가는 공이 있는데, 그 정도는 힐라이야께서도 허락해 주시겠지.]뻥 뚫린 탑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낯이 평온했다. 차마 붙잡지도 못하게.
[그러니 가이우스 님의 말이 맞았던 게지. 라몬께서 후대들에게 버거운 사명만 지워 주신 채 영면하셨을 리가 없다고……. 어디까지나 희망 고문에 불과하대도 나는 그저 좋구나.]“……그러십니까.”
루테는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 역시 너무도 잘 알았다. 당장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그럼…….”
루테는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형에게 전해 주세요. 고작 10분 차이로 형이 된 것 가지고 자꾸 저더러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살지 말라고…….”
[10분 차이도 엄연히 형이지 무얼.]“저를 대신해 황제를 독대한 건 전혀, 하나도 고맙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보게 되거든 한 대 맞을 각오 하고 있으라고요.”
헤르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루테는 주먹을 꾹 쥐며 다음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말하렴.]“그리고 혹시…… 세니도 거기 있는지 좀 살펴봐 주십시오, 아버지.”
헤르젠이 가만히 아들을 들여다 보았다.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린 루테가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그녀가 아직 거기에 있다면, 제가 아직도 많이 사랑한다고도…….”
저가 언제 울었느냐며 냉담하게 받아친 게 무색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리깐 그의 새파란 눈동자 아래에 물기가 반짝였다.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네가 살아 숨쉬며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데, 닿을 곳이 없는 이 마음만은 닳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그대로라고.
너 역시 어딘가에서는 나와 같은 마음을 아직 품고 있느냐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물어보고 싶었다.
찰나 스치는 순간만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다시 안아 보았으면.
그러나 루테는 그 말을 속으로 눌렀다. 언젠가 신이 도와 사후에서라도, 다음 생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그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물어보리라. 그런 고백이 아니더라도 세레이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다.
“카티 이야기도 전해 주십시오. 이제 우리 딸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제 짝과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도요.”
[그래. 너는 모르는 우리 꼬마 갓난아기 때부터 열 살 때까지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해 주마.]“그리고 나중에 제가 갈 때까지만 기다려 주면 안 되겠느냐고도, 좀 전해 주세요.”
[뭐? 어허, 너 허튼짓할 생각은 말아라!]“그런 뜻 아닙니다. 카티가 있는데 제가 어딜. 그냥 말이라도 전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루테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뺨을 스치지 않고 아래로 뚝 떨어져 남은 물 자국을 모른 척 발로 짓이기며, 그는 짐짓 밝게 어조를 바꾸었다.
“곧 아이들이 도착하겠습니다. 카티를 어찌 달랠지 얼른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잖아도 지금 궁리 중이다. 우리 꼬마가 붙잡고 울며불며 떼를 쓰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뭐고 꼬맹이 말만 다 들어주고 싶어질 텐데 어쩌누……?]부자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탑 안의 영령들이 모두 듣고 있었다.
영령체를 작게 줄인 유제니가 조심스럽게 계단 아래로 향했다. 검은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신수가 고개를 들었다.
영령을 발견한 아이칼이 천천히 검지를 제 입술에 댔다. 다른 손으로는 품에 안은 카티샤의 등을 토닥이는 중이었다.
조그만 등이 그녀가 훌쩍거릴 때마다 안쓰럽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