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29)
229화
“아흐, 흐으…….”
나는 필사적으로 아이칼의 목을 끌어안았다. 뾰족하게 곤두섰던 감각이 뭉툭해지고 나서야 주위를 돌아볼 정신이 났다.
어느새 두 번째 마법진, 귀어스트의 봉인진 꼭짓점에 영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른두 명의 영령들이 우리를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마귀가 검을 박차고 폭발적으로 위로 솟구쳤다. 그러나 곧 봉인진에서 그를 따라 반투명한 사슬이 솟구쳤다.
사슬이 날개와 팔다리를 결박해 도로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 사슬은 영령들의 몸에도 휘감겨 있었다. 심지어 내 손목에도 감겨 있다. 마귀와 가주의 쌍방 귀속 계약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칼이 불러낸 얼음 창이 나와 연결된 사슬을 꿰뚫었다. 나와 귀어스트 간의 귀속 계약이 끊어졌다.
한순간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컨디션이 놀랍도록 극상으로 끌어 올려진다. 아니,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슬에 결박된 마귀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인 영령들의 형체가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다.
허공으로 포르르 날아오른 영령들이 마귀의 주위를 팔랑거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귀어스트를 노려보았다.
‘나랑 약속했잖아.’
수백 년을 함께 보낸 나비들을 되돌려 주면 얌전히 굴겠다고 분명 약속했다. 그때 마귀의 안에는 분명 노엘 귀어스트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었으리라.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 라몬께서도 약속하셨잖아. 믿어요, 노엘. 믿고 기다려.’
눈빛으로 쏘아 보내는 명령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마귀의 몸부림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귀어스트의 주위로 몰려든 가주님들께서 부드러운 말씨로 마귀를 달래었다.
[괜찮다, 요 망나니야.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이렇게 커져 버리면 어째?] [누가 널 버리고 간다던? 50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정이 있는데.] [영령의 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그곳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곳으로 가자.] [영원한 안식으로…….]성스러운 영혼들의 속삭임이 노랫말처럼 상냥한 음조를 띠었다. 가문의 사명에 인생을 바친 이들의 따듯하고 강인한 마음들이 통통거리며 마음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펄럭거리던 마귀의 날개가 서서히 접혔다. 다시 얌전하게 몸을 웅크린 마귀 주위로 32인의 영령이 마치 나비처럼, 한밤중의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귀어스트는 봉인을 박차고 폭주하지 않았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친구들을 돌려 달라며 아이처럼 조르던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듯이.
마귀의 붉은 눈이 내게 닿았다. 그것이 눈꺼풀을 느리게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내게 감사 인사라도 하는 듯했다.
나는 막힌 목을 열어 중얼거렸다.
“내게 고마울 거 없어……. 수백 년 동안이나 너를 지켜주신 분들께 인사해, 귀귀.”
마귀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것의 붉은 눈이 제 주위를 춤추듯 빙글빙글 맴도는 영령들을 좇았다. 그제야 편안해 보였다.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파수꾼이여.]마귀의 머리 위에 서 계시던 가이우스 님께서 아이칼을 불렀다. 이제 영령의 해방은 마지막 단계만을 앞두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드디어…….]가이우스 님을 비롯해 9대 가주님이신 디에고 님까지, 비교적 시조에 속하시는 가주님들께선 특히나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계셨다. 오래전부터 그 누구보다 더 영령의 해방을 간절히 염원한 분들이다.
아이칼이 나를 조심스럽게 마법진 바깥에 내려놓았다.
“카티, 설 수 있겠어?”
“응, 괜찮아.”
그는 여전히 마법진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흘 전처럼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잘 부탁해, 아키.”
아이칼이 대답 대신 내 코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나는 마법진 중앙의 마귀와 영령들에게 다가가는 그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투명한 얼음벽이 마법진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마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아이칼이 그것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는 듯했으나 거리가 멀어 이쪽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영령들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것도 얼핏 보였다.
나는 마귀의 몸에 여기저기 앉은 영령들을 빠르게 훑었다. 오래지 않아 귀귀의 오른쪽 날개 위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는 헤르젠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찾는 듯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할아버지가 곧 나와 시선을 맞추곤 손을 흔들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만면에 곧 다시 만나자는 것처럼 인자하고 포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9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밤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너무 울지 마라, 아가. 곧 다시 안 만나겠냐…….”
나는 손등으로 뺨을 힘껏 문질렀다.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던 뺨 위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대답도 그때와 같았다. 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을 거고, 오러 유저가 돼서 100살이 아니라 150살까지 살 것이다.
이제 다시 만나려면 130년이나 남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랑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흐려지는 시야에 검을 뽑아 드는 아이칼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새하얗고 날카로운 검 주위로 눈꽃 같은 오러가 쉼 없이 피어올랐다.
마귀가 신기하다는 듯 제 주위를 수놓는 오러를 좇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마귀의 머리 위에 앉아 계시던 영령 두엇이 아래로 죽 미끄러졌다.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그분들의 얼굴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칼의 검이 바닥의 봉인진을 십자로 그었다. 여신의 권능 앞에 인간과 마귀가 맺은 종속 계약의 사슬이 툭툭 끊어졌다.
귀어스트는 여전히 반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백사 같은 자태의 검 끝이 제 눈앞에 겨누어진 뒤에도.
나는 고개를 들어 뻥 뚫린 탑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신은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헤르젠 할아버지까지 양보했잖아요. 당신이 내심 오래도록 바라 왔던 대로, 귀어스트를 보내 드릴 테니까.
더 이상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의 피조물에게 앗아 갔던 권능, 다시 돌려주세요.”
새하얀 오러가 허공에 눈꽃 결정처럼 정교한 무늬를 그리며 터져 나갔다.
얼음벽 안쪽에 강렬한 눈폭풍이 불어닥치며 시야를 가렸다.
“……!”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볼 수 없었다.
탑이 뿌리째 뽑힐 듯 거세게 흔들렸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있던 아빠가 재빠르게 나를 붙들어 세웠다.
작은 폭풍이 초대의 탑을 얼마나 뒤흔들었을까. 나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 겨우 눈을 떴다.
차차 가라앉는 눈폭풍 위로, 별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탑 너머의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의 수를 세었다.
‘서른셋…….’
살아 있는 것처럼 너울거리던 빛들은 곧 밤하늘의 일부가 되었다. 미세한 눈가루가 찬 바람을 타고 크리스털 가루처럼 휘날렸다.
눈물이 날 만큼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 *
그러나 카티샤의 눈에 비친 광경과는 달리, 눈보라 속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못했다.
헤르젠은 기가 막힌 눈으로 아이칼을 보았다.
이틀 전, 카티샤와 크게 대거리한 신수가 산장으로 영령들을 찾아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권능을 잃은 신수가 성검을 제대로 쓰려면 뭘 해야 할까?”
그때 그가 왜 그런 뜻 모를 혼잣말을 했는지, 헤르젠은 서서히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마귀와 영령들 앞까지 다가온 아이칼이 나직하게 뇌까리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검은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지.”
헤르젠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신수의 은푸른색 눈동자를 암만 살펴봐도 조금의 온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아키?]“검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앗아 가는 용도잖아.”
힐라이야는 정화와 치유, 재생의 권능을 다른 무기도 아니고 검에 넣어 놓았다. 성검을 만들 때부터 신수에게 선택을 유보하기로 결정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마귀의 처단 여부는 검의 주인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아이칼이 마귀의 붉은 눈을 응시하며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그러니 이건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린 일이지요, 힐라이야.”
죽일까, 살릴까?
카티샤는 이것을 살리라 했다. 그것이 힐라이야가 마음으로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이칼은 귀어스트를 구하고픈 마음이 전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귀어스트의 과거를 일부 보았다고 해서 유의미한 동정심이 자라난 건 아니었다. 미물을 가엾이 여기는 아량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다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닌가?
게다가 지난번 로켓에서 아이칼이 읽었던 그녀의 전언은 여신을 향한 그의 적개심에 불을 붙여 놓았다.
그때 힐라이야는 분명 카티를 베라고 했었다.
“하.”
그날 느꼈던 공포를 다시 상기하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저를 그딴 식으로 협박한 여신인데, 그녀만 좋을 일을 굳이 해야 하나?
귀어스트도 싫고, 힐라이야는 더더욱 싫으니 역시 마귀를 구하지 않는 쪽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영령들은 사슬만 끊어 주면 알아서 신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행히 지금의 아이칼에게는 마귀를 반드시 구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절묘하게도 바로 몇 시간 전에 생겨난 이유다.
아이칼은 흘끗 위로 시선을 던졌다.
“이것은 나와 당신의 거래인 겁니다. 당신이 카티샤와 뭘 주고받건 이 일과는 별개라는 뜻입니다.”
영령들이 당황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아이칼의 머릿속에 울리고 있는 음성을 듣지 못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건방진…….”
여신의 전음이 날카롭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오직 아이칼에게만 들리는 음성이었다. 우아한 목소리 속에 숨기지 못한 예기가 번뜩거리고 있었다.
“뭘 원하는 거지? 너 역시 권능을 다시 돌려받기를 원하나?”
“그깟 건 됐고.”
카티샤와는 달리 아이칼은 치유의 권능에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은푸른빛 눈동자가 마귀의 오른 날개에 앉은 헤르젠 블라스코의 영령에게로 향했다.
헤르젠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저를 보는 아이칼을 불안하게 마주 보았다.
‘저놈 저거, 눈빛이 뭔가…….’
아이칼이 헤르젠 블라스코를 향해 고갯짓했다.
“저 영령.”
[뭐? 나 말이냐?]아이칼은 대답하는 대신, 머리 위의 둥그런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어 올렸다.
“헤르젠 블라스코의 영령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그것이 제 조건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