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이게 어떻게 된……?”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웬 검은 장발의 사내가 아기처럼 웅크린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곧바로 알아보았다.
노엘 귀어스트.
마귀의 몸속에 갇혀 있던 인간 사내의 아주 작은 영혼 조각 역시도 이곳으로 빨려 들어오며 본래의 형태를 회복한 것이다.
헤르젠은 상황에 맞지 않게도 감탄했다.
“거참, 미남이기도 하다…….”
카티가 로켓에서 보고 왔다는 마귀의 기억을 정신없이 설명할 때에도 빠뜨리지 않았던 사실이 그가 참 미남이더라는 것이었는데, 과연 여신도 혹할 만큼 준수한 용모였다.
헤르젠이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그럼, 정화까지는 얼추 성공한 것 같은데.”
대체 여긴 어디란 말이야? 설마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그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거라, 아가.”
헤르젠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누군가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골이 크고 날렵한 검은 곱슬머리의 사내였다. 많아야 30대 중후반은 되었을까? 그는 블라스코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 이였다. 역사 전시관 1층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얼굴이 아닌가.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러우면서도, 헤르젠은 그를 불렀다.
“라몬 님……?”
라몬 블라스코. 가문의 초대 가주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무사히 여기까지 왔구나, 33대야. 그리고 그대도, 귀어스트. 나머지 아이들은 다른 선택을 했나 보군.”
“여기가…… 어디입니까?”
초대께서 이곳에 계신 것을 보니 사후 세계인가 보다.
그러나 라몬은 이번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곳은 신계다. 신과 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세계.”
“아…….”
“사제로 다시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헤르젠.”
신계. 힐라이야를 비롯한 고대 신들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곳으로 마귀를 데려왔다. 정화식이 결국은 성공한 것이다.
헤르젠의 낯에 기쁨이 스쳤다가, 머릿속에 뒤따르는 새로운 가능성에 흠칫 굳었다.
‘그런데, 라몬께서 이곳에 실재하신다는 것은, 설마……?’
헤르젠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아버님!”
신전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뛰어들어 왔다. 그는 눈앞에서 눈이 부시게 휘날리는 금발을 보자마자 상대를 알아보았다.
“……세레이나?”
“잘 지내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틀림없었다. 생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금발의 눈부신 미인이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둥근 눈매와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손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부드럽게 솟아 올라간 코끝과 입술의 모양까지도.
숨을 거두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둘째 며느리였다. 아들의 연인이자 손녀의 어머니. 세레이나 아이옐나스가 생전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세니.”
헤르젠은 홀린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깨어나기 전에 이 말만은 전해야 했다.
“루테가 너를 참 많이 보고 싶어 한다.”
세레이나가 다 안다는 듯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꼭 숨을 거두기 직전과 같은 미소에 목이 메었다.
“네가 내게 맡긴 딸애도…….”
“알아요.”
“참 예쁘게 컸는데…….”
“저와 그 사람을 닮았을 테니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가 되었겠죠. 보지 않아도 알아요, 아버님.”
똑같이 목멘 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맑은 눈빛 속에 이 아이 역시 오랜 세월 품어 온 그리움과 변함없는 사랑이 엿보였다.
“긴 세월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세레이나가 한 걸음 더 다가와 헤르젠을 꼭 끌어안았다.
눈앞의 이 순간을 고스란히 들어내어 두고 온 아들에게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헤르젠은 욱신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세레이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계속 이곳에 있었던 거니? 잘 지냈고?”
“그럼요.”
“혹시 너도 힐라이야의 품으로 돌아갔을지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다만, 정말 그럴 줄은…….”
“라몬 님께서 계신 덕분이지요. 여신께서는 늘 블라스코에게 관대하시니까요.”
“관대하시다니?”
“당신께서 사랑하는 마귀를 수호하는 가문인데 어여삐 보지 않으실 리가요. 게다가 이제는 마귀를 온전히 정화해 돌려보내 주기까지 한걸요.”
세레이나가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죽은 듯 웅크려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펴고 있었다. 매끈한 등에는 가고일의 날개도, 흉측한 비늘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느리게 훔쳤다.
사내에게 다가간 라몬이 사내의 어깨에 흰 로브를 덮어 주었다. 그로서도 마귀와 재회하는 것은 거의 500년 만일 것이다.
“그대, 지난 세월은 외롭지 않았지? 내 아이들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나.”
“…….”
“이제 형벌의 시간은 끝났다. 곧 그분께서 오실 거야. 그대를 아주 오랜 시간 기다리셨어.”
그의 말대로, 신전 입구에서 부드러운 치맛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여신 힐라이야가 신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단 몇 걸음 만에 사내에게로 다가온 여인이 천천히 그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 어루만졌다.
사내의 눈에 점차 또렷한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가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그저 애틋한 침묵뿐이었다. 크게 부릅뜬 사내의 눈 밑에 투명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를 힐라이야가 가만히 품에 끌어안았다.
[잘 왔어, 노엘.]“…….”
[결국에는 네가 내게로 돌아오게 되는구나.]“우으으, 흐으…….”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울며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헤르젠은 5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돌아 재회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것으로 수백 년을 이어진 블라스코의 사명이 마침내 끝을 본 것이다.
정화식은 성공했다.
한동안 사내를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 채 고요히 멈추어 있던 여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신성한 음성이 메아리처럼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헤르젠 블라스코.]“예, 힐라이야시여.”
여신의 생김새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이렇다 정의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순결한 백지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를 직시하는 시린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만이 그녀가 두른 유일한 색채였다.
[이클라스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내게 걸었던 거래를 기억하겠지?]“……예.”
여신의 음성은 듣지 못했지만, 겁 없이 내뱉던 신수의 목소리는 헤르젠 역시 들었다.
신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는 영혼에게 자유를 달라니……. 헤르젠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힐라이야가 냉담하게 뇌까렸다.
[신의 약속에는 무게가 있지. 그걸 노린 거야. 건방진 놈. 아무리 어여삐 여겨 주려 해도 그 오만한 성질만은 도무지…….]이놈 자식. 역시 해방되기 전에 신께 불경하게 굴지 말라고 한 소리 하고 왔어야 하는 것을.
후회 막심한 헤르젠의 머리 위로, 마지못해 내뱉는 듯한 힐라이야의 선고가 떨어졌다.
[이클라스의 아들은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선에 한하여, 그대의 영혼은 자유롭다. 그대는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힐라이야는 더 부연하지 않고 몸을 떠는 사내를 옷자락으로 감싸 안았다.
둘의 모습이 곧 신전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또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고……?’
이건…… 상상치도 못한 관대한 처사가 아닌가?
헤르젠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제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레이나가 들뜬 표정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버님. 힐라이야께선 노엘과 화해하도록 놔두시고요. 당신을 한참이나 기다린 분이 계세요. 일단은 이쪽을 먼저 보셔야죠!”
“너 말고도, 여기 또 누가 있느냐?”
“그럼요.”
세레이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에게 자격을 부여받은 영혼에게는 세 개의 선택지가 주어져요. 영면, 순환의 고리, 그리고 신의 사제. 가장 후자를 택한 이들은 생전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이곳 신들의 세계로 오지요.”
“그렇다는 건, 그럼……?”
“제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에도, 먼저 오신 그분들께서 저를 이렇게 맞아 주셨답니다.”
신전의 입구에서 들이치는 밝은 햇살이 여인을 집어삼켰다.
헤르젠은 시야에 강렬하게 번지는 빛에 눈살을 찡그렸다. 손차양을 만들어 간신히 눈을 뜨자, 신계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끝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흰 돌담이 싱그러운 녹색 들판 위에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녹지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시작되었다.
“저희가 아버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여기에선 그곳 세계를 들여다볼 수 없거든요. 힐라이야 님을 제외하면요…….”
세레이나가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며 헤르젠을 들판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으로 인도했다.
투박한 계단 저 아래에서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헤르젠은 넋을 놓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가 한 발 한 발 좁혀질수록 길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점차 선명해졌다.
‘루티어드.’
두고 온 아이와 똑같은, 그러나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미소를 건 얼굴이 이윽고 또렷이 다가왔다.
“아버지.”
헤르젠이 가슴에 묻었던 첫아이가 두 팔을 벌려 그를 안았다. 심장 박동이 생생히 살아 있는 따듯하고 너른 품이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터졌다. 헤르젠은 자못 어른스럽게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간의 그리움을 모두 쏟아 내고야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