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 * *
4월 1일은 블라스코 막내 공녀의 생일이다.
지난 몇 년간 가문의 최대 행사로 개최되었던 공녀의 생일 파티는 이번 해에는 그만큼 성대하게 열리지는 못했다. 파티의 주인공이 생일이 다 지나도록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깨어나질 않으니 성년식도 자연히 뒤로 미뤄졌다.
“몸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예. 벌써 스무 번째 같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각하. 공녀님께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고 튼튼하십니다. 오러의 흐름도 안정되어 있고, 마기는 전혀 감지되지 않고요.”
저명한 오러 연구학자인 블라스코의 주치의가 딱 잘라 진단했다.
“아가씨께선 그저 모자란 잠을 몰아 주무시는 것뿐입니다. 푹 자고 일어나시면 거짓말처럼 멀쩡해지실 테고요. 제 논문 다섯 개를 걸겠습니다.”
루테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새근새근 잠든 카티샤의 곁에 침대 반절을 차지하는 눈표범이 웅크려 있었다. 그 역시 초대의 탑에서 돌아온 뒤로 세상모르고 잠든 참이었다.
아이칼에게도 혹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유심히 살폈으나, 천만다행히도 오러를 과하게 운용하는 바람에 녹초 상태가 된 것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사이좋게 꿈나라를 여행하는 막내와 눈표범 한 마리를 지켜보던 아르닌이 작게 키득거렸다.
“애기들이 그간 많이 애썼죠. 푹 자고 일어나게 두세요, 아버지.”
“……그래.”
카티샤가 잠결에 뭐라 칭얼거리며 눈표범의 북슬북슬한 털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루테는 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춰 준 뒤, 커다란 짐승의 턱 밑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아키.”
루테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창문을 밀어 닫았다. 완연한 봄 한가운데 푸른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이칼이 깨어난 것은 카티샤의 침실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떠나간 뒤로도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
부스스 눈을 뜬 눈표범이 곧장 인간화했다. 은푸른빛 눈동자에 아직 떨쳐 내지 못한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피곤해.”
초대의 탑에서 큰소리는 쳤다지만 역시 마귀를 정화하는 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랐다. 온몸의 오러가 그렇게나 쪽 빨려 나가는 감각이라니.
게다가 문제라면, 일이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그가 판가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칼은 비몽사몽한 눈으로 오른손을 슥 살펴보았다.
성공했다면 마땅히 돌아와야 하는 것이 있을 텐데…….
오른손에 난 흉터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안 돌아왔는데?”
카티샤가 분명 여신에게 거래를 걸었을 텐데.
신의 약속에는 무게가 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능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들이 내거는 약속은 그들의 격과 직결되었다. 그러니 정화식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성공했다면 힐라이야의 약속도 지켜져야 할 텐데.
아이칼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권능을 움켜쥐듯 손을 몇 번 폈다 접었다.
포기는 빨랐다.
“모르겠다.”
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카티샤가 들었다면 또 한바탕했을 테지만, 지금은 뭐…….
아이칼은 색색 잠든 카티샤를 제 양팔과 다리 사이에 가두듯 끌어안고 도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그녀의 달콤한 체향이 코끝에 기분 좋게 감돌았다.
졸음에 깜빡거리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지금은 더 자자, 그냥.
* * *
내가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정화식 이후로 사흘이나 더 지난 뒤였다.
정화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탑에 남은 마귀의 몸뚱어리에서는 영혼이 완전히 떠나갔다. 그 몸체는 본가의 역사 전시관으로 옮겨져 블라스코가 사명을 완수했음을 증명하는 증표로 보관될 예정이었다.
‘다행이다…….’
이제 남은 건 아이칼의 권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일단은 한시름 놓은 셈이었다. 그러고 나니 그간의 피로가 한번에 몰아닥쳤다.
사흘 간 밤낮없이 쿨쿨 자는 바람에 내 성년식은 자연히 미뤄졌다. 어차피 수도에서 처리할 일들도 아직 남았으니, 아예 아르템으로 돌아가고 나면 치르기로 가족들과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오늘.
오늘은 수도에서 할 일 중 가장 큰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황성에서 아스트로카 황제의 공개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황성으로 출발하기 위해 마차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눈표범이 내 뒤로 뛰어올랐다.
뒤따라 들어오던 베르너가 맞은편 자리를 다 차지한 커다란 짐승을 보곤 툴툴거렸다.
“좁아 죽겠는데, 그냥 인간화하지 그러냐?”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럴걸요.”
“뭐?”
베르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슬쩍 고갯짓으로 창가 자리에 앉은 아빠를 가리켰다. 아이칼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때마다 아빠는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귀엽기도 하지…….”
베르너가 내게 몸을 기울이고 속닥거렸다.
“쟤 일부러 저 모습으로만 다니는 거 아니야? 아버지를 꼬셔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글쎄에…….”
어쩐지 나는 알 것 같다. 아이칼이 아빠에게 받아 내야 할 허락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의 결혼부터 시작해서, 몇 달간 이렐 반도의 설원에 다녀오겠다는 계획까지.
‘그래서 밑밥을 깔아 두는 거구나.’
나는 어느새 아빠의 발치로 옮겨 간 눈표범을 떨떠름하게 지켜봤다. 아빠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키, 손.”
챡.
“말고, 오른손 줘야지.”
챡.
성체화하고 나서는 깜빡하고 있었던 사실인데, 아이칼은 본체로 돌아가기만 하면 유독 애교가 넘쳤다. 내 품에 꼭 차는 새끼 눈표범일 때부터 그랬다. 본인이 귀엽다는 걸 지나치게 잘 아는 놈의 자신감인 걸까?
그러나 내 기분은 곧 저조해졌다. 아빠가 살살 쓸어 주고 있는 눈표범의 오른발에 난 흉터를 발견한 탓이었다. 저게 아직까지 재생되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게도 그의 권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나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쩨쩨하시긴. 그냥 좀 빨리 돌려주시면 안 되는 거예요……?’
다른 차원의 신계에 있을 신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는 사이 문이 닫혔다. 이윽고 마차가 황실을 향해 출발했다.
* * *
페르테스 베르누아와 로사리아 베르누아의 공개 재판은 황성의 청문회실에서 열렸다.
황족이, 그것도 현황제가 이 청문회실의 심문석을 밟는 것은 역사에도 몇 없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나마 평민들이나 쓰는 수도 한복판의 재판장으로 끌고 가지 않은 것이 한때 황제였던 자에 대한 유일한 예우였다.
황제에게 내려질 선고는 어젯밤 7귀족회에서 이미 합의를 거쳤다. 황성에서 죽거나 중상을 입은 100여 명의 목숨값과, 제위 기간 동안 그가 평민들을 상대로 취한 폭리, 오르겐 후작가로 넘어갔던 막대한 국고까지 샅샅이 뜯어본 뒤에 결정이 났다.
“페르테스 베르누아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판결에 감히 이견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이의가 있다 하더라도 7귀족회 일원들이 상석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용감하게 손을 들고 황제를 변호할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황제 다음은 황후 로사리아의 차례였다. 로사리아의 이름이 불린 순간, 끌려 나가던 페르테스가 짐승처럼 몸을 비틀었다.
“닥쳐, 이 버러지 같은 것들. 네깟 것들이 감히 나를, 이 아스트로카의 황제를 감히 어찌할 수 있을 성싶은가!”
그러나 그는 고함치는 기세에 비해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다.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안정제를 푼 물을 사전에 먹였다고 들었다.
황실 기사들이 한때 주인이었던 자를 질질 끌어냈다.
나는 감옥으로 통하는 복도 벽에 기대서서 페르테스가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내를 찾았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로사, 로사…….”
여러모로 눈물겨운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내를 향해 툭 내뱉었다.
“저 여자가 어찌 될까 봐 불안한가 봐요?”
페르테스가 내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내 존재를 인식한 듯했다.
“……루테의 딸…….”
준수한 용모의 황제는 간데없고, 고작 며칠간의 고된 옥살이로 추하게 늙은 사내가 눈을 희번득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지? 저 멍청한 블라스코들이 수년 동안이나 공들여 이런 작전을 계획했을 리가 없다. 주변국들과 귀족회까지 장악해 가면서!”
“그렇다면요?”
“뭐……?”
나는 부채를 탁 접고 페르테스를 향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추악한 남자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그렇다면 뭐가 달라지나요? 나도 블라스코인데.”
“이…….”
“당신은 패배한 거예요.”
감출 수 없는 조소가 튀어 나갔다.
“당신 사랑이 그토록 소중하면, 남의 사랑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하고 애틋하다는 걸 알았어야죠.”
“어린 게, 제 아비를 닮아 건방지기 짝이 없이…….”
“그 어린것 하나 때문에 당신과 당신의 나라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세요.”
베르누아의 대는 끊겼다. 아스트로카의 왕좌에는 이전 왕조와 혼맥을 맺었던 페테로 왕국의 대공이 즉위할 예정이었다. 황실의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했으니, 제국은 블라스코의 위명 아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겠지.
블라스코는 아스트로카 황실의 뒤에서 제국을 조종하는 거대한 권세가가 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리라.
나는 부채로 사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상냥하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을 벌일 땐, 지금 내가 하는 짓거리가 언젠가 더한 무게로 돌아올 수 있단 사실을 항상 각오해야죠, 아저씨.”
악행은 무거운 추와 같다. 추를 밀어 앞서가는 사람을 해치고 나면, 그 피 묻은 추가 언젠가는 반드시 내 뒤통수를 치러 돌아온다.
“엄마가 목숨을 걸고 나를 할아버지께 보낸 덕분에, 이렇게 당신 뒤통수를 때릴 훌륭한 추가 되었네요. 그쵸? 그게 억울하면 20년 전에 나까지 찾아 죽이지 그랬어요.”
페르테스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설표가 내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기사들이 그의 수갑 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나는 눈표범의 머리를 쓸어 주며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을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아요. 데려가세요.”
“예, 공녀님.”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제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에게 끌려가는 황제의 뒷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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