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마침 청문회장 안에서 로사리아 베르누아의 판결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죄질은 황제보다는 가벼웠다. 황후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가진 재산 한 푼 없이 거리로 내쫓으라는 판결이었다.
로사리아는 남편과는 달리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난동을 부릴 정신도 없이 넋이 나가 보였다.
“…….”
나는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 내 앞을 지나치는 로사리아의 낯에서 죽음을 보았다.
‘오래는 못 살겠구나.’
그녀는 이미 차고 넘치는 죗값을 받고 있었다. 저를 보호해 주던 모든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심지어는 딛고 있던 지반마저도 허망하게 부서져 내리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본 악녀의 두 눈에는 삶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저 부부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차례로 들려오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내 직감을 정면으로 반박하듯,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내가 거두어도 될까?”
익숙한 목소리. 나는 보닛을 살짝 젖히고 오른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프리츠였다.
“태자 전하.”
“나를 모욕하고자 전하 소리를 하는 거라면 그만둬.”
“……네, 뭐.”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츠의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부모의 재판을 참관하는 그의 속도 지금 말이 아닐 것이다.
본래라면 황태자 프리츠 역시 지금 페르테스가 선 저 자리에 서서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귀의 정화식에 힘을 보탠 공을 인정받아 재판은 면했다.
사실 프리츠에게는 황실을 어지럽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혐의를 씌울 구석도 없었다. 그는 저런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오르겐 후작의 과보호를 받으며 자란 것치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비겁하고 옹졸한 구석은 있지만 악인으로 규정하기는 애매한 사람. 나는 진작 그의 처분을 결정한 뒤였다.
20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에서 세 명이 죽고 하나가 살았다. 살아남은 한 명은 바로 나다.
그리고 올해, 블라스코가 일으킨 쿠데타에서 죽거나, 곧 죽을 사람 역시 셋이다. 그렇다면 이쪽에도 한 명은 살아야 계산이 맞을 터. 프리츠는 살 것이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르겐의 작위는 내게 줘. 후작가의 빚은…… 연좌제라 치고 내가 대신 갚을 테니.”
물론 그를 살려 준다고 해서, 프리츠가 황태자 시절처럼 부와 권력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건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오르겐 후작 자리는 더 알맞은 이에게 돌아가야 해서요.”
“다른 누구? 설마 나이락 숙부님?”
“그자는 자기 발로 서지도 못하는 상태 아닌가요? 알코올 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던걸요.”
“그럼……?”
“대신 그자에겐 딸이 있죠. 똑똑하고 야무진.”
내내 내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이가 후드를 걷어 내고 앞으로 나섰다. 프리츠의 금발과 비슷한 색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그녀의 등허리로 쏟아져 내렸다.
니엘라가 생긋 웃으며 프리츠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사촌 오라버니.”
“……그래, 네가 있었지.”
나는 4년 전에 니엘라에게 네 몫을 내가 대신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오르겐 후작의 작위는 니엘라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물론 오르겐을 재건하긴 해야겠지만.’
오르겐을 빚쟁이로 만들어 제대로 박살 내 버렸으니 후작가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시켜야 할 텐데…….
대부분의 빚을 황실에 떠넘기긴 했지만, 아직 아스트로카 국내 귀족들에게 진 빚들이 야금야금 남아 있었다. 요즘 그 채무 관계를 어떻게 청산하느냐가 내 주요 관심사였다.
프리츠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머니께서 내게 주기 위해 차명으로 맡겨 두었던 재산이 있어. 오르겐의 빚을 갚는 데는 충분할 거야.”
망설임 없이 떼려던 걸음이 멈칫했다.
‘오호?’
중앙은행의 차명 계좌라니. 황실에서 몰래 빼돌린 뒷돈이라면 액수도 어마어마할 테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심정이었다.
나는 슬며시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며 짐짓 담담하게 물었다.
“뭘 원해요?”
“별거 없어.”
프리츠가 지친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냥, 다신 날 위협하거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해. 난 어머니와 함께 아스트로카를 떠날 생각이니까……. 뭐, 그분께서 그럴 의지가 있으시다면 말이지만.”
“떠난다고요?”
“그래. 적어도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으니.”
프리츠에게 아스트로카는 이제 부모를 죽인 원수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나는 승낙의 표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르겐 후작가의 채무 관련해선 니엘라와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네요.”
물론 프리츠가 멋대로 아스트로카를 훌쩍 떠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독한 마음을 먹으면 뭐든 못 하리? 바로 나처럼 말이다.
프리츠는 평생 내가 고용한 이들의 감시 속에 살아갈 것이다. 반격할 틈조차 만들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리츠가 황태자의 관을 내려놓고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내가 먼저 그를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황태자로서의 부와 권위를 누리지는 못해도, 인생의 다른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며 살았으면.’
나는 멀어지는 프리츠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 예상은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틀 뒤, 펠라임의 중앙 광장에 교수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폐후 로사리아가 감옥에서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럴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프리츠는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 뒤 곧바로 아스트로카를 떠났다.
20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마침내 블라스코의 숙원을 푼 순간이었다.
* * *
쿠데타 이후, 황성에 있는 마법 관리국의 마력 제어 장치는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펠라임 내에서 텔레포트 진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블라스코 역시도 수도 밖의 이동국을 이용해야 했다. 채비하고 나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루테는 요즘 부쩍 제 주위를 맴도는 눈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놈 자식은 남의 딸내미 가로채 간 도둑놈인데, 왜 본체로 돌아가기만 하면…….’
순백의 털에 멋들어진 장미 무늬가 난 눈표범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면 저도 모르게 혀부터 짧아지곤 했다. 버릇을 이렇게 들이면 안 되는데 이미 글렀다.
루테는 씩 웃으며 눈표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키, 손.”
설표가 눈으로 욕을 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귀찮은 듯 루테의 손에 제 앞발을 대충 턱 얹었다.
신수가 인간에게 반려견 취급당하는 것을 감수한다니.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착하기도 하지. 내 딸이 그렇게 좋아?”
루테는 작게 키득거리며 눈표범의 앞발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는 며칠 동안 이 아이의 오른발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어제는 그제에 비해 흉터의 길이가 3mm 정도 줄어들었는데. 과연 오늘은?
‘……역시.’
루테는 어제에 비해 조금 더 줄어든 흉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거, 알고 있었니?”
표정을 보아하니 몰랐던 모양이다.
본인조차 그 사실을 지금 깨달은 듯, 설표의 동공이 놀란 기색을 띠고 좁아져 있었다.
아이칼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덩치 큰 귀염둥이 대신 말 안 듣게 생긴 잘생긴 청년이 나타나자 루테의 미간에 도로 금이 갔다.
그러나 아이칼의 관심은 온통 제 손에 쏠려 있었다.
‘흉터가 사라져 간다.’
그렇다는 건…….
아이칼은 제 손목을 들어 세게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손등이 사정없이 찢겼다.
“아이칼!”
놀란 루테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일에 그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아물고 있었다.
‘치유’가 돌아왔다. 상위 개념인 치유의 권능이 돌아왔다는 건, 정화의 권능은 이미 완벽하게 원상 복구했다는 뜻일 테다.
사라졌던 권능이 돌아오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벌어졌던 아이칼의 입술이 점차 호선을 그렸다.
아이칼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아이러니하게도 본래 제 것이었던 힘을 일부 되찾은 순간에서야 그는 종전까지 제가 텅 비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생애 처음 절감했던 무력감이 흩어지고 있었다.
아이칼이 들뜬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카티가 나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뭐?”
루테는 의아하게 되물었다가,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도록 웃는 얼굴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같이 자라다시피 해 그런가, 아니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래서인가.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이 카티샤와 꼭 닮았다.
나 참, 이런 얼굴을 앞에 두고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루테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 순간, 아이칼이 폭탄을 터뜨렸다.
“카티랑 성혼해도 돼?”
“…….”
“이렐 반도로 가고 싶은데.”
당당한 요구에 루테가 즉각 도끼눈을 떴다.
이건 뭐, 싫은 소리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그거 카티샤랑 합의한 사항인 거야?”
“한참 전에. 카티가 아빠 허락을 받아 오라고 했어.”
“안 돼.”
“왜?”
“카티는 나랑 황금 사막부터 먼저 가기로 했거든.”
“사막……?”
아이칼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고, 루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바나도 더워서 정신 못 차리는 눈표범이니 사막과의 상성은 최악이겠지.
아이칼이 짜증이 그득한 눈으로 루테를 노려보았다.
“내가 먼저야.”
“아니, 내가 먼저다. 엄마 고향에 가 보기로 약속했다고.”
“카티는 더운 거 싫어해.”
“추운 건 더 싫어하지. ……너, 이런 상황에서 그 모습을 하는 건 반칙 아니니?”
어느새 다시 눈표범으로 모습을 바꾼 아이칼이 루테의 품에 머리를 슥슥 비볐다. 이를 꽉 깨문 주제에 이래도 안 넘어올 테냐는 듯 긴 꼬리를 흔든다.
“……그런 작전은 안 통한다.”
말과는 다르게, 루테의 눈은 이미 의지를 벗어나 빠르게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그것 보라는 듯 눈표범이 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아, 역시 너무 귀엽…….’
귀여우면 다인가?
‘맞아, 귀여우면 다지.’
아기 때도 깨물어 주고 싶게 생겼었는데, 덩치가 커지니 커진 만큼 더 귀여워졌다.
루테는 짐승의 귀여움이란 크기에 비례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강경하던 그의 눈빛이 도로 애정 가득하게 풀어지려던 순간, 어느새 마차에 오른 카티샤가 그를 눈표범의 마수에서 구해 냈다.
“아빠, 거기서 뭐 하세요? 아키, 뭐 해?”
카티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표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마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마차에서 카티샤의 작은 비명 소리와 베르너와 아르닌이 투덜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 씨. 야, 복슬이. 넌 마차 지붕 위에 앉아서 따라와!”
“아키, 무겁…….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꼬리를 왜 이렇게 흔들어?”
루테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마차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느새 카티샤의 곁을 당당히 차지한 눈표범이 제 꼬리를 입에 물곤 우물거리고 있었다.
‘눈표범이 꼬리를 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심리적 안정감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
역시 귀엽잖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래도 정말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사랑하는 막내딸을 제 손으로 놈에게 밀어 줄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루테는 아르닌의 옆에 대충 몸을 구겨 넣은 뒤, 우울하게 마차 벽을 두드렸다.
“출발해. 아르템으로 돌아간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