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 * *
꼬박 한 달 반 만에 돌아온 아르템은 지난 몇 년간 그랬듯 변함없이 따사롭고 평화로웠다.
본가에서는 내 성년식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성년식은 본가의 예배당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후계가 귀한 블라스코의 특성상, 직계들은 만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아르템의 예배당에서 신과 선조들에게 바치는 맹세의 의식을 치렀다. 벌써 4월 중순이 넘어가고 있으니 나는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성년식의 날, 나는 꼭두새벽부터 마가렛과 카렌에게 팔을 한 짝씩 붙들렸다.
“보통은 성년식과 약혼식, 혹은 성혼식을 동시에 치르는 경우가 많기는 해요. 공자님과 공녀님 같은 경우가 특이한 것이지요.”
“그럼 내 경우는?”
“준비할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약혼식과 함께 치렀을 테지만요. 일단은 성년식부터 치른 뒤에, 약혼이나 성혼식은 천천히 준비하자고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욕실에서 족히 4시간을 보내고 나온 내 피부 결은 그야말로 진주를 갈아 뿌린 듯 매끈하고 보드라웠다. 마가렛이 정성껏 빗어 준 곱슬머리는 등허리까지 닿도록 길게 풀어 내렸다.
성년식 때 입을 옷은 가벼운 프릴과 섬세한 레이스를 단 흰색 드레스였다. 성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의식이니만큼 지나치게 화려한 디자인이나 보석은 지양하는 것이 관례다.
성년식을 치르는 장소는 성년을 맞은 이의 탄생화로 꾸며졌다. 예배당 안에는 내 탄생화인 아몬드꽃이 만발했다. 얼기설기 엮은 꽃가지에 옅은 분홍빛 꽃잎들이 소담히 매달려 있었다.
‘예쁘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꽃으로 장식한 길을 걸어 제단 앞으로 올라갔다.
“우리 막내따님.”
기다리고 있던 아빠가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었다.
“처음 왔을 땐 말라비틀어진 오렌지 같더니, 드디어 자몽이 됐네. 예뻐라.”
“치이…….”
“평생 애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어, 응?”
커다란 손에 양 볼이 마구 짓눌렸다. 나는 샐쭉하게 아빠를 흘겨보았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한 번도 내가 진짜 어린애라고 여겨 본 적이 없는데, 아빠가 이렇게 말하니 괜히 성년을 맞은 게 아쉬워졌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한텐 그냥 계속 애기 할래…….”
“왜? 언제는 이제 아기 아니라고 온 집안사람들한테 정정하고 다녔잖아.”
“그렇긴 하지마안.”
황실과 마귀라는 큰 고비를 넘기고 나서인지, 한없이 어리광만 부리고 싶었다. 내 등을 토닥인 아빠가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늦었지만 성년이 된 걸 축하한다, 카티샤.”
“네에…….”
“그래도 내 눈에는 여전히 요만한 꼬맹이야. 처음 네가 아르템에 오던 날처럼.”
“…….”
“그러니 언제든 힘에 부치는 일이 생기거나, 이르고 싶은 게 있거나, 네 편이 필요하거든 내게 와. 할아버지는 이제 없어도 아빠는 있다는 걸 기억하고.”
나는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아르닌 언니와 베르너 오빠가 차례로 내 양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무사히 성년을 맞은 걸 축하해. 이제 아프지 말고, 오빠랑 수련 열심히 해야지. 그렇지?”
“안 돼. 우리 카티샤는 나랑 동업하기로 했어. 에이슬라 공방에 약초 수급하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 공주님. 기억하고 있지?”
물론 전부 기억하고 있다. 오빠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같이 수련하기로 한 것도, 언니의 공방을 좀 더 본격적으로 확장하기로 한 것도. 뿌듯한 충만함이 차올랐다.
‘앞으로는 더 바빠지겠어.’
가족들이 모두 아래로 내려가자, 제단 앞에는 나 홀로 남았다.
“나, 카티샤 아브릴 블라스코는 성년을 맞이하여 블라스코의 울타리를 이루는 일원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가문의 아이와 약자를 보호하며 언제나 자긍심을 가지고 블라스코의 명예를 위해 싸울 것임을 신과 선조들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블라스코의 성년 서약문을 읊은 뒤, 준비되어 있던 단도를 들어 검지를 살짝 그었다. 몽글몽글하게 맺힌 핏방울이 제단 위를 덮은 블라스코의 상징 위로 똑 떨어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가 제단 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나비는 곧 푸른 날개를 접고 아몬드꽃 위에 앉았다.
문득 영령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보고 싶다…….’
신계에선 뭘 하고 계실까? 귀어스트를 힐라이야에게 무사히 인도하셨을까? 거기서 백부님을 만나셨을까? 엄마는?
그리움에 잠겨 나비의 움직임을 좇는데, 뒤에서 누군가 계단을 밟는 기척이 났다. 이윽고 어깨에 얇은 숄이 덮였다. 아이칼이었다.
숄을 걸쳐 주며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나직한 속삭임이 귓불을 간질였다.
“무사히 성년식까지 치르게 된 걸 축하해, 카티.”
나는 얼른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모든 일이 다 잘 끝났지만, 내가 딱 하나 이루지 못한 일이 자꾸만 마음을 두들겼다.
“……내 성년식에 와 줘서 고마워.”
결국 네 권능을 되찾아 주겠다는 결심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칼의 권능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어렵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떻게든 사과를 하려는데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미안해.”
“뭐가?”
“그냥…….”
내가 얼른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이칼이 팔을 풀고 나를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결국 여신의 권능을 되찾는 데엔 영영 실패했는데도 아이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키.”
“응.”
“나 지금 예뻐?”
자신 없이 묻자, 아이칼이 웃음기 띤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만하면 나, 잘 큰 것 같긴 한데…….”
“내 카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네가 포기한 것만큼의 가치가 과연 내게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
열다섯 살, 아이칼을 떠나보내던 날 밤에 결심했던 것들이 있었다. 여신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나를 되찾아 온 그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끔 멋지게 살아 보겠노라고. 그러니까 성년을 맞는 날 꼭 그 자리에 네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는데…….
지금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새롭게 바꾸어 버린 이 세계가 과연 사멸한 세계보다 확실히 더 아름다운 게 맞는지.
아이칼의 선택은 정말로 틀린 것이 아니었을지.
그는 정말로 힐라이야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지.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얼굴 근육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너는 그녀의 권능을 포기한 걸 살면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아이칼이 곤란한 신음을 내며 엄지로 내 눈 밑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미리 말을 할 걸 그랬나.”
“뭘……?”
그때였다. 예배당의 창문을 통해 들이친 빛이 제단 위로 곧게 내리쬐었다. 아득히 메아리치는 음성이 머리를 때렸다.
“약속은 지켰다.”
“어……?”
나는 환청을 들은 줄로만 알았다. 아이칼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음성에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잘못 들은 것으로 치부했을 텐데.
흘끗 위를 일별한 아이칼이 픽 웃으며 긍정했다.
“예. 틀림없이.”
“아이칼, 너 지금…….”
“이것으로 상호 간 진 빚은 없는 것으로.”
깨달음은 금세 왔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설마, 방금 내가 들은 게 힐라이야의 전음이야?
아이칼이 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동그랗게 핏방울이 맺힌 검지 위로 그의 입술이 다녀갔다.
“아…….”
변화는 작지만 확실했다.
나는 베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아문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입술에 따듯하고 말랑한 것이 와 닿았다.
내게 입술을 겹친 아이칼이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티는 이미 내게 모든 걸 돌려줬어.”
“…….”
“고마워, 사랑하는 내 여름.”
그의 안에 여신의 권능이 충만하게 차올라 있음을 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물들었다.
‘그럼 약속은 지켰다는 게…….’
내 부탁을 들어주신 거구나.
목에 걸고 있던 로켓 속에서 무언가가 우지끈 부서졌다. 힐라이야의 권능을 지지대 삼아 마지막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아공간이 소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멸한 세계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한 현실이다. 마귀와 영령은 신께 돌아갔고, 신수는 권능을 되찾았다.
마지막까지 어긋나 있었던 조각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너어…….”
싱글거리는 아이칼의 눈웃음을 보니 권능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미 고장 난 눈물샘이 다른 이유로 넘쳐흘렀다.
“너는, 너는 진짜……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쿵 때리자 아이칼이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니지?”
“짜증 나서 우는 거야, 너 때문에……!”
“그것뿐이야?”
“그리고…… 또, 다행이라서…….”
너무, 너무, 너무 다행이야. 네가 잃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네가 그랬듯 나도 다시 널 완벽하게 되돌려줄 수 있어서.
목소리가 뭉그러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칼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좋아.”
“뭐가……?”
“나를 위해서만 울어, 카티샤.”
엄지로 축축한 뺨을 훔쳐 내던 아이칼이 내 입꼬리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핥았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그 외엔 어떤 이유도 용납하지 않을 거니까.”
“노력은 해 볼게…….”
내 눈물까지 모조리 저당 잡은 그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가까이,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간질일 만큼 가까이 다가온 아이칼이 작게 속삭였다.
“성년식의 마지막 관문이 있다던데.”
“어떤……?”
나는 훌쩍거리다 말고 아, 하는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성년식에는 보통 세 가지가 들어간다.
탄생화, 맹세의 서약. 그리고 선조들 앞에서 나누는, 평생을 함께할 이와의 키스.
우리의 시선이 지척에서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포갰다. 아이칼에게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기운이 곧 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미 생일은 한참이나 지났지만, 이제야 겨우 성년의 첫발을 내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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