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 * *
그날 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흘러갔다.
제단 앞에서 입을 맞추는 우리를 끈질기게 지켜보던 가족들이 키스가 깊어질 조짐이 보이자마자 달려들어 우릴 떼어 놓은 것도.
그 뒤로 이어진 저녁 만찬에서 호미 주방장이 테이블 다리가 휘어지도록 솜씨를 발휘한 것도. 식사 내내 아이칼이 가족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본체 모습을 유지한 것도.
“그런 키스는 성혼식을 치른 다음에나 하는 거야, 카티. 넌 아직 멀었다고……. 거기, 딴생각하는 오렌지. 아빠 말 안 듣지?”
“그냥 두세요, 아버지. 이미 키스 정도를 걱정할 단계는 한참 지난 것 같으니까. 그래도 성혼은 아직 안 돼, 카티. 우리 집 장남부터 먼저 보내야 할 거 아니야……. 야, 복슬이! 카티 허벅지에 머리 기대지 마!”
식후 티타임까지 이어지는 가족들의 잔소리마저도, 어느 순간 하나 뺄 것 없이 충만하게 행복했다.
“자, 성혼 허락받으려면 말 잘 듣기로 했지? 오랜만에 사바나에나 가 있자, 아키. 아까 하는 걸 보니 분명히 오늘 밤에 또 카티 침실로 숨어들어 갈 낌새야.”
밤이 되자, 아빠는 본체로 돌아간 아이칼을 끌고 사바나로 가 버렸다.
아무래도 기운을 좀 죽여 놔야겠다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나?
나는 작게 웃으며 아빠에게 반쯤 끌려가는 눈표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새벽에 봐!’
* * *
따듯한 물에 목욕까지 하고 나오니 온몸이 나른했다. 나는 창가에 앉아 깜빡 졸다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퍼뜩 깨었다.
“아키, 왔…… 어?”
창문을 두드린 이는 아이칼이 아니었다. 나는 거대 가오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스쾨티모르. 아빠의 사바나에 사는 환상종이자 내 친구였다.
아이칼이 보냈구나.
나는 당장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조심히 창틀을 딛고 서자, 가오리가 고도를 낮추며 내게 등을 내주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가오리의 등에 탔다. 스쾨티모르가 밤공기를 가르고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발 아래로 베르너의 수련장과, 아르닌의 대장간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얼음 성처럼 보이는 영령의 탑을 동쪽으로 끼고 선회하자, 드넓게 펼쳐진 숲지대가 보였다.
가오리는 사바나의 결계를 가뿐히 통과했다. 이윽고 9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광활한 초원의 풍경이 아래에 꽉 차게 펼쳐졌다. 달빛만이 비치는 깊은 밤, 스쾨티모르의 거대한 그림자가 초원을 가로질렀다.
열 살 꼬맹이 시절에 손을 잡고 함께 건넜던 사바나를 반쯤 가로지르자, 저 멀리 얼음으로 뒤덮여 반짝이는 절벽이 나타났다.
스쾨티모르가 낮게 활강했다. 나는 가오리의 등에서 미끄러지듯 뛰어내려 기다리고 있던 이의 품에 안겼다.
가볍게 나를 받은 아이칼이 뺨에 도장을 찍듯 꾹 입술을 눌렀다. 나는 답례처럼 그에게 뽀뽀를 퍼부은 뒤 물었다.
“왜 여기로 불러? 더워서 싫어하잖아.”
“밤이니까 괜찮아. 네 침실은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서.”
“밤엔 아무도 안 들어오는데?”
“들어와. 나비 같은 거.”
아이칼이 눈으로 주위를 휙 훑었다. 방해꾼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어차피 누가 들어와서 내가 사라진 걸 발견하면 바로 여기부터 뒤질걸.”
“여긴 크니까. 찾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나랑 몰래 뭐 하려고?”
장난스럽게 되물었는데, 되레 가늘어진 눈초리가 돌아왔다.
“너 나한테 주기로 한 거 되게 많은데. 기억 안 나?”
“……?”
내가 뭔가 약속한 게 있었나?
고민하는 기색이 그의 눈에도 보인 모양이었다. 아이칼이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와, 잊어버렸다고?”
“으음…….”
“내가 네 성년식만 기다리느라 하루하루 애가 달았는데 넌 새카맣게 잊어버렸다고?”
“어어…….”
“난 네 아빠랑 사막에 가겠다고 약속한 것까지 다 봐주고 있는데, 정작 넌 나랑 하기로 한 건 다 까먹었다고?”
“아니야. 기억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냅다 고개부터 얼른 끄덕였다. 뭔가를 하기로 했었나 보지!
아이칼은 내 말은 믿지 않는 듯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가 내게 팔뚝을 맞았다.
투닥거리며 마른 장초 지대를 벗어나자 곧 호수를 낀 푸른 들판이 나타났다. 달빛이 고요한 호수의 수면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감탄을 터뜨리며 물가로 다가갔다.
“예쁘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수면 위로 손을 뻗는데, 푹신한 실내화 앞코가 돌부리에 툭 걸렸다.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어, 어?”
“카티, 조심…….”
아이칼이 잽싸게 나를 낚아채려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이 어긋났다. 우리는 함께 물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첨벙하는 물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이칼이 주욱 미끄러지는 나를 붙잡아 제 위로 올렸다.
“괜찮아?”
“아으, 차가워…….”
물속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지는 꼴은 면했지만, 아이칼도 나도 흥건히 젖었다. 나는 반쯤 젖은 머리에서 물을 짜내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아키, 이왕 젖은 김에 물놀이할래?”
“응?”
나는 그가 반문할 틈도 주지 않고, 손으로 물을 퍼 올려 아이칼에게 끼얹었다. 그는 내 허리께에 감긴 잠옷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데 정신이 팔려 이번에도 물벼락을 피하지 못했다.
“……!”
나는 아이칼이 눈을 찡그리는 틈을 타 얼른 품에서 벗어났다.
“하.”
내가 후다닥 거리를 벌리자, 아이칼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 사이로 은푸른빛 눈이 안광을 뿜었다. 오기가 바짝 서린 눈이었다.
“너…….”
내 주위로 물살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기겁해 뒤로 더 물러났다.
“장난인 거 알지? 진심으로 받으면 안 된다? 아, 뭐야! 오지 마!”
아이칼이 오러로 밀어낸 물이 내 머리 위로 사정없이 끼얹어졌다.
나는 간발의 차로 물벼락을 피했다. 아이칼이 흥미롭다는 듯 감탄했다.
“피했네?”
“야아, 오러 쓰기 없기야!”
“지금이라도 이리 오면 봐줄게, 카티샤.”
“에이. 그러면 재미가 없잖……”
그렇게 낄낄거린 순간 뒤에서 들고일어난 파도에 기습당했다. 머리카락을 짜낸 보람도 없이 온몸이 흠뻑 젖었다.
“……너어…….”
내 오기에도 불이 붙는 건 금방이었다.
“너, 이리 와……!”
야밤의 호수에서 잠시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수심이 확 깊어지며 허리 위까지 물에 잠겼다. 이제 누가 더 많이 물벼락을 끼얹었는지는 논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미 둘 다 물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다.
결국 내 입에서 먼저 항복 선언이 나왔다.
“그만, 항복! 내가 졌어……!”
“늦었어. 항복은 아까 했어야지.”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좁힌 아이칼이 여유롭게 내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나는 운 없이 포박당한 희생양처럼 그의 품에 갇혀 밀려드는 키스를 받았다.
젖은 옷감 탓에 끌어안긴 몸의 골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 서늘하던 아이칼의 체온에 금세 열감이 돌았다.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의 온도가 유독 뜨거웠다.
아이칼은 한참이나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입술부터 입 안쪽까지 샅샅이 핥고 머금었다.
나누어 쉬는 숨에 금세 몸이 더워졌다. 도망갈 수 없도록 온몸이 그에게 꼭 죄인 탓에 이렇게 선 채로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술이 비틀릴 때마다 달뜬 호흡이 쏟아졌다.
“하아…….”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급한 갈증을 해갈한 듯 아이칼이 입술을 떼었다. 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푸른빛 눈동자가 내 어깨부터 물에 반쯤 잠긴 허리까지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입으나 마나 한 걸 입었네.”
하필이면 여름 잠옷이라 천도 얇았다. 숄을 고정하고 있던 클립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물을 잔뜩 먹어 묵직해진 숄이 아이칼의 손에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공기 중에 드러난 맨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의 눈길을 따라 내 몸을 살피는 대신, 그와 비슷한 눈빛으로 아이칼의 상체를 훑었다.
“지금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밤에도 후덥지근한 초원의 공기 탓에, 아이칼은 상체에 홑겹으로 된 상의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물에 젖어 반투명해진 천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기로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꼴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나는 퍼뜩 기억해 냈다. 내가 아이칼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몇 주 전에 로켓 속에서 나눴던 대화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아키.”
맞다…….
“주기로 한 건 나중에 확실히 받아 갈게.”
은밀하고 장난스럽게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떠올린 순간, 입술이 부딪치듯 닿았다. 입술 사이를 가르며 아이칼이 다시금 깊숙이 내게 파고들었다.
시작부터 조급했던 키스가 길어질수록 호흡이 거칠어졌다. 서로 닿아 있는 모든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배 속을 뭉근히 자극하는 긴장감에 물에 잠긴 발가락이 곱았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아이칼의 목에 매달리듯 끌어 안기자, 떨어질 줄 모르고 붙어 있던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나갈까?”
“……응.”
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이칼이 나를 안아 들었다. 뭍까지는 그의 걸음으로 채 열 걸음도 되지 않았다.
곧 몸이 푹신한 풀밭 위에 쏟아지듯 눕혀졌다. 수억 개의 별이 박힌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지기 무섭게 아이칼이 내 위로 몸을 숙였다. 이제는 별 대신 백색 머리칼과 요요하게 빛나는 은푸른색 눈동자가 시야를 온통 차지했다.
나는 홀린 것처럼 아이칼의 몸에 달라붙은 젖은 천을 젖혔다. 어깨에 나 있던 흉한 상처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옆구리 역시도 깨끗했다.
‘없어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없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아이칼이 나를 따라 웃으며 속삭였다.
“마음에 들어?”
“응. 이제 좀 예뻐졌어.”
“다행이네.”
그가 제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내 손을 떼어 손등부터 손바닥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손목 안쪽을 살짝 깨물어 잇자국을 내면서도 아이칼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늘이 드리운 은푸른색 눈이 묘하게 타는 듯했다.
여전히 우리 사이의 거리는 주먹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아이칼의 몸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고스란히 내 살갗 위를 굴렀다.
불쑥, 나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 나갔다.
“지금 받아 갈 거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