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지, 아이칼이 멈칫했다.
그러나 당황도 잠시였다. 그가 피식 입술을 말아 올렸다.
“기억이 났나 보네.”
“아, 아까부터 알고 있었어.”
“거짓말. 아직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것 같은걸.”
확신하는 어투였다.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아빠나 가족들에게 아기 취급받는 건 익숙하고, 가끔은 좋기도 하지만 역시 아이칼마저 나를 어린아이 보듯 하는 건 싫다. 방금까지 그렇게 키스해 놓고!
“이참에 하나 확실히 하겠는데, 나 성인이 된 거 이번이 처음 아니거든? 전생에서도 딱 이 나이까지 살았어.”
“그런데?”
“그러니까 하나도 모르진 않는다고! 너야말로 인생 1회 차인 주제에 뭘 그렇게 잘 아는데! 누구랑 해 봤어?”
“아니.”
“그럼 너나 나나 뭐가 달라……!”
내 논리는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아이칼이 딱 잘라 지적했다.
“나는 반은 인간이 아니잖아.”
“그게 뭐?”
“그런 건 굳이 학습하지 않아도 알게 되어 있거든. 원래 짐승의 욕구라는 건 인간처럼 복잡하고 고차원적이지 않아서.”
아이칼이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가늘어진 눈매가 요사스럽기까지 한 것과는 별개로, 예상치 못한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종족 번식의 욕구,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
나는 금세 자신감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건 인간도 별로 다르지 않을걸……?”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이칼이 헛웃음을 지으며 내 이마에 딱 손을 튕겼다.
“됐다.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해.”
“…….”
“키스나 해 줘, 카티.”
물에 흠뻑 젖은 나를 만지작거렸던 건 언제고, 그는 키스 이상으로 나를 건드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치.”
아이칼이 요구하는 대로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갑자기 왈칵 울분이 치솟았다.
애초에 생각도 없었으면, 아까 다 잊어버렸냐면서 힐난했던 건 뭐야? 나가자는 건 뭐고? 나 놀림당한 거야?
“넌 생각도 없으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떠봐?”
“생각이 없긴 누가 없어? 원인은 너잖아.”
“내가 뭘? 난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하는 것부터가 이미 아무것도 모른다는 증거라고.”
아이칼이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과 어깨, 허리를 가볍게 훑었다. 그 즉시 옷과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훅 날아갔다. 온몸이 보송보송해졌다.
“……장난 친 거야?”
“장난이라니. 넌 내 속을 몰라.”
“그럼 왜…….”
아이칼이 내 코끝에 쪽 입을 맞췄다.
“여긴 네겐 너무 야생이잖아.”
“장소가 중요해?”
“어리고 약한 인간 아가씨에겐 너무 중요하지.”
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공연히 빨개진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어리고 약하다는 표현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가씨라는 어감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원하기는 한다는 거네…….’
아이칼이 풀밭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숄을 집어 툭툭 털었다. 그는 새것처럼 뽀송하게 마른 숄로 나를 꽁꽁 싸맨 뒤, 나를 안고 반 바퀴 굴렀다.
눈높이가 뒤바뀌자 나는 이제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이칼이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진 내 머리칼을 빗어 귀 뒤로 꽂아 주었다.
“그러니까 사막 말고 이렐 반도로 먼저 가.”
“……거기 가면 할 거야?”
“거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카티,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체 왜 그거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야 네가 날 그렇게 잡아먹고 싶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정작 건드리지는 않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나도 궁금했다. 이만하면 키스는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와 나누는 키스를 좋아한다. 입술을 머금고 서로를 샅샅이 탐색하는 접촉에서 오는 간지러운 흥분감은 무척이나 중독적이었다.
게다가 차고 고요한 성질을 가진 아이칼이 입을 맞출 때만큼은 열띤 눈을 하고서 흐트러진 숨을 쉰다. 사실은 그게 가장 몸서리치도록 좋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알아서 더더욱 그 너머에 있을 감각이 궁금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깊고 농밀하게 얽혔을 때 아이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고 싶었다.
나는 작게 대답을 웅얼거렸다.
“……하고 싶으니까.”
“뭐?”
“너랑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으니까…….”
“……미치겠네.”
아이칼이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렸다. 참지 못하고 내게 다시 입 맞추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잠겨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말만 해서 나중에 날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감당하기 힘든가? 왜?
“……좋아.”
아까부터 달아오른 귓불과 목덜미가 식을 줄 몰랐다. 나는 이미 양 뺨까지 빨개진 상태라는 것도 모른 채 굳게 다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일단 알겠어. 좋아. 이렐 반도로 갈 때까지 나도 언니에게 배워 올게.”
“……카티, 그런 거 알려 달라고 하면 네 언니 뒤로 넘어가.”
“내 사전 지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건 사실 인정하는 바니까. 적어도 내가 뭘 모른다는 건지는 알아야겠어. 언니는 잘 알 거야.”
“그럼 난 이제 더더욱 네 침실에는 얼씬도 못 하게 되겠지. 됐어, 나중에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아냐, 확실히 이론을 알기는 해야 해.”
“장담컨대 네가 뭘 듣고 오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거야. 차라리 체력 단련을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걸.”
“……그 정도야?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정도로 힘든 거라고?”
“네가 자꾸 그렇게 귀여운 말만 하면 더 그렇겠지. 카티, 이제 그만.”
아이칼이 마른세수를 하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 상상이 어디까지 뻗어 갈지 두려운 듯했다. 그가 내 이마에 콩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나 괴롭히지 말고, 사랑한다는 말이나 해 줘. 듣고 싶어.”
“사랑해.”
“더. 계속.”
“왜 나만 해? 서로 한 번씩 해야지.”
“알았어. 사랑해. 이제 다시 카티 차례야…….”
초원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환상종이 신비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펼쳐진 밤하늘 아래, 부드러운 풀밭 위에서 우리는 한참을 더 안고 뒹굴었다.
하얀 잠옷 자락에 풀물이 들면 아이칼이 대번 알아채고 정화의 권능으로 깨끗이 지워 냈다. 그러면 나는 그게 또 좋아서 그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진짜 여기서는 싫어?”
“그만해, 그만. 감당 못 할 말은 제발 하지 말라고.”
“키스는 그렇게 해 놓고 갑자기 왜 부끄러움을 타는 거야?”
“부끄러운 게 아니라…… 하. 떨어져, 카티. 자꾸 자극하지 마.”
“왜애, 너도 다 내 거니까 마음대로 할 거야…….”
동화처럼 평화롭고 아늑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저택의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간밤에 아이칼이 나를 침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침대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빈자리를 인식하기 전에 아이칼의 목소리를 먼저 들었다.
“언제까지 주위를 맴돌기만 할 거지? 계속 훔쳐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론데.”
[훔쳐보는 게 아니라 감시다, 욘석아. 어제 둘이 몰래 사바나로 빠져나가서 뭘 했는지 소상히 보고해.]반쯤 내려진 캐노피 밖에서 그가 누군가와 소리 낮춰 투닥거리고 있었다.
“안 건드렸어. 진짜라고. 이 집 인간들은 왜 나만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어제 쟤가 한 말들을 들었어야 해. 난 하루가 다르게 바짝 말라 가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겁도 없이…….”
[원래 남의 집 귀한 딸아이 훔쳐 가는 놈은 뭘 해도 좋은 소리는 못 듣기 마련이다. 억울해도 별수 없지, 뭐.]“……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들고 튀는 수가 있어.”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나 봐.
나는 비몽사몽간에 더듬더듬 손을 뻗어 캐노피를 쥐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뜬금없이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
캐노피를 젖히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열린 캐노피 사이로 창가 앞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아이칼이 보였다. 그는 창틀에 팔을 대충 걸치고 활짝 열린 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카티?”
캐노피 밖으로 손만 내민 나를 발견한 아이칼이 곧장 일어났다.
“깼어?”
“응……. 그런데 아키, 방금 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야……?”
“아아.”
그는 의미심장한 소리만 낼 뿐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이불 속에서 번쩍 꺼내 제대로 침대에 앉혀 주었다. 그러곤 캐노피를 완전히 젖혀 묶었다.
“뭐야……?”
밖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들어왔다. 부드럽게 나부끼는 실크 커튼 사이로 푸른 나비가 날갯짓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눈에 띄던 나비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침대를 벗어나 창가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이상하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창틀에 팔을 괴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평화로운 아르템 본가를 배경으로 푸른 나비가 원을 그리며 날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그것이 나와 눈높이가 맞는 곳에서 멈췄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몽글거렸다. 아마도 설렘인 것 같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나비가 검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르템으로 돌아온 직후에도, 성년식을 치르던 예배당에서도, 저 푸른 나비가 맴돌고 있었다.
블라스코의 상징색과 상징물의 조합이라니. 그저 우연일 뿐인가? 나는 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어 보았다.
“할아버지?”
그럴 리가 없는데. 헤르젠 할아버지가 떠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렇게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인데…….
푸른 나비가 대답이라도 하듯 날개를 움직였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아이칼이 무심하게 툭 말했다.
“장난은 그만 쳐, 영감. 언제까지 엿보기만 할 거야?”
[쯧, 낭만을 모르는 신수 같으니라고.]나비가 푸른 기운으로 화해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다음 순간, 나비가 앉았던 내 손가락 끝에서 반투명한 형체가 퐁 하고 나타났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 꿈인가 봐.”
손바닥 크기보다 더 작은 영령이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멋지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 지 보름도 안 돼서 여러모로 참 민망하긴 하다만, 아가. 좋은 게 좋은 거지. 안 그러냐?]“진짜 할아버지 맞아요……?”
돌아온 거야? 어떻게? 신계로 한번 넘어간 영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데…….
[그건 네 신수에게 물어보면 되겠구나, 카티샤.]설명을 요구하듯 아이칼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저는 모른다는 양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이기까지 한다.
“힐라이야가 너를 예뻐하나 보지, 카티.”
“…….”
“당분간 왔다 갔다 한다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기운 대신 몰려온 행복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마저 틀어막고 있었다.
“약속은 지켰다.”
“예, 틀림없이.”
그때 여신이 내려보낸 음성에 그가 내놓았던 대답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키, 너도, 너도 그녀에게 뭔가를…….”
[너야말로 카티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구나, 아이칼.]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헤르젠 할아버지가 다시금 푸른 나비로 변해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도 다시 보니 좋지, 카티?]하, 탄식 같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 정말…….”
이제 더는 울기 싫었는데. 갑자기 이래 버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울든 웃든 하나만 해야 하는데 도무지 얼굴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푸른 나비가 열린 문틈으로 쏙 빠져나갔다.
눈가에 나른한 웃음기를 띤 아이칼이 문가를 향해 고갯짓했다.
“안 가 봐?”
그 말이 내 걸음을 떠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침실을 박차고 달려 나오는 중이었다. 커다란 눈표범이 느긋하게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신 거예요? 계단에서 그렇게 뛰시다간 넘어져요……!”
마가렛에게 괜찮다고 소리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반쯤 구르듯이 계단을 내려가 2층 복도를 달렸다. 서재 앞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던 제미언과 키스 경이 반색하며 나를 맞이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각하께 아침 인사하러 오셨습니까?”
“주방장에게 아침 식사는 서재로 올려 달라고 할까요?”
숨이 턱까지 차올라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잔뜩 상기한 얼굴로 서재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카티?”
이른 아침인데도 서재에 모여 있던 아빠와 오빠, 언니가 차례로 고개를 들었다. 폭풍처럼 들이닥친 날 보는 가족들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
“이리 와, 카티. 여기 앉아.”
푸른 나비가 서재 안으로 살랑거리며 날아들었다. 곧 나비가 아까처럼 할아버지의 영령으로 퐁 변하자, 서재 안에 요란한 소란이 일었다.
“아버지?!”
“어머머! 세상에, 할아버님!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냐고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여기 계시냐고 여쭤야지, 이 바보 동생아! 아냐, 환영 마법인가?”
[틀렸어. 네들 감시하러 온 신의 사자다, 요 녀석들아!]아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물론이요, 아르닌 언니의 비명과 베르너 오빠의 외침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뤘다. 그 위에 할아버지의 껄껄거리는 웃음이 뒤덮였다.
여유롭게 나를 따라온 눈표범이 내 손에 코를 비볐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가 이곳에 있었다. 내가 되찾으려 애썼던 세계, 그리고 나의 존재로 인해 완성된 작은 세계가 여기에 있다.
나의 평화, 나의 사랑, 나의 용기, 나의 안식처…… 그 모든 것의 다른 이름인 이들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좋은, 좋은…….”
작은 목소리에도 서재의 모두가 일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예쁜 눈동자들 속에서 반짝이는 사랑에 숨이 막혔다.
비현실적인 행복감이 기어이 나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차오른 기쁨과 설렘에 이대로 질식한대도 좋을 것만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모두!”
간신히 그렇게 외친 뒤, 나는 눈물 맺힌 눈을 활짝 휘어 웃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완벽한 아침이었다.
[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