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
24화
게스파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왔다. 멀찍이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그 역시 헤르젠 할아버지만큼이나 건장하고 기백이 대단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어르신이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아가, 네 이름 앞으로 된 재산의 규모에 대해서는 들었느냐?”
“……네. 현금으로만 백만 골드, 매년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부수입들, 그리고 아스트로카 중앙은행 금고…….”
“그것들은 블라스코의 사업 자금이란다.”
“자금이요……?”
“그래. 그것도 당장 이번 달부터 필요한 자금이지. 헤르젠의 명의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블라스코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거든.”
뭐야, 그건 좀 양아치 아냐?
내 눈초리가 미심쩍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게스파 어르신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금고가 상시 열려 있었으니 명의가 헤르젠 앞으로 되어 있어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그가 명을 달리하며 금고가 잠겨 버렸단다. 적법한 상속인이 아니면 열 수 없게끔 말이야.”
“아…….”
결국 당장 융통해야 할 현금이 모조리 내게 묶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자금줄이 묶였으니 블라스코가 진행하고 있던 가업들이 죄다 올 스톱 상태라는 뜻이었다. 왜 방계들까지 죄다 본가로 모여들었는지 이제 알겠다.
“블라스코의 인장, 마법 관리국의 공증, 법무국의 공증까지 찍혔으니 우리는 이제 그 재산에 손끝 하나 댈 수 없게 되었다.”
“아…….”
“하지만 아르닌의 말처럼 우리는 너를 죽일 수도, 위해를 가할 수도, 심지어는 협박조차 할 수 없단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하셨겠구나.’
블라스코는 나를 해칠 수 없고, 내 허락 없이는 할아버지의 유산에 손조차 대지 못하며, 심지어 차기 공작위까지 내게 위협당할 위기다. 절대 갑이 된 셈이었다.
역시 헤르젠 할아버지가 아무런 안전 장치 없이 나를 이 험악한 곳에 떨어뜨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니 루티어드의 말처럼, 가장 깔끔한 건 너를 우리 가문의 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겠지.”
내가 이 가문에 입양되기 위해 이런 시험대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까지, 미리 다 예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녀야, 우리로서도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너를 받아들일 수는 없단다. 네가 헤르젠에게 확신을 주었듯이, 우리에게도 확신을 주는 것이 옳지 않겠니?”
게스파 어르신의 말씀 또한 타당했다.
어르신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어떤 것인가요?”
“상속 시험.”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 반응을 놀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게스파 어르신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래. 네가 헤르젠의 후계자, 그리고 루티어드의 딸이 될 자격이 있는지, 너의 능력과 가능성을 증명하는 시험 말이다.”
방계 쪽에서 먼저 상속 시험을 제안했다.
시선이 저절로 위를 향했다. 가장 상석에서, 의자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묻은 공작이 미끈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흡족해 보였다.
아. 뇌에 탄산수를 들이부은 듯 그제야 깨달음이 왔다.
‘내게 유리하게 판을 끌어가 주겠다는 게 이 뜻이었구나.’
방계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속 시험으로 화제를 전환할 수 있도록, 공작이 승부수를 던져 준 것이다. 이제야 앞뒤가 명쾌하게 밝혀졌다.
게스파 어르신이 부드럽게 내게 답을 종용했다.
“어떠니, 카티샤? 받아들이겠니?”
나는 공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들일게요.”
“좋아. 합의했구나.”
그 순간 게스파 어르신의 음성이 확성기를 가져다 댄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커졌다.
회의장에 앉은 모두가 어르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주 결정전을 치르는 것과 비슷한 방식의 상속 시험을 제안하마. 시험은 총 4번으로, 어떤 과제를 낼 것인지 상세한 내용은 가문 회의를 통해 결정토록 한다.”
좌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시험 과제는 타고난 재능, 지략, 무력, 위기 대처 능력 등 블라스코의 자질을 골고루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회의를 통해 선정한다. 네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만 진정한 헤르젠 블라스코의 상속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현 블라스코의 직계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어떠한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스파 어르신이 공작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동의하나, 루티어드?”
“동의합니다.”
공작이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무척이나 여유 만만했다.
“저로서도 오히려 더 좋군요. 이왕 입양하는 거, 자격이 있는 아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블라스코의 직계 세 명이 모두 동의했다. 곧이어 안건을 다수결에 부쳤다.
결과는 통과였다.
공작이 손가락을 퉁기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곧이어 내 앞에 두루마리가 나타나더니 아래로 촤르르 펼쳐졌다.
“서명해라, 카티샤. 시험에 성실히 임할 것을 선언하는 확인서다.”
조금 전에 게스파 어르신이 말씀하신 내용이 확인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카티샤 아인슬리
내 이름을 적어 넣고 펜을 떼자마자 글씨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그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잘 생각했다, 아가.”
게스파 어른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온 홀에 메아리치던 어르신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어르신께서 다정다감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냈다…….’
가문 회의가 순탄하게 끝이 났다.
나는 이제 네 번의 시험을 치러 블라스코의 상속녀로서, 그리고 직계 후보로서 자격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나오든 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틀리는 법이 없으니까.
혹시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석 달 뒤엔 할아버지의 영령이 부활하실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아. 겁먹지 마, 카티샤.’
기대감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 * *
상속 시험 선언을 끝으로 나는 회장을 먼저 나왔다.
가문 회의는 내가 퇴장한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아마 시험 과제를 결정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마가렛이 귀띔해 주었다.
“잘하셨어요, 아기씨. 떨지도 않으시고, 해야 할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셨고요!”
“헤헤. 별로 안 무섭던걸요.”
사실 마지막에 서명할 땐 등골에 식은땀이 좀 흘렀지만, 나는 아닌 척 허세를 떨었다.
아, 안 쫄았어. 진짜야.
“일단 주인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서재에서 기다리셔요, 아기씨. 어휴, 제 가슴이 다 두근거려서 혼났어요.”
마가렛은 물론이고 제미언과 키스 경과 주방장 호미 아저씨까지 오매불망 나를 기다린 듯했다.
“같은 블라스코의 성을 쓴다고는 하지만 사실 촌수가 먼 쪽은 비즈니스 파트너 같은 관계라서, 아마 최대한 어려운 과제를 내려고 벼를 거예요.”
“하지만 너무 겁먹지 마세요. 아기씨가 아직 어리시니까 당연히 난이도 조정이 있을 거예요!”
“어휴, 딸 삼고 싶으시다니. 일찍이 눈치채긴 했지만, 가주님께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선포하실 줄은 몰랐네!”
다들 내가 상속 시험을 치르고 정식으로 입양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무척 반기는 듯했다.
‘다행이다. 블라스코 삼인방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택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주는구나.’
자신감이 차오른다.
나는 양손을 불끈 주먹 쥐었다.
“저 열심히 해 볼게요.”
“어흑, 우리 아기씨. 열심히 안 하고 그냥 설렁설렁하셔도 돼요.”
“시험 통과 못 한다고 막 쫓아내고 그러지 않아요, 저희!”
“가주님이나 도련님, 아가씨가 못되게 구시면 저희에게 달려오세요! 세상의 모든 아이는 사랑만 받아야 하니까!”
이런 마음 따듯한 사람들을 보았나!
이러지 마세요. 감동할 것 같단 말이야. 감동하면 눈물 나온단 말이야…….
“어헝…… 감사합니다아…….”
그제야 극도의 긴장감이 탁 풀리는 바람에, 나는 결국 눈물 콧물을 떨구고 말았다.
공작이 돌아온 건 내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코를 팽 풀어 젖히던 때였다.
나를 어르고 달래던 제미언과 마가렛, 키스 경과 호미 아저씨가 재빠르게 가주에게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서재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공작은 눈이 팅팅 붓고 코가 빨개진 나를 보곤 딱 한마디 했다.
“오렌지가 할로윈 호박이 됐네.”
나를 향한 공작의 인격 모독은 여전했다.
나는 딸꾹질을 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공작님, 아까 그건, 끕, 진심은 아니시죠?”
“뭐가?”
“저를 키우고 싶다고 하신 거요, 딸꾹. 그런 말씀은, 끅, 미리 안 해 주셨는데…….”
“그럼 명색이 가주고 의장인데 가문 회의에서 거짓을 말했겠나.”
공작이 정복 재킷을 벗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내게 관대한 편이었으나, 그게 호감과 동의어가 될 순 없었다.
나는 공작의 눈치를 슬쩍 보고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꺼냈다.
“왜인지 여쭤봐도 돼요? 그, 저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귀소 본능처럼 책상으로 다가가던 공작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힐끗 나를 돌아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여?”
그가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지며 나른하게 웃는데, 이 밤중에 어딘가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공작은 장성한 자식이 둘이나 있는 중년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저 얼굴이 어떻게 내일모레 마흔이란 말이야!’
저 얼굴로 대륙의 일인자라니, 세상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불공평했다.
내가 뜻밖의 눈호강에 얼이 빠져 있는 사이, 공작은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지. 아까 못 들었어? 그게 제일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라니까.”
“……헤르젠 할아버지의 뜻도 존중하고, 재산은 블라스코의 명의로 돌리고요?”
“바로 그거지. 더 나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봐. 참고는 해 볼 테니.”
내 생각에도 그게 가장 깔끔하긴 했다. 하지만…….
“입양을 한다는 건, 가족이 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공작님 딸이 된다는 건데.”
“그런데?”
되묻는 투가 도리어 뭐가 문제냐는 듯했다.
‘카티샤 아인슬리가 아니라 카티샤 블라스코가 된다는 건데…….’
물론 천애고아인 데다 어리기까지 한 나야 이 집에 입양되면 만세기는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찝찝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원작 속 니엘라의 서사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블라스코에서 니엘라를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물론 공작가 사람들의 따돌림과 괴롭힘도 있었지만, 실은 지독한 외로움이 가장 컸다.
그리고 나도 가난만큼이나 외로움이 싫다. 무늬만 가족인 것도 싫다. 나는 방치당하기 싫었다.
나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며 내 발끝만 보다가, 모기만 한 소리로 물었다.
“……제 아빠가 되어 줄 거예요?”
오